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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윤숙 Jun 01. 2020

양푼 비빔밥

양푼 밥에 비볐던 건 열무만이 아니었다.

  상해에 살 때 조선족 직원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중국에는 '침 국수'라는 게 있다고. 정확한 명칭인지는 모르겠다. 그 국수는 아주 커다란 냄비에 끓이고, 여러 명이 번갈아서 젓가락으로 머리를 숙여 먹는다고 했다. 이 국수는 절대로 그릇에 덜어먹으면 안 된다. 그 냄비 안에서만 먹는 것이 원칙. 여러 명이 냄비에 젓가락질을 하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낯 선 풍경이다. 왜 그렇게 먹는지 물어보았다. 그러자 대답이 충격적이었다. "이름 자체가 침 국수잖아요. 여러 사람의 침과 국수가 섞여서 달달한 국수가 되는 거니까요."


 요즘 사람들에겐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다. 침과 국수의 콜라보라니. 그것도 여러 사람의. 사람마다 침의 성분이 다 다를 것이다. 그러니 그 침들이 화학작용을 일으켜 특유의 맛을 내는 것이다. 직원 말로는 맛이 아주 기가 막히다고.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음식이 있다. '양푼 열무비빔밥'이다. 먹을 것이 귀하던 어린 시절 그나마 풍족했던 것은 채소와 보리쌀 등이었다. 요즘 같은 봄철에 자주 먹었는데 이 시기에 열무가 연해서 맛있기 때문이다. 엄마는 리더십이 있었다. 어딜 가든 동네 사람들을 다 불러 모으는 언변과 처세술이 강했다. 그 처세술먹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나른한 봄 철 오후 엄마는 동네 사람들을 불러 모아 파티를 벌였다. 파티라고 해 봐야 대단한 음식을 대접하는 건 아니었다. 값싸고 흔한 열무를 사다 비빔밥을 해 먹는 것이었다. 그 음식은 어른들의 음식이었다. 아이들이 먹기에는 거친 데다가 날것의 향이 났다.  파티에서 어린애는 나 하나였다. 어른들은 어린애가 어른 음식을 잘 먹는다고 칭찬해 주셨다.


 나는 열무비빔밥이 진짜로 맛이 있었는데 말이다. 그 당시 열무는 지금보다 더 달았다. 색깔도 달랐던 것 같다. 연하고 고운 연둣빛을 띠었다. 그 열무를 손가락 길이로 댕겅댕겅 잘라 찹쌀풀을 쑤어 빨간 고춧가루에 무친다. 신 김치만 먹던 나도 이 열무김치는 먹을만했다. 그 열무김치에는 보리밥이 어울렸다.


 비빔밥 레시피는 간단하다. 먼저 커다란 양푼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구수한 보리밥을 담는다. 그 위에 갓 무친 빨간 열무김치를 듬뿍 넣는다. 그 위에 고추장을 적당히 넣고 들기름을 휘휘 돌린 후 커다란 나무주걱으로 골고루 섞어주면 끝이다. 이때 비율이 중요하다. 고추장이나 밥, 또 들기름이나 열무김치 양이 딱 적당해야 했다. 열무가 너무 많으면 밥알을 씹는 즐거움이 사라진다. 또 밥이 너무 많으면 선선한 열무의 식감이 덜해진다.


 핵심은 고추장이었다. 고추장이 적으면 멀건 색을 다. 너무 빨개도 문제였다. 그러면 엄마는 재빨리 부엌에 가서 밥을 수북이 퍼 왔다. 따끈한 보리밥이 다시 얹히면 나무 주걱으로 휘휘 섞는다. 그렇게 붉은색의 명도와 채도를 얼추 맞추어 나간다. 모두 숙련된 주부들이라 먹어보지도 않고 색깔로 간을 맞추었다. 신기하게도 고추장 색깔이 적당했을 때에야 비로소 간도 딱 맞고 맛있는 열무비빔밥이 되었다.


 그렇게 비벼진 열무비빔밥을 한 숟가락 가득히 퍼서 입안에 넣는다. 가끔 입안에 미처 못 들어간 열무 가락이 삐죽이 입술에 늘어지기도 한다. 그러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으로 쏙 밀어 넣는다. 이때 입안에 들어간 열무와 밥은 내외하듯 각자 자기 자릴 고수한다. 미끌거리는 밥알은 이리저리 몸통을 뒤틀고 열무는 서걱거리며 날 선 식감을 뽐낸다. 혀는 날쌔게 이 둘을 포획하여 이 사이로 밀어 넣는다. 그리고는 잘게 씹는다.


 이때 동글동글한 보리 밥알이 입안에서 톡톡 터진다. 열무를 씹을 땐 이 사이로 즙이 나오면서 신선한 풀내를 풍겼다. 이 풀내는 도시의 거실 안으로 냄새를 한 껏 잡아들였다. 이 둘을 순하게 감싼 들기름은 집안에다 고소한 향내를 풍겼다.


 밥 먹을 때의 풍경이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모두들 양푼 가장자리에 둥그러니 둘러앉아서 먹었다. 양푼이 둥글었기 때문. 여기에는 인원 제한이 있다. 양푼 지름으로 한정이 된 것이다. 대략 여섯 명 정도가 적정 인원이었다. 하루는  아홉 명이 온 적이 있다. 이때 엄마는 개인 밥공기를 가져와서 한 그릇씩 퍼주었다. 그러자 다들 양푼에서 멀찌기 물러나 앉아서 밥상에 놓고 먹거나 손에 들고 먹었다. 하지만 왠 걸 맛이 없었다. 같은 음식인데도. 어째서 다른 맛이 나는 걸까?(요즘도 철판볶음밥을 공기에 떠먹으면 철판에 두고 먹을 때보다 맛이 없다.)


 다들 양푼에 고개를 숙이고 먹을 때완 다르게 고개를 빳빳이 들고 먹었다. 이때 훨씬 편하게 먹는데도 얼굴에 함박웃음이 없었다. 그저 한 끼의 식사를 때우는 것일 뿐. 그 뒤로는 인원을 엄격히 제한했다. 간혹 고추장이 제대로 안 섞인 밥이 눈에 띈다. 이땐 남의 영역이라도 상관이 없다. 기어코 자기 숟가락을 침범해 들어가서는 남의 자리 앞의 밥을 슥슥 비벼준다. 설사 남이라도 허연 밥을 먹으면 안 되니까. 그 한 숟가락을 먹을 때만큼은 덜 행복할까 봐. 다들 밥을 퍼 올릴 때마다 한 숟가락만큼의 행복을 길어 올리고 있었다. 아무도 '이런 게 바로 행복이야.' 하고 말을 내진 않았지만.


 커다란 양푼에다 대 여섯 명이 숟가락을 담그고 활발히 휘적 여가면서 밥을 먹다니. 그것도 침이 튀도록 수다를 떨어가면서. 요즘 같은 코로나 정국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침이 한 됫박은 섞일 텐데.


 악수조차 눈치 보이는 요즘이다. 아는 사람이 버스 안에서 말을 많이 하다가 어느 할아버지한테 혼났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말을 많이 하면 침이 튀니. 이제 남이랑 포옹도 악수도, 말도 하면 안 되는 세상이 오는 것인가? 그건 로봇의 삶 아닌가! 그렇게 120년 살면 뭐하는지. 아니다. 그런 세상은 오면 안 된다. 빨리 코로나가 해결되어 포옹하고 악수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비위생적이라고 해도 좋다. 여러 명이서 커다란 양푼에다가 석석 열무비빔밥을 비벼 먹던 날들이 눈물 나게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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