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발소 그림

내게 어릴 적 이발소 그림은 지금의 명화보다 아름답다

by 허윤숙

아기 때 기억을 더듬다 보면 장면 몇 개가 간신히 떠오른다. 그중 하나는 안방 풍경이다. 그 당시 살던 집 안방에는 그림이 한 장 걸려있었다. 그림의 내용이 어떤 것이었는지 분명하게 기억나진 않는다. 밀레의 〈만종〉이 아니었을까. 한 부부가 저녁놀을 등지고 기도를 하는 그림말이다.


그 그림이 안방 문을 열면 곧바로 보이는 위치에 걸려있었다. 바닥에 누워 지내는 일이 많은 어린아이 특성상 그 그림을 보며 상상의 나래를 폈다. ‘저 부부는 왜 고개를 숙이고 있지?’ ‘깜깜하네.’ ‘둘 다 무슨 잘못을 한 걸까?'


어른이 되어서야 그림의 뜻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 그림은 진짜가 아니었다. 소위 ‘이발소 그림’이라는 건데, 삼류 화가가 명화를 보고 따라 그린 것이다. 그림물감이 조악해서 색감도 흐릿했고, 선도 삐뚤삐뚤했다. 밀레가 보면 울고 싶었으리라.


요즘엔 인쇄기술이 발달했지만 그 당시에는 모든 이발소 그림을 손으로 일일이 그렸다. 그렇게 명화를 보고 따라서 그린 그림을 안방 벽에 걸어두는 집이 많았다. 왜 그런 그림을 이발소 그림이라고 불렀는지는 모르겠다. 이발소 벽에 그런 모조 그림을 많이 붙였나 보다.


당시엔 사진을 보고 베낀 그림도 많았다. 영화관용 대형 간판만 그리는 직업이 따로 있었을 정도다. 그런데 대형으로 그리다 보니 위치 가늠이 안 되었나 보다. 간판에 그린 영화배우 그림은 원래 배우 얼굴과 별로 안 닮았었다. 어떤 그림은 안 닮은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사람을 그려 놓곤 했다. 영화관을 지나다가 친구랑 깔깔거리면서 본 기억이 난다. 사진을 보고 그린 건 명화 보고 그린 것 보다 ‘틀린 그림’ 찾기가 훨씬 쉬웠던 셈이다.


요즘은 조잡한 ‘이발소 그림’이나 ‘전혀 안 닮은 영화배우 그림’이 눈에 띄지 않는다. 가끔 시골에 가서 눈에 띄면 오랜 친구 만난 듯 반갑다. 마치 레트로 풍 영화를 보는 듯한 뭉클함이다. 그 그림은 태생부터 가짜다. 하지만 ‘그냥 가짜’가 아니라 ‘진짜' 가짜다. 이는 마치 하나의 장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가짜' 가짜는 원본을 그대로 프린트해 놓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원본과 완벽히 같아 보이긴 하지만, 냄새나 질감 등이 다를 것이다. 눈을 잠깐 속일 수는 있어도 그럴 리가 없기 때문에 진짜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 작품은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으므로. 그리고 우리나라에 있을 리도 없으므로.


하지만 '진짜' 가짜는 가짜만의 당당함이 있다. 진짜를 완벽하게 흉내 낼 수도, 그럴 필요도 없다. 어차피 다 짜고 치는 판이니까. 가짜는 그 판에서 엄격하고 품위 있는 역할을 해 낸다. 이발소에 걸려 있는 그림은 시선을 맴돌게 하고 B급 정서만의 장르를 창조해내는 것이다. ‘손이 닿을 듯 참 편안하고 따뜻해. 붓 터치가 좀 서툴러 보이긴 하지. 원래 저 그림은 프랑스인가 뭔가 하는 나라에서 그린 거래. 화가 이름이 뭐더라, 그런데 알게 뭐야. 어쨌든 그래도 명색이 명화라잖아.’


