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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윤숙 Mar 04. 2021

어른이의 그림일기

나는 이렇게 행복(?)하고 단순(?)한 삶을 살고 있다.

전철을 타고 남영역을 지나칠 때였다.

바깥에 옥외 광고로 대형 브로마이드에 라면 사진이 붙어 있다.

여섯 살 정도 되는 남자아이가 엄마에게 묻는다.

"엄마. 여기 라면역이야?"

엄마는 시큰둥하게 "응? 으으ㅡㅇ" 한다.

이 아이 뭘 좀 안다. '남영역'은 발음이 어려우니 '라면역'이라고 한 건지,

아니면 라면이 그려져 있으니 라면역이라고 한 건지는 모르겠다.

아니면 중의적으로 패러디한 건지.

조금 있다가 궁금증이 풀렸다.

용산역에 도착했는데 벽면에 여성 의류 광고 그림이 걸려 있다.

이번에도 아이가 엄마에게 묻는다.

이때 혼자 짐작해 보았다.

"엄마, 여기 옷 사는 역이야?"라고 물을 거라고.

'용산역'도 발음이 어렵다. 그런데 예쁜 여자가 예쁜 옷을 입고 있으니 "옷 사는 역이야?" 하는 것이다.

발음도 용산역과 비슷하고, 옷 사는 곳이라는 중의와 패러디루다가...?

그런데 그 아이는 이렇게 말했다. "엄마 여기 아줌마 역이야?"(?????)

그렇다. 이 아이는 글씨를 아직 모른다.

그냥 그림만 보고 단순히 물어본 거다. 라면이 그려져 있으면 라면역,

아줌마(눈이 높은 아이다. 전지현을 보고 아줌마라니, 하긴 결혼은 했지.) 사진을 보면 아줌마 역.


그것도 모르고 그 아이가 글씨를 읽을 줄 알고, 중의적인 패러디를 한 거라고 보았다.

누구 맘대로 이렇게 복잡하게 해석하나?

그 아이는 장금이였다.

홍시를 먹고는 왜 홍시맛이 났냐니까,

그냥 홍시맛이 나서 홍시맛이 났다고 한 건데 왜냐니??

단순하고 직관적으로 말하면 되는데, 어른들은 왜 복잡하게 말하는지.

단순한 말은 단순한 생각을 만들어낸다.


나도 한번 단순해져 볼까?

예를 들어 나는 두 아이의 엄마고 남편이 있고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글도 쓴다.

그래서 참 행복하다.라고.

마치 초등학교 1학년 아이의 일기장처럼 말이다.

그땐 별 일이 없는 게 큰일이었다. 일기 쓰기를 하면 매일매일 내용이 똑같으니.

쓰면서도 선생님께 혼날까 봐 조마조마했다.

내용을 매일 다르게 써보라는 얘길 들어도, 뭘 또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고.

매일이 무사하던 시절이 그립다.

지금 내 하루하루를 그림일기 쓰듯 하면 어떤 그림이 나올까?

이렇게 쓰면 될듯하다.


           2021년 3월 4일 목요일 맑음.


오늘은 학교에서 수업을 했다.(아이들을 가르쳤다.)

음악시간이었는데 친구들(학생들, 사실은 내 고객들)이

노래를 잘 부르지 않아 심심했다.(상심했다.)

그리고 점심을 맛있게 먹었다.(다이어트로 퍽퍽한 닭가슴살을 먹는데 뭐가 맛있음?)

방과 후(퇴근하고) 집에 가서(집에 간다는 건 또 다른 직장, 즉 집으로 살림하러 간다는 뜻)

세수하고(클렌징만 안 해도 덜 귀찮은데)

저녁밥을 먹었다.(피곤해 죽겠는데도 내 손으로 직접 해서)

그리고 가족들과 텔레비전을 보며 이야길 했다.(일방적으로 아이들의 고민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일기를 쓰고 잠을 잤다.(갱년기 불면증과 싸우며)

참 행복하고(?) 보람찬(?)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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