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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일의 썸머 : 사랑의 복잡성을 탐구하다

로맨틱 코미디의 틀을 깨는 '500일의 썸머'의 깊이 있는 서사

by 김형범

마크 웹 감독의 '500일의 썸머'는 처음 보는 이들에게 흔한 로맨틱 코미디로 착각할 수 있는 여지를 줍니다. 영화의 시작 부분에 등장하는 "특별히 너, 제니 벡맨. 나쁜년"이라는 자막은 이 영화가 '찌질한 남자'와 '나쁜 여자'의 이야기일 것이라는 선입견을 심어줍니다. 하지만 이는 관객의 기대를 교묘히 배반하기 위한 장치일 뿐입니다. 이러한 시작은 관객들로 하여금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를 기대하게 만들지만, 영화는 곧 이러한 기대를 뒤엎고 더 깊은 이야기로 관객을 이끌어갑니다.

RB3q8hDrASoDiVJg1VjcMpwyVW-mwZg9fy1bkhckQfv5LPkkbubmHdnBV-tokiW_X24H7TOaNSlwi-WNFhdrYg copy.jpg 500일의 썸머(2009)_포스터

이 영화는 표면적으로는 일반적인 로맨틱 코미디의 요소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매력적인 남녀 주인공, 우연한 만남, 로맨틱한 순간들 등 전형적인 요소들이 모두 존재합니다. 하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이는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닌 개인의 세계관 차이와 성장에 관한 깊이 있는 탐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주인공 톰과 썸머는 사랑과 관계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톰은 운명적인 사랑을 믿는 낭만주의자입니다. 그는 어릴 적 본 영화 '졸업'을 통해 형성된 사랑관을 가지고 있으며, 그 사랑관은 현실과는 동떨어진 이상적인 모습입니다. 반면 썸머는 관계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그녀는 사랑이나 운명을 믿지 않으며, 현재의 순간을 중요시합니다. 이러한 세계관의 차이는 두 사람의 관계 전반에 걸쳐 충돌을 일으키며, 결국 그들의 이별로 이어집니다.

maxresdefault (4).jpg 영화 '졸업'을 함께 보는 톰과 썸머

영화 '졸업'은 '500일의 썸머'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졸업'의 결말 장면은 특히 중요한데, 벤자민과 엘레인이 교회에서 도망쳐 버스에 탑승하는 장면이 긴 롱테이크로 이어집니다. 처음에는 행복해 보이던 두 사람의 표정이 점차 어색해지는 모습은 '500일의 썸머'의 주제와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톰은 이 장면을 이상화된 사랑의 승리로 해석하지만, 썸머는 이를 현실적이고 복잡한 관계의 시작으로 봅니다.

다운로드 (4).jpg 영화 '졸업'(1967)_마지막 장면

이러한 해석의 차이는 두 사람의 관계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톰은 자신과 썸머의 관계가 '졸업'의 주인공들처럼 모든 장애물을 극복하고 해피엔딩을 맞이할 것이라 믿습니다. 그러나 썸머는 그런 낭만적인 환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녀에게 있어 관계란 현실적이고 복잡한 것이며, 반드시 영원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의 차이는 두 사람의 관계가 진전될수록 더욱 뚜렷해지며, 결국 그들의 관계를 어긋나게 만드는 주요 원인이 됩니다.


영화는 예상을 벗어난 전개로 관객들을 놀라게 합니다. 관계에 회의적이었던 썸머가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모습은 톰뿐만 아니라 관객들에게도 충격을 줍니다. 이는 캐릭터의 복잡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톰으로 하여금 "왜 나는 아닐까?"라는 깊은 성찰의 계기를 제공합니다. 이 장면은 사람의 감정과 선택이 얼마나 예측불가능하고 복잡한지를 보여줍니다. 썸머의 변화는 그녀가 단순히 '나쁜 여자'가 아니라, 성장하고 변화하는 복잡한 인물임을 나타냅니다.

30867220110930194409.png 톰은 썸머의 결혼 소식을 듣고 거리를 뛰쳐나온다. 그리고 세상은 무너졌다.

'500일의 썸머'는 사랑과 관계의 복잡성, 개인의 성장과 변화의 중요성을 효과적으로 전달합니다. "왜 내가 아닐까"에 대한 고민은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대신, 이 영화는 그러한 아픔을 딛고 새로운 시작을 하는 용기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톰이 겪는 실연의 아픔과 그 후의 성장 과정은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경험입니다. 영화는 이를 통해 사랑이 항상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더라도, 그 경험 자체가 개인의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영화의 비선형적 구조도 주목할 만합니다. 500일이라는 기간을 시간순서대로 보여주지 않고,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보여주는 방식은 관객들로 하여금 톰과 썸머의 관계를 더욱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합니다. 이는 단순히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흐름에 따라 이야기를 전개함으로써 캐릭터들의 내면을 더 깊이 있게 탐구할 수 있게 합니다.


또한, 영화는 '기대와 현실'의 괴리를 효과적으로 보여줍니다. 특히 톰이 썸머의 파티에 참석하는 장면에서 '기대'와 '현실'을 분할 화면으로 보여주는 연출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이는 우리가 사랑과 관계에 대해 가지는 환상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극명하게 보여주며, 관객들로 하여금 자신의 경험을 돌아보게 만듭니다.


결론적으로, '500일의 썸머'는 평범한 로맨틱 코미디의 틀을 뛰어넘어 깊이 있는 서사를 제공합니다. 이 영화는 관객들에게 자신의 관계와 삶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톰이 열정적인 '여름'(Summer)에서 안정적인 '가을'(Autumn)로 전환하는 모습은, 사랑의 본질과 개인의 성장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합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톰이 새로운 인연 '어텀'(Autumn)을 만나는 것은 단순한 해피엔딩이 아닙니다. 이는 톰이 자신의 경험을 통해 성장하고, 더 성숙한 관계를 맺을 준비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여름'의 열정은 없을지 모르지만, '가을'의 안정감은 더 깊고 의미 있는 관계의 가능성을 암시합니다.


'500일의 썸머'는 단순한 오락거리를 넘어, 우리의 삶과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만드는 작품입니다. 이 영화는 사랑이 항상 아름답고 완벽할 수는 없지만, 그 경험을 통해 우리가 성장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결국, '500일의 썸머'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자아 발견과 성장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는 우리 모두가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보편적인 경험을 아름답고 솔직하게 그려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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