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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윤숙 Mar 24. 2021

수사 덕후의 하루

탐정이 꿈이었던 나의 일상

손톱을 깎다가 망설였다.

'아니지, 이렇게 손톱을 바짝 깎으면 안 돼. 조금 남겨놓자. 만약 내가 살인이라도 당하게 된다면 살인자 몸에 최소한의 표식을 남겨놓아야 하잖아?'(살인자가 살인을 저지를 때 해자가 격렬히 방어하면 가해자 몸에  손톱자국이 남아서 덜미를 잡히곤 한다.)


아니, 이 무슨 달콤 살벌한 이야기냐고 할지 모른다. 내 상상은 늘 이렇게 맥락이 없고 끝 간 데가 없다.






남편은 주말마다 오랫동안 반신욕을 한다. 핸드폰으로 영화 한 편을 다 보고 나올 정도다. 돈도 안 드는 데다, 그 시간만큼은 나에게 먹을 걸 달라거나 귀찮게 하지 않으니 내게도 좋다. 다만 너무 오래 안 나오면 슬슬 걱정이 된다. 한번 가봐야 하나?

화장실 문을 빼꼼히 열고는, " 뭐 필요한 거 없어? 음료수나 갖다 줄까?"


이때 남편의 뜨악한 표정을 보라. 친절함과는 담쌓은 전투적 여인에게서 서비스 대리점 여직원 말투라니.

이유가 있다. 고혈압이 있는 남편이 반신욕을 오래 하는 건 위험하다는 걱정에서다. 고혈압 환자가 반신욕 하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한 이야기를 들었다. 일찍 과부가 된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차마 청상과부라고 할 나이는 아니고)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될까 봐서다.


물속에서 사망하게 되면 시신 처리에 용이하게 일부러 물에 담갔다고 오해받기 십상이다. 앉은 자세로 익사하게 되면 더 의심받는다. 무조건 부검부터 해 볼 것이다. 폐 속에 물이 찼나 안 찼나. 익사를 했다면 폐에 물이 차지만, 교살(같은 것으로 목을 졸라 죽이는 것)이나 액살(손으로 목을 졸라 죽이는 것) 후 물에 담갔다면 피의자가 시강 시간 추정에 혼란을 주기 위한 것으로 의심받을 수 있다.


무엇보다 가정 내 사망사건의 경우 신고자, 특히 배우자는 피의 대상 1호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배우자 사망으로도 돌 지경인데, 살인범으로 오해까지 받게 된다면? 이런저런 걱정에 목욕탕 문을 수시로 열어본다. 영문을 모르는 남편은 내가 문을 열 때마다 바람 들어온다고 짜증을 낸다.




음악시간에 아이들이 노래를 작게 부른다. 초등학교 6학년생들은 원래 노래 부르기를 싫어한다. 아예 안 부르는 학생도 있다. 이때 "누가 안 불렀어?"라고 말하는 건 소용이 없다. 어쩔 수 없이 거탐(거짓말 탐지기)을 실시한다.

의심되는 학생 앞에 야무지게 선다.

"당신은 금붕어입니까?"

"네? 그게 무슨 말씀이죠?"

"네, 아니오. 로만 대답하세요."

"아.. 아, 닌데요?"


"그런데 왜 금붕어처럼 입만 벙긋거립니까?"

"의도가 뭡니까?

대체 뭘 숨기고 있죠?

이 사건의 배후가 누굽니까?

어쩔 수 없습니다. 블랙박스를 돌려봐야겠습니다."


잠시 망설인다. 핸드폰부터 압수해야 하나? 이미 증거 자료는 다 삭제했겠지. 포렌식을 맡길까?

cctv가 어디 어디에 붙어 있지?

아참 여기 학교지? 그렇담 중앙 현관 밖에 없겠네...




밤 11시가 넘도록 딸이 안 온다.

전화를 해도 안 받는다.

카톡으로 문자를 보낸다.

'왜 안 와? 어디야?'

곧바로 답이 온다.

'30분 뒤에 들어가.'

'조심해서 들어와.'

'응, 알았어.'

