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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윤숙 Nov 06. 2020

콧물 수건

그땐 겨울이 왜 그리 추웠는지

 올핸 마음이 유독 바빴다. 아이 둘 입시를 치르느라. 정작 당사자인 아이들은 그대로인데 나만 늙었다. 계절별로 옷 챙기는 것조차 버거웠다. 작년 여름에 땀을 많이 흘렸다. 그래서 올핸 여름을 단단히 준비해야지 다. 열심히 어떤 옷이 땀 흡수가 잘되고 시원할까 하고 알아보던 중, 눈앞에서 여름이 사라져 버렸다. 게다가 아, 가을이 오나 하기도 전에 벌써 입동이란다.  


 내 탓만은 아니다. 언젠가부터 '계절'이 함부로 애틋하다. 적어도 우리에게 입장, 퇴장 인사, 인수인계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여름+봄 비빔밥 같은 시간들이 지나버리고, 가까스로 우수에 젖어들락 말락 했다. 그런데 갑자기 무대를 갈아치운다. 이를 보는 내 모습이 마치 초짜 딱지를 떼지 못한 희극배우 같다. 얼굴에 칠한 허연 분가루를 여기저기 떨어뜨리며, 허둥지둥 무대 밖으로 밀려난 나아주 어린 시절 '사시사철'은 이러지 않았다. 인사성도 밝았고, 독종같이 맵고 뜨거운 존재였다.


 40여 년 전 초등학교 입학식 날, 어린 나는 가슴을 치고 있었다. '차라리 오지 말걸.' 내가 겨우 이러려고 그랬나. 아직 8살이 안 된 나는 빨리 학교에 가고 싶다고 울며 떼를 쓰다 쓰다, 바닥에 뒹굴기까지 했다. 결국 손을 든 부모님은 나를' 청강생'자격으로 학교에 입학시켰다. 그렇게 얻어낸 등교권인데, 내 최초의 의식(국민학교 입학식)은 회한의 서릿발만 흩날리게 되었다.


 다른 건 참을만했다. 민망한 포즈의 율동들(적어도 내가 보기엔 "둥근 해가 떴다."라고 굳이 부산스럽게 몸으로 말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이나 아무리 해도 삐뚤거려지는 줄 서기 등.(지금 생각해보니 나에게 그때부터 '난시 끼'가 있어서 줄 서기가 힘들었던 건 아닌지.)


 참을 수 없는 게 있었다. 그건 인재가 아니었다. 천재였다. 바로 혹독한 추위. 내 기억으로 당시 날씨는 최전선 부대 군생활을 훈장처럼 이야기하는 남자들의 무용담 그 자체였다. 노래할 때마다 내 입김이 즉석 고드름으로 얼었다.(이건 과장인 것 같기도 한데 현재 나의 심한 과장법은 이 시기에 생긴 듯) 제일 참을 수 없던 건 발가락이었다. 


 교장선생님의 훈화는 왜 그렇게 긴지. 나에게 교장선생님의 존재는 만화책에 나오는 악당이었다. 배가 불쑥 나오고 짜리 몽땅한 데다 안경을 썼는데, 코가 길고 높은 매부리코였다.(이것도 한참 왜곡된 기억이다. 당시 우리나라에 그렇게 큰 코를 가진 사람은 눈을 씻고 봐도 없었다. 대부분 겸손한 코들뿐인데 심정적으로 그렇게 보인 듯)


 내게 그들은 임무수행 때문에 이 지구에 파견된 악당들이었다.(어리고 순수한 영혼들을 파괴하러 온). 그들의 규칙은 단 하나였다. 즉 아이들의 발가락을 꽁꽁 얼려서 인간 아이스케키를 만든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하나둘 픽픽 쓰러지게 만든다. 서 있던 아이들이 도미노처럼 모두 쓰러지고 나면 씩 웃으며 뒤돌아 가는 것.


 그렇게 되기까지 몇 시간이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것이다.(이 기억도 왜곡되었다. 기껏해야 20분 정도 했을 듯) 그러다가 쓰러지는 아이가 나오면 못 본 척하고 계속해서 말하는 것이다. 다들 소란을 피우면 더 큰 목소리로 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주문처럼 외운다. 그러면 아이들은 더욱더 괴로워하며 빨개진 귀를 붙잡고 신음하다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동상이 되어간다는 이야기.


