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달만에 운동장을 걸었다. 신발을 벗고 맨발로 걷다가 흙을 손안에 담아 보았다. 비가 온 지 며칠 지나지 않아서축축하다. 제주도에 있는 흙이 생각났다. 아빠를 묻은 땅의 흙. 비석 밑에 편백 나무상자 안에 있는 아빠. 지구는 둥글고 세상의 모든 흙은 연결돼 있을 것이다.아빠를 덮고 있는 제주도의 흙과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운동장의 흙도.
아빠는 평생 건강에 자신만만해했다. 감기로 앓아누운 적이 없을 정도로. 그런 아빠가 쓰러졌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리고 달려간 나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얼굴의 아빠를 보아야 했다. 한쪽이 일그러진 얼굴을. 왼쪽 다리 한쪽과 왼쪽 팔이 마비되어 버린 아빠는 말할 때도 한쪽 얼굴만 씰룩일 뿐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쯤이었다. 학교에 아빠가 오신 적이 있었다. 그때 반 아이들이 모두 창문에 다닥다닥 붙어서 소릴 질렀다. "와아. 영화배우같이 생겼다."
아빤 당시 인기 최고인 신성일 배우 닮았다는 소릴 종종 듣곤 했는데 아이들이 보기에도 배우느낌이 났나 보다. 그 이후로 아이들은 우리 아빠 얘길 종종 했다. 너희 아빠 너무 잘생기셨더라. 배우 하지 그랬냐는 둥.
그런 아빠 얼굴이 한쪽으로 일그러져 있다. 그 와중에도 뽀얀 피부가 눈에 띄었다. 노인이라기엔 너무 맑다. 그런 피부를 가진 사람이 마비된다는 게 모순처럼 보였다. 마비되거나 뒤틀린 사람은 적어도 피부가 거무죽죽해야 어울릴 듯하다.
아빠는 항상 정답을 비켜가는 사람 같았다. 하필 병 중에서도 제일 성가시고 힘든 반신불수, 그건 예전부터 거론되던 최악의 질병이다. 다른 곳은 멀쩡한데 한쪽이 마비되어 옴짝 달짝할 수 없는 상태. 이 상태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누워 지내는 사람이 많은 까닭이다. 그 병에 걸린 아빠다. 게다가 아빠는 평생 건강한 게 습관이 되어 가만히 누워 지내는 것이 더 힘들었다. 그 후 고관절 골절사고가 일어났고 수술은 했으나 몇 달 못 버티고 돌아가셨다.
처음 병원에 입원하자 아빠는 너무 힘들어하셨다. 이틀 후부턴 섬망증이 시작되었다. 낮엔 멀쩡하다가도 밤만 되면 소릴 지르고 모든 주사기를 뽑았다. 당시 병간호를 하던 내가 잠시 눈을 붙이면 커다란 소리에 눈을 떴다. 그때 침대 시트 위는 온통 빨간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그럴 때마다 간호사들이 아빠에게 구속복을 입히고 다시 주삿바늘을 꼽고, 나는 눈을 붙인 걸 자책하면서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러길 몇 번 반복하던 어느 날이었다. 간호사들이 다 나가고 멍하니 넋을 놓고 있는 나에게 아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히 내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너 때문이다. 너 때문."
"네? 뭐가요?"
"너 때문에 네 엄마랑 결혼한 거야."
아빠가 지금 섬망증이라 이상한 소릴 한다 싶었지만 진중한 말투에 귀를 바짝 기울였다.
"사실 그때 네 엄마가 너를 임신한 걸 알게 된 거야. 그전에 우리 가게에 온 손님이 있었거든. 아주 알아주는 부잣집 사모님이었지. 그런데 우리 가게 옷감을 떼러 와서는 나를 맘에 들어한 거야. 그리곤 자기 딸을 나에게 주고 싶대. 무학여고 학생인데 그때 열여덟살이었어. 게다가 무남독녀 외동딸이니 모든 재산을 내가 갖게 될 거였지. 그런데 그때 네 엄마가 널 임신했다는 걸 알게 되었어. 하지만 나는 책임을 지려고 했다. 그 부잣집 사위자리를 물리치고 말이야."
그 누구에게도 듣지 못한 내용의 말이었다. 아빠가 혼전임신으로 엄마랑 결혼했었구나. 이제야 모든 게 이해되었다.
아빤 평생 나를 고생시키셨다.
