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허윤숙 Jun 17. 2019

동생의 죽음이 남긴 것

내가 꼭 그런 세상을 만들게.

"그랬구나. 어쩐지..."

"......"

내가 동생에게 숨차게 말을 내뱉자마자 돌아온 답변이다.


동생은 암이었다. 그것도 가장 끔찍하다는 췌장암. 나는 췌장이 어디 붙어있는지도 몰랐다. 병원에서는 이 암은 전이가 빠르고 현재 동생에게 수술은 불가하다고 했다. 동생이 갑자기 응급실에 실려가서 며칠 동안 검사한 끝에 나온 결과다.


동생은 낌새가 이상한 걸 알아챈 듯했다. 가족들 모두 눈가가 퉁퉁 부어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내 얼굴은 도저히 사람 얼굴 같지 않았다. 미운 말만 골라하던 동생은 내 얼굴을 보자마자,

"얼굴이 왜 그 모양이야?"라고 툭 내뱉었다.


하루는 갑자기 나에게 진추하 노랠 듣고 싶다는 것이다. 홍콩 여배우가 부른 '원 서머 나잇'이라는 노래다. 우리 자매가 어릴 때 영어 가사를 손으로 일일이 써가며 부르던 노래였다. 그 노래는 여주인공이 백혈병으로 죽어갈 때 나온 영화음악이다.


그 노랠 듣고 싶다는 말은 결국 본인도 알고 있다는 말인가?라는 생각에 나라도 용기를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빠는 끝까지 말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 말을 듣고 동생이 충격에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다고.


내가 그랬다.

" 아빠, 삶을 정리할 시간도 줘야죠. 저러다가 혼수상태에 빠지면 더 허무하잖아요. 자기가 죽는지도 모르고 죽어간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우기며 속으로는, 어떻게 말을 꺼낼지 고민했다.

"너 말이야, 암 이래. 그런데 수술도 안된대. 한두 달 있으면 죽는대."


차마 이렇게는 말할 수가 없었다. 대신 "나 할 말이 있는데..."라고 꾸물댔다. 그러자 동생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침착했다. "내 병에 대해서 말하려고?"

"그래. 아빠는 말하지 말라고 하셔. 하지만 나는 네가 그렇게 약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 그러니까 내 말은..."

쉬지 않고 숨차게 내뱉었다.


동생이 말을 끊었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동생이 말했다. "그러니까, 얼마 남았대?" 덤덤히 말했다.

"길어야 두 달 정도. 하지만 내가 알아봤는데 말이야. 얼마든지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어. 인터넷 뒤져봤는데 한 달 밖에 못 산다는 사람도 살아났대. 우리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자. 기도도 해보고, 특효약도 알아보고."


"그래." 동생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배고프지? 우리 칼국수 시켜먹을까? 이 동네 칼국수 배달해주는 데가 있어."


그 와중에 자기 식성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칼국수를 시켜주겠다는 말에 왈칵 눈물이 났다. 진작에 잘해줄 것이지 하면서 반발심도 생겼다. 동생은 내가 그동안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얼굴이 퉁퉁 부어서 다니던 것에 대해 의문이 풀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에게 살이 너무 빠졌다고 오히려 걱정을 하는 것이었다.


동생은 우리 딸을 끔찍이도 이뻐했는데 내가  그때 모유를 먹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긴 젖이 나오지 않아 고생하던 참이었다. 모유가 나오지 않으니 우리 딸은 밤마다 울어댔다. 나는 그때 화가 치밀었다. 이깟일이 대수인가? 한두 끼 굶는다고 죽는 것도 아닌데... 우린 어쨌든 살아갈 수 있으니 말이다.


"지금 칼국수가 문제야? 우선 공기 좋은 데로 옮기자. 일은 무조건 쉬고."

동생은 그 당시 번화한 강남 주택가에 살고 있었는데 공기도 안 좋고 소음도 있었다. 동생은 지금이 제일 중요한 시기라서 당장 일을 놓을 수가 없다고 했다. 내가 벌컥 화를 냈다.