 그 정도로 견디기 힘든 추위였다. 엄지발가락이 유독 시렸다. 추위를 이겨보려고 엄지발가락을 꼬물거려 보았다. 엄지와 검지를 서로 꽈배기처럼 꼬아보는 것이다. 엄지발가락을 검지 발가락에 얹었다가 다시 검지 발가락을 엄지발가락에 얹었다가. 손가락도 형편은 마찬가지였다. 당시엔 엄마가 짜준 벙어리장갑이 유행이었다. 


 그 장갑들은 집집마다 화려한 패션을 자랑했다. 앞 뒤가 다른 색상이어서(파리 프레타 포르테에서도 이런 전위성은 드물다.) 손등은 빨강, 바닥은 파랑이거나, 윗부분은 노랑, 아랫부분은 파란색으로 뜬 장갑들.(이 무슨 근본 없는 색 조합인지. 톤온톤도 아니고 톤앤톤도 아니고 톤인톤도 아닌 그 무엇. 짐작컨대 이건 다 계획이 있던 디자인이라기보다, 자투리 실로 뜨다 생긴 생계형 '뉴 노멀' 디자인이었다.)


 이 장갑은 두껍긴 엄청 두꺼운데 따뜻하진 않았다. 순 국산 100% 나일론 실이였기 때문. 당시엔 양모나 면으로 된 실은 눈을 씻고 봐도 없었다. 겨울이면 촥촥 일어나는, 정전기 생산용 실들 뿐이었다. 게다가 커다란 대바늘로 뜬 거라 통풍이 원활했다. 코 매듭 부분이나 연결부위에 구멍 만들기가 쉬워서, 심심할 때마다 손가락을 넣어 구멍을 넓혔다. 몸은 춥고 귀로는 못 알아들으니.


 이토록 허술한 방한장비들로 무장한 어린아이들을  추위에 세워놓다니. 나는 속으로 악당(교장선생님)이 춥고 불쌍한 아이들에게 만행(교육)을 저지른다며 분개했다. 처음부터 부모님이 나에게 퇴로를 열어놓은 게 문제였다. 청강생으로 다니다가 힘들면 그만두라고 하신 것이다. 한참 어린데 학교 갈 욕심만 부리. 물릴 수도 있는 제품(학교)을 한번 탐색하러 간 셈이었다. 그러니 뭐든 깐깐하게 품평한 것.


 문제는 아침 등교 때마다 생기는 갈등이었다. 당시 3월은 한 겨울이었다. 꽃샘추위는 무슨,  부리기 민망할 정도로 내내 추웠으니. 그러니 아침에 학교를 가다가 맘이 바뀌곤 했다. 학교를 가려면 공터를 지나가야 했는데 시베리아 벌판처럼 느껴졌다. 공터엔 바람이 매섭게 불었다. 매서운 바람을 맞다가 맘이 바뀌어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러면 엄마는 왜 다시 왔냐고 하고 나는 아주 당연한 듯, "추워서."라고 대답하는 날들이 많았다. 코 훌쩍거림은 기본 사양이었다. 추운 게 힘들어서 울기도 했고, 추위에 코가 얼어서 콧물이 휘날린 흔적 때문이다. 그렇다. '콧물'.(콧물은 아이들의 시그너쳐였다. '콧물 배기', '코 찔찔이'가 어린아이들의 별칭이었을 정도. 콧물들의 커밍아웃은 강추위에 맞선 '어린 코'들의 반란이었다. 나도 그 반란 대열에 착실하게 임했던 것뿐.)


 지금은 사라졌지만 당시엔 국민학교 입학생 필수품이 있었다. 학교 준비물 목록에 있던 건데 바로 '콧물 수건'이다. 테두리를 듬성듬성 홀치기 한 가제 손수건. 그 손수건을 길게 네 번 접어서 아이들 왼쪽 가슴에 매단 것이다. 이때 철사로 된 옷핀을 사용했는데 부잣집 아이들은 옷 핀 머리가 플라스틱 안전핀으로 되어있었다.(그 옷핀으로 손수건을 꽂은 아이들이 어찌나 부럽던지. 그 아이들은 피부도 하얗고 옷도 멋지게 입었었다.)


