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허윤숙 Jun 12. 2019

뜨개옷

인생도 뜨개질처럼.

요즘은 대부분 사람들이 기성을 입는다. 하지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옷을 맞추어 입는 것이 흔해동네마다 의상실이 있었다. 지인 중에도 의상실을 경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친정아버지가 섬유사업을 하시는 바람에 어릴 땐 항상 옷을 맞추어 입었다. 상대적으로 친구들이 입는 싸구려 티셔츠가 그렇게나 멋있어 보였다.


친정아버지가 옷감을 납품하시던 단골 의상실에서 내 옷을 맞추어 준 적이 있다.


아홉 살 무렵이었다. 의상실에서는 예쁜 옷을 맞추어 준다고 하면서 원하는 디자인을 말하라고 했다.


나는 말로 표현하기가 힘이 들어서 그림으로 그리겠다고 했다. 그러자 디자이너 언니가 디자인 의뢰서를 주었다. 그 종이에다 공주풍 드레스를 그렸다.


그런데 나중에 실제로 나온 옷을 보고 크게 실망했다. 나는 분명 백설공주가 사과 한입 베어 먹고 죽을 때 입었던 의상을 그렸다. 일명 뽕 소매(퍼프형 소매)였는데 제작된 소매는 일자 형태였다.


게다가 치마 길이는 바닥까지 내려오고 동그랗게 퍼져야 하는데, 제작이 된 옷은 무릎길이밖에 안 되는 데다 부풀려지지 않고 바닥을 향하는 것이 아닌가?


그 옷을 입고 거울 앞에 서서는 만감이 교차했다. 하지만 차마 맘에 안 든다고 할 수가 없었다. 대신 집에 와서 엉엉 울었다.


내가 심혈을 기울여서 디자인한 공주 드레스가 그저 시녀들이 입는 평상복으로 태어나다니. 아빠에게 울면서 다시 만들어달라고 했다.


그러자 그 옷감은 이제 없단다. (아빠는 그 당시 옷감 샘플을 직접 연구하고 창작을 하셨는데, 옷감을 끈 같은 것으로 묶거나 손으로 잡아 비틀어 보고는 하셨다. 그러면 구겨진 부분으로 다양한 무늬가 생겼다. 그렇게 만든 옷감으로 딸내미 옷을 지어주신 것이다.)


그 옷감은 비로(요즘 벨벳이라고 불리는 옷감)라고 불렀는데 빛이 반짝거리는 공주가 입는 옷감 같았다.


그때 생각했다. 옷감은 한번 자르면 되돌릴 수가 없다는 것을. 그래서 다음에는 디자이너 언니에게 설명을 잘해야겠다고 결심을 했다.


나중에 설계일을 할 때 도면대로 일을 시키는 것이 고달팠는데, 이와 비슷한 고달픔을 미리 알아버린 셈이다.


그런 나를 할머니 달래셨다. 유난히 옷 욕심이 많은 나에겐 대체할 것이 있어야 한다고 느끼신 것일까? 예쁜 모자를 떠 주신다는 것이다. 공주가 쓸 법한 모자로, 당시 유행하던 방울이 달린 모자를 말이다. 솜씨가 좋으셨는지 그날로 예쁜 모자를 떠 주셨다.


그 모자를 한동안 쓰고 다녔다. 하지만 그 모자는 그 뒤로 여러 번 죽었다가 부활했다. 방울이 너무 어린애 같다며 할머니에게 투정을 부렸기 때문이다.


그러자 할머니는 그 모자를 금세 해체해버리셨다. 모자 시체(실)와 다른 실 합쳐서 앞에 단추가 달린 스웨터를 짜주신 적도 있다.


그 스웨터는 한 가지 색으로 되어 있지 않았다. 윗부분은 빨간색, 반절 이하 아랫부분은 노란색이었다.


그땐 무늬를 만드느라 일부러 그런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실이 여러 번 죽었다가 부활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던 셈이다. 옷을 뜨다가 실이 없으면 무슨 실이라도 이어서 짜야했으니까.


요즘은 옷감을 떠 옷을 지어 입거나 뜨개질을 해서 옷을 해 입는 일이 드물다. 대부분 기성복을 사서 입는다.


옷 가격 자체가 많이 싸졌다. '패스트 패션'이라고 해서 빠른 패션 흐름에 따라 쉽게 사고 쉽게 버린다. '단순하게 살기'를 결심하면 너도나도 '옷 버리기'가 일 순위다.


꼬마숙녀 시절, 한 의상실에서 맘에 들지 않는 드레스를 입고 거울에 서던 절망감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 뒤에 할머니가 뚝딱 떠 주시던 모자, 또 그 뒤에 여러 번 변신을 거듭하던 빨간색 실도 떠오른다.


간혹 내가 한 선택을 두고 전전긍긍할 때마다 뜨개실을 떠 올린다. 기성복이나 의상실 옷이 아니라 뜨개옷이라면 얼마든지 풀어서 다시 뜨면 되니까.


가끔 옷감에 가위질 한번 잘못했다고 울고불고할 때가 있다. 그럴만한 인생이 아닌데.


뜨개질도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다. 완성이 될 때까지 여러 번 풀었다가 다시 뜬다.


졸다가 코를 빠뜨릴 수도 있다. 자칫 실수로 안뜨기를 해야 하는데 겉 뜨기를 할 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 다시 뜨면 되니까.


가끔 인생 옷을 단 한벌밖에 살 돈이 사람처럼 사는 사람이 있다. 그 돈으로 한벌 사고는 잘못 샀다며 통곡하는 것이다.


아니다. 살아있는 한 얼마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마치 실을 풀어서 다시 뜨개질을 시작하듯.





매거진의 이전글 ‘인생’이라는 종합 선물세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