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허윤숙 May 21. 2019

참 다행이다. 그리운 과거가 있어서

그리고 눈부신 오늘이 있어서


우리는 과거를 그리워한다. 추억이라는 모호한 특질은 모든 기억을 굵은 체로 걸러서 생각하게 한다. 그중에서 나빴던 것은 가장 굵은 체의 구멍 속으로 빠지고 고운 것만 통과하는 것이다. 


그 추억이 우릴 즐겁게도 하지만 때론 현재와 비교하게 만든다. 그 비교가 현실을 힘들어 보이게 하는 착시현상을 일으키는 것이다.  


나는 과거의 추억이 대부분 그립지만 지금이 더 좋다. 지금은 그 과거를 추억할 수 있을 만큼 내가 인생 경력이 많은 사람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그 추억을 만들던 당시의 나는 그 사실을 겪는 것만으로도 허덕이기 일쑤였다. 우리의 일상에서 좋은 일은 아주 잠깐일 뿐이다.  

하루 종일 딱딱한 책상에 앉아 수업을 들어야 했던 학창 시절이나, 직장에 처음 발을 딛고는 모든 것이 낯설고 힘들어서 매일 울던 사회 초년병 시절, 또 연애라는 달콤한 이름하에 일어났던 무수한 불면의 날들, 결혼해서는 남과 하나가 되는 과정에서 겪었던 시행착오들. 


아이를 기를 땐 어땠나? 내 안에서 생명체를 만들어 세상에 내놓는 경험이 신기함에 앞서 두려움뿐이었던 순간들. 이 모든 과정에서 두려움과 불안함이 기쁨을 앞질렀던 게 사실이다.  

그 일들을 지금 되돌아서 보면? 그 괴로움은 굵은 체에 쑤욱 빠져나간다. 아 내가 언제 아이들이 내 곁에 자는 걸 귀찮아했지? 다 큰 아들을 꼭 껴안고 자고 싶지만 아들이 거부한다. 하지만 불과 2, 3년 전만 해도 베개를 들고 와서 내 곁에 잔다고 아이들이 경쟁을 했었지. 


둘 다 데리고 자면 내가 가운데 자야 하는데 그러면 서로 내 곁에 파고들기 경쟁을 하는 통에 내 몸은 쥐포가 되고 만다. 자다가 몇 번씩 잠에서 깰 정도로 몸이 압박당해서. 그래서 한 명만 내 옆에 자라고 하면 뾰로통해지는 아이를 달래느라 애를 먹었다. 


그런 광경은 이제 다시 오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데리고 자고 싶어 사정을 해도 다들 시크하게 자기 방으로 가버린다. 분명 그때는 잠 좀 편하게 자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이제 그 시간을 그리워하다니.  

우리는 항상 과거의 좋은 일만 기억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나와 다른 사람의 삶을 동경하곤 한다. 특히 도시 사람들은 전원생활에 대한 환상이 있다. 겪어보지 않았으니 관념 속에만 존재하는 생활이다. 


하지만 시골에서 자란 사람은 절대 전원생활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냥 시골생활이라고 한다. 그리고 대부분 동경하지 않는다. 그들은 말한다. “아파트에 화단 가꾸면 되지 뭐 하러 텃밭을 가꿔요? 벌레가 얼마나 많이 생기는데요, 그리고 손이 얼마나 많이 가는지 알아요? 그놈의 잡초는 말할 것도 없고요. 잡초를 뽑고 돌아서면 또 자라 있다니까요.”

시골사람들은 건강하지 않으냐고 하니 시골에서 자란 분이 말한다. “새벽부터 죽어라 일만 하는데 건강할 리가 있어요? 노는 사람이 건강하지. 대부분 환갑이 되기 전에 허리가 꼬부라지고 농약 성분이 독해서 질병에 시달려요.” 


듣고 나니 시골이 그렇게 아름답게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래도 분명 과거를 추억하면 감정이 풍부해진다. 몇 년 전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물을 보면서 가슴이 무척 아려왔다. 아마 중년에 접어든 대부분의 사람이 그랬을 것이다. 


여름밤이면 가족끼리 장독대에 누워서 밤하늘의 별을 헤면서 나누던 소박한 대화들, 골목길 담장에 벽돌로 써 놓은 낙서들, 공터에서 날리던 누런 흙먼지의 냄새.

이 모든 것들이 지금은 없어서일까? 모두 눈물 나게 그리울 때가 있다. 과거는 그리워하는 것으로 족해야 하는 걸까?  

참 다행이다. 그런 과거가 있어서. 현재가 힘들 때 견딜 아름다운 추억이 있어서, 또한 다행이다. 현재가 힘들 때 그래도 과거보다는 지금 나아졌다고 생각할 수 있어서. 


과거는 이렇게 여러모로 써먹는다. 눈물 나도록 과거가 그립지만 참 다행이다. 미래의 나에게 선물할 아름다운 과거가 될, 오늘을 또 살아야겠다. 

작가의 이전글 마당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