 그 손수건은 아이들 콧물 닦이용이었다. 아이들이 하도 콧물을 흘리니 여기저기 훌쩍 거리는 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어린 손으로는 야무지게 코를 풀 수도 없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응급조치는 단 하나, 그들이 왔던 곳으로 도로 '들이마시는' 수밖에. 보는 사람은 비위가 상하지만 어쩌랴.


 아니면 오른쪽 소매로 쓰윽 훔치는 방법도 있었다. 개구쟁이들이 주로 그랬는데, 손수건 살 돈이 없는 집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오른쪽 옷소매를 손가락을 구부려 잡아당겨서는 쓱쓱 문지르고 다녔다.(콧물 수건이 네 번 접혔기에 앞뒤로 둘려 쓸 수 있었지만, 폭포수 콧물 소유자인 경우 용량이 초과되곤 했다. 이때  자동적으로 옷소매로 가곤 했다. 콧물이 마르면 풀 먹인 광목처럼 뻣뻣해져서 스치기만 해도 쓰라렸기 때문.)


 요즘 아이들은 콧물을 흘리지 않는다. 나는 이 콧물이 아이들에게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여겼다. 첫 아이가 콧물을 잘 흘리길래 그런가 보다 하고 손수건으로 닦아주기만 했다. 그러자 다른 집 엄마들이 나를 이상하게 바라보았다. 왜 병원에 데려가지 않느냐고. 그 엄마들은 아이들이 콧물만 흘려도 대학병원에 가서 온갖 검사를 다 해보았다. 사실 다른 집 아이들은 콧물을 원래부터 흘리지 않았다. 우리 아이들만 겨울이 되면 콧물을 흘리는 게 아닌가. 가만 보니 많은 것들이 다른 집 아이들과 우리 아이들이 달랐다.


 원인을 추적하다 알아낸 것이 다.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1년간 모유를 먹였다. 분유는 한 통도 안 먹이고. 분유에는 암소가 먹은 항생제 성분이 농축된다고 한다. 분유를 먹는 아기들이 자연스레 항생제에 노출되는 셈이다. 그러니 겨울이 되어도 코가 말짱했다. 반대로 우리 아이들은 모유를 먹이는 동안 내가 약을 못 먹으니, 이래저래 건강한 면역물질을 섭취한 셈이다.


 그 결과 다른 아이들은 아토피, 폐렴, 천식, 중이염 등을 달고 살았다, 그 아파트 단지는 새로 입주해서인지 새집 증후군으로 인한 아토피가 있었다. 우리 아이들은 그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로웠다. 유행성 독감이 그 아파트 단지를 훑고 지나갔는데, 딱 한 곳 우리 집 만 비켜갔다. 지금도 우리 아이들이 콧물을 흘린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믿고 있다.


 그것 말고도 요즘 아이들이 콧물을 흘리지 않는 이유는 더 있다. 집안이 따뜻하고 바깥도 예전만큼 춥지 않아서다. 우리나라는 아열대 기후의 나라가 되고 있다. 제주도에만 재배되던 바나나가 대구에서까지 재배된다고 한다. '콧물 수건'처럼 겨울까지 사라지는 건 아닐지. 이제 더 이상 우리나라의 기후에 대해 조사해오라고 숙제로 내주면, '사계절이 뚜렷한 온대기후'라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


 내가 확실히 늙어가나 보다. 이제  별 걸 다 아쉬워한다. 살아있는 동안 조금이라도 눈을 더 보고 싶고, 예전의 매서운 추위도 느껴보고 싶다. 내일쯤 미국 대선 결과가 뚜렷해질 전망이다. 현재 바이든이 유력한데 한 가지면에서 반가운 일이다. 그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제일 먼저 파리 기후 협약을 재가입하겠다던 공약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 트럼프가 이번 대선에서 패하게 된 많은 이유 들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고 짐작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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