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대부분 사람들이 기성복을 입는다. 하지만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옷을 맞추어 입는 것이 흔해서 동네마다 의상실이 있었다. 지인 중에도 의상실을 경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친정아버지가 섬유사업을 하시는 바람에 어릴 땐 항상 옷을 맞추어 입었다. 상대적으로 친구들이 입는 싸구려 티셔츠가 그렇게나 멋있어 보였다.
친정아버지가 옷감을 납품하시던 단골 의상실에서 내 옷을 맞추어 준 적이 있다.
아홉 살 무렵이었다. 의상실에서는 예쁜 옷을 맞추어 준다고 하면서 원하는 디자인을 말하라고 했다.
나는 말로 표현하기가 힘이 들어서 그림으로 그리겠다고 했다. 그러자 디자이너 언니가 디자인 의뢰서를 주었다. 그 종이에다 공주풍 드레스를 그렸다.
그런데 나중에 실제로 나온 옷을 보고 크게 실망했다. 나는 분명 백설공주가 사과 한입 베어 먹고 죽을 때 입었던 의상을 그렸다. 일명 뽕 소매(퍼프형 소매)였는데 제작된 소매는 일자 형태였다.
게다가 치마 길이는 바닥까지 내려오고 동그랗게 퍼져야 하는데, 제작이 된 옷은 무릎길이밖에 안 되는 데다 부풀려지지 않고 바닥을 향하는 것이 아닌가?
그 옷을 입고 거울 앞에 서서는 만감이 교차했다. 하지만 차마 맘에 안 든다고 할 수가 없었다. 대신 집에 와서 엉엉 울었다.
내가 심혈을 기울여서 디자인한 공주 드레스가 그저 시녀들이나 입는 평상복으로 태어나다니. 아빠에게 울면서 다시 만들어달라고 했다.
그러자 그 옷감은 이제 없단다. (아빠는 그 당시 옷감 샘플을 직접 연구하고 창작을 하셨는데, 옷감을 끈 같은 것으로 묶거나 손으로 잡아 비틀어 보고는 하셨다. 그러면 구겨진 부분으로 다양한 무늬가 생겼다. 그렇게 만든 옷감으로 딸내미 옷을 지어주신 것이다.)
그 옷감은 비로도(요즘 벨벳이라고 불리는 옷감)라고 불렀는데 빛이 반짝거리는 게 공주가 입는 옷감 같았다.
그때 생각했다. 옷감은 한번 자르면 되돌릴 수가 없다는 것을. 그래서 다음에는 디자이너 언니에게 설명을 잘해야겠다고 결심을 했다.
나중에 설계일을 할 때 도면대로 일을 시키는 것이 고달팠는데, 이와 비슷한 고달픔을 미리 알아버린 셈이다.
그런 나를 할머니가 달래셨다. 유난히 옷 욕심이 많은 나에겐 대체할 것이 있어야 한다고 느끼신 것일까? 예쁜 모자를 떠 주신다는 것이다. 공주가 쓸 법한 모자로, 당시 유행하던 방울이 달린 모자를 말이다. 솜씨가 좋으셨는지 그날로 예쁜 모자를 떠 주셨다.
그 모자를 한동안 쓰고 다녔다. 하지만 그 모자는 그 뒤로 여러 번 죽었다가 부활했다. 방울이 너무 어린애 같다며 할머니에게 투정을 부렸기 때문이다.
그러자 할머니는 그 모자를 금세 해체해버리셨다. 모자 시체(실)와 다른 실을 합쳐서 앞에 단추가 달린 스웨터를 짜주신 적도 있다.
그 스웨터는 한 가지 색으로 되어 있지 않았다. 윗부분은 빨간색, 반절 이하 아랫부분은 노란색이었다.
그땐 무늬를 만드느라 일부러 그런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실이 여러 번 죽었다가 부활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던 셈이다. 옷을 뜨다가 실이 없으면 무슨 실이라도 이어서 짜야했으니까.
요즘은 옷감을 떠 옷을 지어 입거나 뜨개질을 해서 옷을 해 입는 일이 드물다. 대부분 기성복을 사서 입는다.
옷 가격 자체가 많이 싸졌다. '패스트 패션'이라고 해서 빠른 패션 흐름에 따라 쉽게 사고 쉽게 버린다. '단순하게 살기'를 결심하면 너도나도 '옷 버리기'가 일 순위다.
꼬마숙녀 시절, 한 의상실에서 맘에 들지 않는 드레스를 입고 거울에 서던 절망감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 뒤에 할머니가 뚝딱 떠 주시던 모자, 또 그 뒤에 여러 번 변신을 거듭하던 빨간색 실도 떠오른다.
간혹 내가 한 선택을 두고 전전긍긍할 때마다 뜨개실을 떠 올린다. 기성복이나 의상실 옷이 아니라 뜨개옷이라면 얼마든지 풀어서 다시 뜨면 되니까.
가끔 옷감에 가위질 한번 잘못했다고 울고불고할 때가 있다. 그럴만한 인생이 아닌데.
뜨개질도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다. 완성이 될 때까지 여러 번 풀었다가 다시 뜬다.
졸다가 코를 빠뜨릴 수도 있다. 자칫 실수로 안뜨기를 해야 하는데 겉 뜨기를 할 때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 다시 뜨면 되니까.
가끔 인생을 옷을 단 한벌밖에 살 돈이 없는 사람처럼 사는 사람이 있다. 그 돈으로 한벌 사고는 잘못 샀다며 통곡하는 것이다.
아니다. 살아있는 한 얼마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마치 실을 풀어서 다시 뜨개질을 시작하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