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허윤숙 May 21. 2019

공룡이 살아 돌아온다면?

손빨래는 나에게 공룡이다

연일 한파가 계속되고 있다. 이때마다 귀를 쫑긋거리게 만드는 것이 있다. 아파트 관리실에서 들려오는 안내방송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투박한 관리소장님 목소리였는데, 요즘은 절름거리듯 어색한 발음의 컴퓨터 여자가 말한다. 동파로 인해 저층에서 배수구 역류현상이 일어나니 베란다 쪽 세탁기를 돌리지 말라고.  

작년에도 한파가 오면 걱정이었다. 그때마다 빨래를 며칠씩 쌓아두고 날씨가 풀리기만을 기다렸다. 


올해엔 예년보다 한파가 일찍 찾아온 데다 그 시간이 길어지자 베란다에 빨래가 수북하게 쌓여갔다.  

견디다 못해 손빨래에 도전해 보았다. 다행히 내 몸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왼손으로 꼭 붙잡고 오른손으로 옷을 북북 치대는 손기술을. 10대 후반까지는 손빨래를 직접 하고 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노쇠해서인지 아니면 해당 근육들을 오랫동안 쓰지 않아서인지 빨래를 문지르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빨래 겉면만을 슬슬 문지르는 격이었다. 물기를 비틀어 짜는 건 더욱더 힘들었다. 빨래를 사선으로 비틀어 물기를 짜야하는데 너무 힘이 들어서 그냥 옷걸이에 걸쳐 널었다.  

허리는 왜 그렇게 아픈지. 나중에 보니 시간도 1시간이 넘게 걸렸다. 세탁기 사용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다. 동파가 오기 전에는 세탁기 돌리는 일도 큰일처럼 느껴졌다. 


게으름은 마치 무얼 해줘도 만족을 모르는 어리광쟁이 같다. 만약 세탁기를 반납하고 손빨래를 다시 해야 한다면, 그건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다.  

현대사회에서 여성을 힘든 가사노동에서 상당 부분 해방시켜준 1등 공신이 무얼까? 밥솥이나 냉장고, 아님 가스레인지? 뭐니 뭐니 해도 세탁기가 아닐까? 가사 노동 중 체력 소모가 많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이 빨래니까.

지금도 세탁기 돌리는 것이 못 미더운 깔끔한 여자들은 손빨래를 고집하기도 한다. 가끔은 어릴 때 장대에 높다랗게 널어 말렸던 빨래가 생각난다. 


거기서 나는 폭신한 햇볕 냄새, 바삭한 촉감이 그리울 때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빨래를 손으로 직접 해서 장대에 널지는 않겠다. 이는 마치 귀엽고 신기하다고 해서 공룡이 살아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

유치원 무렵의 아이들 중에서 공룡을 싫어하는 걸 본 적이 없다. 이때는 아들 가진 엄마들이 자신의 아이가 천재인 줄 착각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길고 어려운 공룡 이름을 줄줄 외워대니 말이다. 


만약 영화 〈주라기 공원〉에서처럼 실제로 공룡이 살아온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호박 보석 안에 갇힌 모기의 피에서 공룡의 유전자를 되살려내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공룡을 부활시킨다면?  

일단 동물원 규모부터 지금과 달라져야 할 것이다. 또 공룡을 이동시키기 위한 거대한 차량이 필요할 것이다. 현재 있는 이동수단으로는 공룡의 몸집을 감당할 수 없다. 


이때 만약 공룡들이 탈출하기라도 한다면? 초대형 공룡을 포획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주라기 공원의 한 장면인 아수라장이 연출되는 것이다.  

공룡처럼 껄끄러운 게 빨래다. 빨래에선 케케묵은 남녀차별의 향기가 난다. 이번에 손빨래를 하면서 남편에게 같이 하자고 하니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자기는 빨래를 해 본 적이 없단다. 


하긴 친정 아빠가 가끔 부엌에 들어가는 걸 본 적은 있지만 빨래를 하신 적은 없었다.  

손빨래란 것은 얼마나 불평등한 것인지. 세탁기는 다르다. 기계에 대해서는 남자들이 더 잘 아니 세탁기가 고장 나면 대개 남편들이 나선다.

가사 노동의 기계화가 남녀평등에 기여한 셈이다. 해묵은 남녀불평등을 엿볼 때가 있다. 이처럼 한파 때마다 손빨래를 하는 경우다. 과거 여성들이 겪었을 마음의 한파가 새삼스레 와 닿는다. 


생각해 보면 예전에는 아이를 기를 때 헝겊 기저귀를 썼고 겨울에 온수도 나오지 않았는데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참 다행이다. 그리운 과거가 있어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