그렇게 그 그림들만이 해내는 역할이 있다. 어릴 적 안 방에 붙어있던 가짜 밀레 그림은 내게도 가짜 그림이었을까? 아니다. 나는 그 그림을 보면서 무한한 상상을 했다. 나중에 교회에서 기도할 때 남보다 더 경건한 태도를 취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 부부의 자세가 떠올라서. 사춘기 때는 어스름한 저녁놀을 바라보면서 시를 많이 썼다. 저녁놀을 볼 때마다 밀레의 저녁놀이 떠올랐다.


몇 년 전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 원본 그림을 보게 되었다. 오르셰 전시장이 공사를 하면서 잠깐 우리나라에서 빌려온 것이다. 그때 실제로 본 그 그림은 내게 충격 그 자체였다. 그 그림이 걸려있는 방에 들어서자 감자기 현기증이 나면서 쓰러질 뻔한 것이다. 말로만 듣던 스탕달 증후군 비슷한 걸 겪었다. 명화가 갖는 매력과 위엄에 압도당했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예상치 못한 뭉클함이 밀려왔다. 그동안 그 그림이 일 해온 노고에 대한 경의였다. 몇 백 원짜리 책받침에서부터 연습장 표지에, 쇼핑백에서 그 그림은 맹렬히 일해 왔다. 특히 아주 조금 비슷하게 따라 그린 이발소 그림에서. 수많은 서민들의 가슴을 촉촉이 적신 그 그림. 서민들에게 아주 조금 인문학적인 향기와 예술 애호가라고 느끼게 해 준 그림. 그 그림이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것이었다.


하루 종일 밥벌이해야 하는 서민에게 예술은 사치다. 하지만 감성까지 잃을 수는 없다. 마지막 한 방울의 감성을 잃지 않게 해 준 고마움에 표하는 경의다.


루시드 폴의 〈고등어〉라는 노래가 있다. 오랜 시간 고등어를 저녁 반찬에 올려온 서민들의 애환과 고등어에 대한 감사가 담겨있다.

몇만 원이 넘는다는

서울의 꽃등심보다

맛도 없고 비린지는 몰라도

(중략)

그래도 나는 안다네.

그동안 내가 지켜온

수많은 가족들의 저녁 밥상

(중략)

가난한 그대 날 골라줘서 고마워요.

수고했어요. 오늘 이 하루도

루시드 폴 작사, 작곡 〈고등어〉


이발소 그림은 마치 그동안 서민들의 단백질과 오메가 3을 책임져 온 고등어와 같다. 비록 모조품이라는 딱지가 붙지만 어린아이에게 상상력을 불러일으켰으니. ‘고등어’와 ‘이발소 그림’은 지금도 소중하다. 우리를 지금, 여기로 실어다준 열차니까. 지금은 낡았지만 한 때는 새것이었던 존재니까.


〈콜미 바이 유어 네임〉이라는 영화로 더욱 유명한 책 《그해 여름 손님》에서 아버지는 엘리오한테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젊은 시절의 열병을 과도기적 감정이라고 생각하지. 하지만 그 시절에만 겪을 수 있는 열정은 그것만으로도 귀중한 거란다. 그 열정을 소중하게 생각해라.”


우리는 때로 한 때의 열정을 싸구려 이발소 그림처럼 다룬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아. 어설프기 때문이야. 마치 풋사과처럼.’ 또 ‘젊은 시절은 과도기적 시간이야. 인격이 완성되기 전이니까.’ 혹은 ‘지금 이 전셋집은 대충하고 살자. 조금만 있으면 내 집을 마련해서 잘 꾸미는 거야.’ ‘가족과의 시간을 줄이고 성공을 향해 달리자. 어차피 가족은 늘 함께 있으니까.’


이제 보니 ‘그 모든 것’은 ‘항상’ 중요했다. 마치 이발소 그림이 당시엔 명화 대접을 받았듯이. 나를, 또 내 가족과 함께하는 지금의 시간을 명화처럼 소중히 다루어야겠다. 적어도 지금 나에게는 모두 귀중한 명화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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