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의 미소가 만들어낸 심폐소생술 마네킹의 기원
어쩌면 당신은 이 얼굴을 본 적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누워 있는 사람의 얼굴입니다. 눈은 감겼고, 입가엔 이상하리만치 평온한 미소가 머물러 있습니다. 생명이 다한 얼굴이 이토록 고요하고 아름다울 수 있다니, 보는 사람마다 이상한 기분이 듭니다. 어딘가 낯설고도 익숙합니다. 이마의 곡선, 부드러운 입술선, 긴장감 없이 편안하게 감긴 눈꺼풀. 어디선가 봤던 것 같다는 느낌이 들지만,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녀는 실제로 존재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40여 년 전, 프랑스 파리의 센강에서 젊은 여성이 익사한 채 발견됐습니다. 경찰은 그녀의 신원을 알아내지 못했고, 가족도, 친구도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세상 누구도 그녀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지만, 모두가 그녀의 얼굴에 시선을 멈추었습니다.
죽은 이의 얼굴에서 흔히 떠올릴 법한 공포, 고통, 절망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 얼굴은 마치 깊은 꿈에 빠진 듯 평온했습니다. 당시 검시소의 한 직원은 그녀의 얼굴이 너무도 인상 깊었던 나머지, 석고로 안면을 떠 보존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태어난 안면상은 ‘센강의 이름 없는 소녀(L’Inconnue de la Seine)’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됩니다.
이후 그 미소는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갑니다. 그림, 조각, 연극, 시, 소설 속에서 그녀는 죽음을 품은 신비로운 여인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많은 예술가들은 그녀의 얼굴에서 죽음이 아닌 삶을 느꼈다고 말했습니다. 당시에는 유럽 가정집 벽에 이 소녀의 석고상을 걸어두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습니다. 이유를 명확히 설명하긴 어렵지만, 사람들은 이 얼굴에서 위안과 평온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 후 수십 년이 흘러, 1950년대 노르웨이. 의료기기 제작자였던 아스문 레어달은 심폐소생술 교육용 마네킹 제작을 의뢰받게 됩니다. 생명을 살릴 수 있는 기술을 누구나 배워야 한다는 시대적 흐름 속에서, 그는 사람들에게 실제 같은 훈련을 제공할 수 있는 인형을 고민하게 됩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그는 우연히 장인어른의 집에서 오래된 석고 마스크 하나를 발견합니다. 그 얼굴은 어린 시절부터 익숙하게 보아왔지만, 그때서야 깊이 들여다보게 됩니다. 살아 있지도 않은데, 이토록 살아 있는 듯한 미소. 아스문은 직감적으로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을 되살리는 마네킹의 얼굴이 되어야 한다고.
그리하여 물에 빠져 세상을 떠난 이름 모를 소녀는, 다시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기 위한 얼굴로 되살아납니다.
그녀는 그렇게 ‘Resusci Anne’이 되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심폐소생술 마네킹 애니’로 불리게 된 이 얼굴은, 세상 어디에나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군대, 학교, 병원, 안전 교육센터, 그리고 응급처치 교실에 이르기까지.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그녀의 얼굴에서 인공호흡과 가슴압박을 배우고, 실제 위기 상황에서 그 기술로 누군가의 생명을 구하고 있습니다.
죽은 이의 얼굴이 살아 있는 이들을 살리고 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면서도 경이롭습니다. 이제 그녀는 단지 과거의 미스터리한 인물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누군가에게 숨을 불어넣어 주는 존재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