책받침

깊이 없이 자극적인 기사만 쏟아내는 언론은 반성해야.

by 허윤숙

새해가 되기 전 다이어리를 사러 갔다. 예쁜 공책과 필기구들이 즐비한 풍경은 무척 화려하다. 미국에 사는 동생이 하는 말이 미국인들은 한국 문구제품을 가장 선호한다고 한다. 품질뿐만 아니라 색감이나 다자인도 좋고 무엇보다 종류가 다양해서 선택의 폭이 넓다고. 좋아하는 만화 캐릭터가 그려져 있는 공책은 값이 꽤 비싼데도 금세 동이 난다고 한다.


우리 어린 시절엔 종이가 귀했다. 재생 종이 공책이 대부분이었는데, 표지 안쪽까지 줄을 쳐서 쓰곤 했다. 재생용 종이는 부스러기 같은 것이 걸리적거리기도 했고, 종이 두께가 일정하지 않았다. 연필조차 질이 나빴다. 연필심인 흑연이 너무 단단하고 흐렸다. 연필을 칼로 깎아 글씨를 쓰다 보면 종이가 찢어지거나 연필심이 부러지기 일쑤였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쓰인 것이 있다. 지금은 사라진 이름, 책받침.


책받침 입장에선 억울할 듯하다. 왜 책받침인가 하고. 자긴 공책을 받쳐줬는데 말이다. 제대로 말하려면 공책 받침이라고 해야 했다. 그나마 얼마간 사용 후 그 존재가치가 사라졌다. 지금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는 책받침. 책받침은 조악한 품질의 연필심과 거친 공책의 단점을 가려주는 임시방편으로 사용되었다.


그나마 잠깐 호사를 누리기도 했다. 플라스틱 책받침 표면에 피비캣츠나 부룩 실즈 아니면 국내 유명 연예인 얼굴을 크게 확대해 비닐로 코팅하는 것이다.(그 여자 연예인들에게 과거 '책받침 여신'이었다는 말을 하곤 한다.)


책받침을 챙겨 오지 않아 그냥 공책에 글씨를 쓴 적이 있다. 그땐 글씨가 공책 표면에 꾹꾹 자국을 남긴다. 얇은 종이 두께 때문에 뒷면이 울퉁불퉁해진다. 그 위에 글씨를 쓰기 힘들 정도로. 책받침은 커닝 페이퍼로 활용되기도 했다. 구구단이 써져 있는 책받침이다.(실제로 시험 볼 때 슬쩍 커닝하곤 해서 나중엔 시험 볼 때 책받침이 사용 금지되었다.) 가격도 저렴하고 유명 연예인 얼굴을 볼 수도 있고, 또 여름이면 부채로 활용하던 책받침. 그 책받침은 이름마저 대충 만들어져서 잠시 우리 곁에 머물다 사라진 물건이다.


이런 물건은 또 있다. 버스를 탈 때 차비 대신 내곤 하던 토큰이라는 동전. 가운데 구멍이 뚫려 있어 조선시대 상평통보 같이 생겼는데 크기는 더 작은 동전이다. 그 동전을 버스 탈 때마다 내곤 했다. 그런데 왜 이름을 토큰이라고 했는지 모르겠다. 종이에 인쇄해서 팔았던 버스표가 회수권이다. 이 회수권은 10매가 한 줄로 되어 있던 것 같다. 그 종이를 한 칸씩 잘라서 버스표로 사용했다. 그런데 왜 이름을 회수권이라고 했을까? 버스회사에서 회수해서 그랬나.


요즘은 버스를 타는 방법이 다양하다. 보통 현금을 내지 않고 카드나 핸드폰을 기계에 찍는다. 이 편리한 도구가 나오기 전까지 토큰이나 회수권이 '책받침'처럼 머물다 간 셈이다. 이름을 대충 지어 받아, 남을 위해 자신을 모두 내어 주어 사회의 불합리함이나 결핍을 메웠던 존재들.


슬프게도 이런 일이 사람에게도 있다. 최근 빈번했던 아동 학대사건 대상 아동들이다. 어린아이들은 자기 의사를 표현하지 못한다. 그저 어른들이 내리는 정책에 응할 뿐. 아무리 학대 신고를 해도 가해자가 무혐의 처분을 받으면 피해 아동이 다시 집으로 되돌려진다. 그 후로 제2, 제3의 피해가 지속되는 것이다. 결국 사달이 나야 대책을 이야기한다. 아동정책은 '아이들의 피를 먹고 자란다.'라는 말이 있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피해아동이 더 나와야 할까? 무지하고 무책임한 어른들, 잘못된 사회 시스템의 희생양으로서.


아동학대 치사 사건으로 유명한 '정인이 사건'이 특히 가슴 아프다. 생전에 자기 이름도 제대로 불려지지 않아서다. 자기 이름이 뻔히 있는데도 양모가 자기 멋대로 이름을 바꿔버렸다. 게다가 사후에 다시 이름이 바뀌었다. 수많은 기사에 오르내리는 상징적인 이름으로서.(무엇보다도 기자들이 써대는 얄팍하고 자극적인 기사들이 역겹다.) 이름조차 제대로 불리지 못하고 다른 것들의 부족함을 메우기 위해 잠깐 머물다 간 책받침처럼, 세상에 잠시 머물다 간 아이.


이 아이만 생각하면 너무 큰 슬픔과 죄책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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