어? 이상하다. 왜 전화를 안 받고 카톡으로만 보내지? 그리고 이상해. 평소 마지막 말엔 답변이 없던가, 성의 없이 'ㅇ ㅇ' 이라고만 하던 애가 웬 일로 문장으로 말하지? 우리 딸이 아닌 것 같은 이 스멜은 뭐지? 분명 납치범에게 붙잡혀 있을 거야. 어쩜. 딸은 이미 사망했는지도 모르지. 핸드폰으로 범인이 대신 답변한 건지도.


수상한 마음에 계속해서 전화를 건다. 스무 번 넘게 울려도 받지 않는다. 점점 초조해진다. 딸이 집에 들어오기까지 이 시나리오는 수차례 각색이 된다.




이쯤 되면 심각한 수사 덕후다.

내 수사 덕후 경력은 어언 50여 년이 되어간다. 어릴 적 '수사반장'이나 형사 시리즈물이 전 국민적으로 인기였다. 특히 수사반장에서 '조형사'를 좋아했다. 그가 예리한 추리로 범인을 잡는 모습을 입을 헤 벌리고 쳐다보았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막장 드라마나 세리 공주 같은 만화물을 좋아할 때 말이다.


그 후로도 법정 드라마 류의 영화나 드라마는 빠짐없이 보는 편이다. 요즘은 픽션보다 논픽션을 본다. 팟캐스트나 유튜브에서 프로파일러가 나오는 프로그램은 거의 다 본다. 보 다보다 나중엔 우리나라 연쇄 살인범의 역사를 줄줄 외운다. 최초의 연쇄살인범, 최초의 프로파일러, 최초의 토막살해범 등등, '최초' 자가 들어간 사건을 두루 알고 있다. 또 프로파일러 별 특성도 알고 있으며, 사건별로 다르게 해석하고 정보를 알려주는 묘미에 빠져 같은 사건도 프로그램별로 다 보고 있다.


이 정도면 아주 깊이 빠져 있다고 볼 수 있다. 나름대로 우리나라 수사 환경이나 법정 형량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까지 갖고 있다. 우리나라 형량이 터무니없이 낮게 책정되어 있다는 생각이다. 범죄 수사 인력도 턱 없이 부족하다. 개인적으론 사설탐정 제도가 시급하다고 생각한다.(내 어릴 적 꿈이 탐정인 적도 있다.)


그나마 우리나라 치안은 전 세계 1등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 얼마 전 수사 덕후에게 기분 좋은 일이 있었다. 글쎄, 이 은혜로운 공간인 이 브런치에 강력계 형사(개인적으로 볼 때 강력계 형사 라야 진짜 형사다.) 작가가 있을 줄이야. 심지어 그 형사분이 내 글에 '좋아요'를 눌러주었다. 너무나도 흥분해서 곧바로 '김준형 작가님'을 구독하고 그분의 글을 그 자리에서 완독 했다. 글마다 댓글도 달고 좋아요도 눌러가면서.


게다가, 심지어, 형사가 마동석처럼 '우락부락형'이 아니라 큰 키에 훈남이라니. 수사도 꼼꼼하고 실력이 엄청난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김형사님 캐릭터를 모델로 한 영화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수사과정이 생생하게 담긴 영상도 있었는데, 내가 가장 감동을 받은 건 어느 가장의 극단적인 소동을 막은 일이다. 옥상에 선 가장 앞에서 김형사님이 협상가로 대 활약한 영상이다. 이 영상에서 눈물이 났다. 대한민국 가장이 진 삶의 짐과 그 비애, 또 그 비애를 '나도 다 안다 나도 가장이다. 하지만 우리 그러지 말자. 부디 끝까지 가자.' 하는 메시지를 전한 김형사님의 진심이 느껴져서다.




요즘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나는 도대체, 왜 수사물에 빠지게 되었나?


짚이는 게 하나 있다.

형사님들이 제 각각 스타일은 다 다르지만 하나로 수렴되는 지점이 있다는 것이 눈에 보인 것이다. 바로 악에 맞서는 용기와 약자를 보호하려는 휴머니즘이다.

즉 '인간애', 그게 없으면 위험하고 남이 알아주지 않는 그 일을, 제 아무리 억만금을 준다 한들 누가 할 수 있을까?


알고보니 나의 수사 덕후는 '인간애에 바치는 경외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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