"그렇게 죽도록 일만 하니까 암이 생기지. 너 진짜 죽는다고. 죽는 순간까지 일만 하다 갈 거니? 너무 억울하지 않아?"


고집 센 동생을 설득해서 경기도에 있는 공기 좋은 집으로 옮겼다. 나는 7개월 된 우리 딸을 데리고 그 집에  상주하다시피 했다. 그리고 병원에서 말 한대로 딱 두 달 만에 동생이 세상을 떠났다. 두 달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사이비교주 같은 목사에게 치유 기도받으러 간 적도 있고, 인터넷 보고 한 번에 30만 원씩이나 되는 기치료를 받기도 했다.


그땐 인터넷이 처음 생던 때라 신뢰할 만한 정보가 무언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아이가 잠든 밤이면 컴퓨터에 앉아서 아무 정보나 덥석 물었다. 그렇게 동생과 함께 온갖 치료를 받으러 다녔다.


투병 기간 동안 동생은 날이 갈수록 신경이 날카로워져 갔다. 후각이 유난히 발달하면서 신기한 능력을 보였. 예를 들어 어떤 야채를 먹어도 농약 냄새가 난다며 거부하는 것이다. 유기농 야채만을 취급하는 곳의 야채에서도 농약 냄새가 난다고 했다. 시어머님이 텃밭에서 기른 오이를 택배로 보내주셨는데 그것만은 맛있게 먹었다. 작고 볼품없이 뒤틀어진 오이였다.


무엇보다 부정적인 단어가 들어간 말을 하면 화를 냈다. 예를 들어 누가 연예인이 방송에 나온 것을 보고 흉을 보면 귀를 막았다. 또한 자기 자랑이 섞인 말을 조금이라도 하면 싫어했다. 그 당시 동생이 예민하게 반응하며 싫어했던 것들은 이렇다. 오염된 음식, 자기 자랑, 부정적 언행, 바쁜 것, 가식적인 표정, 울음소리, 찡그린 표정.


반대로 동생이 좋아하던 것들은 이렇다. 진심 어린 미소, 남에 대한 배려, 몸에 좋은 음식. 생명의 불꽃이 사그라져 가던 동생에게 몸이 마지막 반란을 일으킨 걸까?



그렇게 동생을 잃고 나서 늘 죽음을 생각한다. 적어도 삶과 죽음은 한치의 오차 없이 이어지는 게 아니라는 걸. 그 둘은 마치 옷감 두장처럼 덧대어져 있다고. 동생의 죽음은 현재 나에게 맞붙어 있다. 음식을 먹을 때마다 이 건 동생이 살아 있을 땐 없었는데... 하면서 먹이고 싶다. 또 동생이 일만 하다가 죽은 게 아쉽다. 지금 당장 죽는다면 무엇이 후회가 될지 늘 생각한다. 아쉬움이 남지 않도록.


30대 초반까지 일로 밤샘을 밥 먹듯이 하다가 간 동생. 학교 다닐 때도 시험기간엔 공부로 밤새는 걸 대수롭지 않게 한 동생. 하지만 행운의 여신은 동생 편이 아니었다. 주로 대기업을 상대로 하던 이벤트 회사는 일을 해도 이윤이 박했던 모양이다. 수금에 있어서도 별별 일로 트집을 잡힌다고 했다.


대기업의 횡포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그때는 더 심했다. 내 동생은 무엇하러 이 세상에 왔다 갔을까? 그렇게 고생만 하다 갈 거면... 30대 초반까지 살다 간 흔적을 누가 알아줄까?


그리고 동생에게 말해주고 싶다. 죽도록 일만 하다 가는 건 그 시대의 특징이었다고. 하지만 이제 다른 세상이 오고 있다고. 아니 내가 그렇게 만들고야 말 거라고. 달리기 경주는 그만 해도 된다고. 각자가 다 다른 빛깔로 살아도 충분히 행복한 세상이 온다고. 그 세상을 만드는 데 내 동생의 이야기가 조금은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그러고 보면 동생의 죽음은 마냥 헛된 것이 아니다.

작가의 이전글 할머니, 할아버지 패피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