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르트, 이성의 선구자인가?

존재를 나눈 철학, 차별의 기원을 묻다

by 김형범

한 철학자가 있었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하며 근대 철학의 문을 연 사람, 바로 르네 데카르트입니다. 그가 남긴 이 짧은 문장은 수백 년이 지나도 여전히 철학의 교과서 첫 장을 장식합니다. 그런데 이 명제가 단지 ‘생각의 위대함’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존재할 자격이 있는가’라는 무서운 경계선을 그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데카르트는 17세기 유럽의 혼란 속에서 살았습니다. 종교 전쟁, 마녀 사냥, 식민지 개척과 노예 제도까지, 세상은 위태로운 변화 속에 있었습니다. 중세의 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과학과 세계관이 등장하던 바로 그 시점이었죠. 사람들은 혼란을 이성으로 정리하고 싶어 했고, 데카르트는 그 중심에 ‘생각하는 자아’를 놓았습니다. 의심조차 할 수 없는 확실한 진리를 찾겠다는 열망은 “생각하는 인간”만이 존재할 수 있다는 급진적인 결론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철학은 분명 당시에는 놀라운 혁신이었습니다. 외부 세계를 의심하고, 오직 스스로 생각하는 주체를 기준으로 세계를 재구성한다는 것은 중세의 권위 중심 질서에서 벗어나려는 강한 시도였기 때문입니다. 데카르트 이후 인간은 더 이상 신에게 묶인 존재가 아니라, 독립적이고 이성적인 주체로 거듭났습니다. 과학, 수학, 논리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성은 절대적인 기준이 되었고, 그 중심엔 언제나 '생각하는 인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위대한 사유에는 어두운 그림자도 존재합니다. 생각하지 않는 존재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데카르트에게 동물은 감정도 고통도 없는 ‘기계’에 불과했습니다.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더라도 그것은 진짜 아픔이 아닌 단순한 반응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 생각은 이후 실험실에서 동물을 도구처럼 다루는 과학적 태도에 철학적 정당성을 부여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생각할 수 없는 존재들, 이를테면 식물, 동물, 영유아, 정신 장애인, 타 인종에 대한 경시 역시 이런 사고 체계 속에서 은연중에 정당화되었습니다.


동양의 전통적인 생명관과 비교해 보면 이 차이는 더욱 두드러집니다. 동양 철학에서는 감정과 감각이 있는 존재는 모두 생명으로 취급됩니다. 『장자』에서는 나비가 되는 꿈을 꾸는 인간과 인간이 되는 꿈을 꾸는 나비가 서로 다르지 않다고 말하며 인간과 짐승, 현실과 꿈의 경계를 흐리기도 했죠. 불교는 모든 생명에 불성이 있다고 보고, 유교에서도 짐승을 함부로 다루는 것은 인의에 어긋나는 행위로 여겨졌습니다.


결국 데카르트의 철학은 ‘이성’이라는 새로운 잣대를 중심에 놓았지만, 그 기준에서 벗어난 수많은 존재들은 ‘비존재’로 낙인찍히게 되었습니다. 존재의 조건을 ‘생각’ 하나로만 한정한 결과, 인간 내부의 다양성과 인간 바깥의 생명들을 철저히 구획 짓고 배제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데카르트를 단순히 ‘차별의 철학자’로만 보는 것은 온당하지 않습니다. 그는 신의 권위가 아닌 인간의 사유를 통해 진리를 찾고자 했고, 이는 근대 사회와 과학의 기반이 되는 중요한 기여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기준으로 삼은 '이성'이 얼마나 많은 존재를 배제하고, 인간 중심의 위계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는지는 오늘날 우리가 반드시 성찰해야 할 지점입니다.


이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이 명제는 과연 누구를 위한 문장이었을까요? 생각하지 않는 존재는 존재할 자격조차 없는 것일까요? 우리는 동물도 고통을 느끼고, 아이나 병든 이들 역시 그 자체로 존엄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존재의 조건은 더 이상 이성 하나로 환원될 수 없습니다.


데카르트의 철학은 여전히 깊은 통찰을 제공하지만, 그것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오늘의 관점에서 새롭게 조명하는 것, 그 또한 철학을 계승하는 올바른 태도일 것입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죽음을 건너 생명을 지킨 얼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