줄줄이 태어난 동생들 뒷바라지며 대학을 포기하고 작은 회사 경리로 취직해서 평생 월급을 따박따박 동생들을 위해 쓰도록 만든 거며. 나에겐 '인생'이 없었다. 나보다 공부 못한 친구들도 모두 대학생이 되어 미팅하고 다닐 때 나는 사장님, 부장님, 또 나차럼 사원복 안 입고 예쁜 사복 입고 출근하는 대졸 출신 여직원 커피까지 타다 바쳐야 했다. 게다가 커피 취향은 어쩌면 다들 그렇게 틀린 지. 대졸 여직원은 꼭 커피 하나반 스푼만 넣은 블랙커피를 타야 했다. 하나면 하나고 둘이면 둘이지 하나반은 뭐냔 말이다. 그것도 수저를 깎아서 계량을 해야 해서 늘 핀잔을 들었다. 나이도 나보다 어린 계집이 건방지게. 하면서 속으로만 욕을 하곤 했다. 그렇게 잔심부름 같은 일로 꽉 채우는 하루하루가 늘 불행했다.
하루는 모범직원상을 받은 적이 있다. 내가 모범이라는 말은 아마 누구보다 일찍 출근해서 커피 기호를 기가 막히게 간을 맞춰 낸다는 의미였으리라. 그래서 직원들이 사기가 진작되어 업무에 몰두할 수 있게 해 준 공로 뭐 이런 거였다. 그런데 아빠는 창피하게도 그 모범상 상패를 친척들 앞에까지 싸들고 가서 자랑했다. 다들 뚱한 표정으로 그 상패를 보았다. 법대나 영문과 같은 대학에 들어가 다들 열심히 대학 생활하고 있는 자식들에 비해 뭐가 내세울 게 있다고 그러냐 하는 생각들을 하면서.
아빠는 평생 운이 없었다. 특히 돈이라면 작은 부스러기라도 아빠 곁에 머물면 큰일 나는 듯 달아나곤 했다. 귀가 얇아서 늘 사기꾼들이 들끓었다. 한 번은 땅을 아주 싸게 샀다면서 자랑을 했는데 알고 보니 사기였다. 아빠가 큰소릴 땅땅 치고 조금 있으면 사기로 판명 나고.. 그런 패턴이 하도 반복되다 보니 나도 이골이 났었다. 그런 나도 한 번은 진짜로 믿은 적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골재 품귀 현상이 심할 때였다. 하루는 아빠가 흥분된 목소리로 나에게 전활 걸었다.
그날따라 직장에서 성회롱 비슷한 일을 겪은 터라 사표를 쓸까 고민하던 차였다. 그때 아빠는 귀가 솔깃한 말을 했다.
"너 제일 하고 싶은 게 뭐냐?"
"네? 뭐가요?"
"너 하고 싶은 거 다 시켜줄게. 너 대학 가고 싶지? 너 다시 공부해라. 내가 학원부터 끊어줄까?"
자세히 캐 물으니 아빤 호탕한 목소리로 설명해 주셨다. 지인이 갖고 있는 땅이 엄청 많은데 그중 모래가 많이 있는 강이 있대나. 그 강에서 몰래 채취할 수 있게 해 준다면서 그걸 팔면 떼부자가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땐 내 처지가 워낙 비참해서인지 그 말을 믿었다. 그래서 다음날 사표를 내버렸다. 어렵게 지인 소개로 들어간 회사지만 사장의 그 느끼한 말투와 눈초릴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아빤 돈을 가져다주지 않았다. 아니 갖다 주는 게 아니라 나에게 빚까지 지게 했다. 그 골재 채취를 하기 위해 기계 대여, 인건비등을 썼는데 알고 보니 불법이라면서 주민들이 소송을 건 것이었다.
무를 사재기했다가 무값 대폭락으로 큰 손해를 보기도 했다. 마치 아빠가 손만 댔다 하면 모두 싸늘한 돌덩이로 변하는 것 같았다. 그걸 바라보는 내 기분은 늘 씁쓸했다. 나도 거의 그러니까.
