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독대
장독대에는 별이 있고 이야기가 있었다.
몇 년 전 경주에 가서 첨성대를 보았다. 가서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높이도 낮고 굴뚝같이 생긴 탑에 불과했다. 그런 데서 무슨 별을 관찰했는지. 게다가 별을 관찰하려면 깜깜한 산중에, 그것도 높은 산꼭대기에 세워놓아야 하지 않을까?
당시 환경을 생각해 보니 이해가 되었다. 이 첨성대에서 별을 관찰하던 시기에는 전기가 없었다. 밤에는 네온사인이나 가로등 불빛이 없었으니 어디에 세워놓아도 다 같은 조건으로 깜깜했던 것이다. 게다가 산꼭대기나 평지나 별과의 거리를 생각하면 별 차이가 없다.
몇 년 전 방영되었던 ‘응답하라 1988’에서는 인상 깊은 장면이 있었다. 남자 주인공이 형과 장독대에서 밤하늘을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꿈에 대해 이야기한다. 동생은 형에게 자신이 공군 비행 조종사가 될 거라고 말했다. 그 꿈은 원래 형의 꿈이었다. 형이 건강 때문에 그 꿈을 포기하자 자신이 대신 꾸어주는 것이다. 형은 그 의도를 알고는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한다. 형제의 우애가 아름답게 보였다. 둘이 대화를 나누는 머리 위에는 깜깜한 밤하늘이 펼쳐져있다. 그리고 그 위에 수많은 별이 총총 빛나고 있었다.
드라마를 보며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그 당시 여름밤이면 식구들과 장독대에 돗자리를 깔고서 누워서 밤이슬을 맞아가며 대화를 나누곤 했다. 그때 하늘에도 수많은 별이 빛나곤 했다. 무척 아름다웠다. 망원경 하나 없이도 볼 수 있던, 우리에게 아낌없이 모습을 드러내던 별들. 그 당시 장독대는 가정 보급형 천문대였던 셈이다.
옥상에서 꿈을 이야기하는 데엔 이유가 있다. 별을 보면서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말 때문이다. 특히 별똥별이 떨어지는 순간 소원을 빌면 실제로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니. 별똥별이 잘 보이는 곳이 장독대였으니 자주 올라간 것이다. 언젠가 나타날 별똥별을 기대하면서. 또 지붕에다 빠진 이빨을 던지며 주문을 외치던 곳도 장독대다. 이빨의 주인이 직접 들고 장독대에 올라가야 한다. 그리고는 큰소리로 외치는 것이다. '헌 이빨은 갖고 새 이빨을 달라고.' 그렇게 외쳐야 예쁜 이빨이 난다고 믿었다.
높은 곳이라고는 하지만 장독대와 마당은 높이에서 별 차이가 없었다. 마당보다 장독대에 올라서 별을 본 데는 이유가 있다. 마당에는 등나무에서 이어진 덩굴과 나뭇잎 차양이 뒤덮고 있어서, 하늘을 볼 공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서 제일 높은 곳을 치자면 지붕이었다. 하지만 지붕은 기와로 되어 있어서 오르기가 힘드니, 계단이 있는 장독대에서 별을 본 것이다.
어린 내게 장독대 계단은 천국으로 오르는 계단이었다. 그곳을 오르면 집 전체를 볼 수 있고 밤에는 하늘을 하나 가득 메운 별을 볼 수 있었으니. 그 계단은 어린 내게 높이가 꽤 높았던 걸로 기억된다. 한 계단을 오를 때마다 힘에 부쳤다. 바로 밑에 여동생이 있었다. 그 여동생은 남자아이 못지않은 개구쟁이였다. 힘도 세어서 장독대 계단을 일찌감치 오르내렸는데, 한 계단도 아니고 두 계단을 한꺼번에 뛰어내리기도 했다.
보기만 해도 아찔했다. 나에게는 고소공포증이 있는데 어릴 적 장독대 계단에 대한 공포에서 시작되었다. 나중에 이 층 양옥집으로 이사 가게 되었다. 이 집에서 동생은 옥상 가장자리를 양팔 벌리고 걷기도 했다. 나는 밑에서 벌벌 떨며 내려오라고 외치고 동생은 그런 나를 비웃듯 한 발로 뛰기도 했다. 겁쟁이인 나는 꿈도 못 꿀 일이었다. 하루는 이층 옥상에서 대문 위로 훌쩍 뛰어내리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하나도 안 다치는 신출귀몰의 아이였다.
그렇게 높은 곳을 곧잘 오르던 동생은 진짜로 높은 곳에 가고 싶었다보다. 젊은 나이에 일찍 세상을 떠나버렸으니. 동생이 세상을 떠나기 일주일 전 나와 함께 산책을 하던 일이 생각난다. 동생은 자신이 곧 죽을 것임을 알고 있었나 보다.(당시 동생은 암 투병 중이었다.)
천천히 걷던 동생은 갑자기 깜깜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저기 저 별자리 생각나? 우리 어릴 적 장독대에서 보던 거. 언니랑 손가락으로 국자 모양을 손으로 그리면서 놀았잖아. 저 별은 참 오래 사네. 저 별은 내년에도 저 자리에 그대로 있겠지? 그리고 나는.” 동생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밤이라 참 다행이었다. 둘 다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보이지 않아도 되었으니.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있는 저 별처럼 우리도 오래 살면 좋겠지만. 앞으로도 별은 우리 곁에 항상 있을 테지만, 우린 그러지 못한다. 삶에 지칠 때 가끔 동생의 말을 꺼내어 뒷말을 상상하곤 한다. “그리고, 나는 없을 거야. 그렇겠지? 언니는 나 대신 잘 살아야 해.” 이건 정말이지 너무 신파적이다.
요즘은 장독대의 주인공인 장독이 사라졌다. 장을 직접 담가먹는 사람도 드물다. 가끔은 그 장독대가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버리고 싶은 것들을 지붕 위로 휙 던져버리게. 슬픔, 후회, 미움, 고통, 그리고 그리움. 그리고 여름밤에는 하늘의 별을 보며 소원을 비는 것이다. 나에게 튼튼한 것들이 새로 돋아나기를 바라면서. 장독대에서 빌면 진짜로 이루어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