나에게서 언뜻언뜻 느껴지는 아빠의 말투나 몸짓이 있다. 약간 허풍스럽고 빠른 말투나 엉거주춤 한쪽 다릴 더 힘주고 서있는 자세등. 그런 행동이 나올 때마다 흠칫 놀라면서 물리치려고 했다. 난 아빠랑 달라. 아빤 인생을 살아내는 실력이 너무 없어. 나는 다르게 살 거야. 뭐든 꼭꼭 닫고 열거야. 정확히 알기 전엔 나서지 않을 거야. 그리고 무엇보다 다가오는 것들을 재고 따질 거야. 무턱대고 받아주지 않을 거야. 남들이 좋은 말 해도 귀에 담지 않을 거야. 그건 그들이 목적이 있어서거든. 자세히 분석하고 꼼꼼히 따져보고 귀에 담을 거야. 그래야 배신감이 덜하거든. 사기꾼들이 아빠에게 왔다기보다 아빠의 얇은 귀가 문제였잖아. 내 모든 결심을 아빠 앞에서 선포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 선언문을 완성하기도 전에 아빠가 나와 세상 곁을 떠나셨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어떤 기분인지 연습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동생이 죽었을 때처럼 후회하기는 싫었다. 그래서 되도록 아빠한테 잘해드리려고 했다. 내 경제 사정에서 최대한 아빠 병원비, 간병비 등을 지원했다. 그래서 돌아가신 후 '그래 그 정도면 최선을 다한 거야.' 하고 나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런데 나의 고통은 다른 곳으로부터 찾아왔다.
그건 내 모든 것이 '리셋'된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것이 허물어지고 조립 전 레고 형태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때론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내 숨은 온 힘을 다해 뿜어 올려도 공중에서 얼어버리는 물 같았다.
한동안 입안에서 무언가를 넣고 씹는 행위가 귀찮았다. 어쩔 수 없이 주스형태로 된 것만 마셨다.
어린 시절 놀이가 생각난다. 친구랑 즐겨하던 놀이인데 종이인형놀이다. 가게에서 파는 것도 있었지만 친구랑 나는 직접 그린 인형에 옷을 만들어 입혔다. 그런데 그 종이 인형은 플라스틱으로 만든 인형보다 만만하고 다양한 옷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물을 엎지르면 흐물흐물하더니 찢어져 버렸다.
나는 마치 그 종이인형 같았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는 물에 젖은 종이 인형이 되어 있었다. 흐물흐물한 팔을 몸에 간신히 붙이고 타달타달 하루를 살아내고 있었다. 두 다리는 물에 불어서 뜯길 지경이었다.
나는 내 힘으로 열심히 아빠와 다른 인생을 살려고 발버둥 쳐왔다. 그런데 그게 겨우 아빠의 유사품이었나. 아빠가 사라지고 나니 그 마저도 보이지 않는다. 탓할 대상이 없다는 건 지붕 없이 비바람을 맞는 것과 같았다.
나는 얇았던 것이다. 모든 것이. 말하는 것도 걷는 것도 움직이는 것도, 다 아빠의 일부분이 덧대어져 살았다. 그 덧댄 헝겊이 지금 떼어진 것이다. 나는 이제 새로 튼튼한 헝겊을 덧대지 않으면 안 된다. 다시 갈지 않아도 되는 새롭고 튼튼한 헝겊을.
지금도 후회되는 게 하나 있다. 오랜만에 아빠가 큰돈을 벌어오신 날이었나 보다.
아빠가 멋진 모자를 쓰고 나타나서는 나에게 어린이 대공원에 가자고 하셨다. 그때 나는 친구랑 종이인형에 내가 마침 그린 멋진 드레스를 입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아빠가 놀이공원에 가자는 것이다. 그래서 친구랑 놀고 싶어서 가기 싫다고 하니 아빠가 애원하기까지 하시는 것이다. 아빠는 이날을 기다려 왔다고 하면서. 지금 생각하니 참 미안하다. 내가 끝끝내 고집을 피우고 안 가니 아빠가 무척 실망하셨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새로운 나를 조립해 내려고 애를 썼다. 쉽진 않았지만. 그렇게 몇 달이 지난 때였다. 우연히 유튭에서 음악을 듣게 되었다. 라흐마니노프 3번 피아노 협주곡이다. 그 순간 새로운 세상을 접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이런 아름다운 음악을 들을 수가 있었을까 할 만큼. 처음엔 피아니스트가 대단해 보였다. 그러다가 작곡가가 더 대단하게 느껴졌다. 러시아 출신인 라흐마니노프가 고국을 그리워하며 타지에서 쓴 것이다. 그가 힘들게 쓴 이 곡이 내게 역설적으로 위안이 되었다. 피아니스트가 말하길, 이 곡은 아름답고 비장하면서 슬프지 않고 애절한 곡이라 한다.(哀而不悲)
아빠는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다. 그리도 힘든 이 인생을 살도록 말이다. 그리고 아름다운 음악을 들을 수도 있게 하셨다. 라흐마니노프는 1번 피아노 협주곡을 실패해서 한동안 우울증에 깊이 빠졌다가 최면술을 받고 2번, 3번 교향곡을 썼다고 한다. 덕분에 늘 힘들지만 그래도 이렇게 아름다운 음악을 들을 수 있게 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