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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에서 신화로

이스라엘, 피해자의 기억이 어떻게 국가 정체성이 되었는가

by 김형범

한 민족이 겪은 고통이 하나의 이야기로 남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사람은 고통을 견디기 위해 그것을 서사화하고, 이야기로 만들면서 자신과 세계를 설명하려고 합니다. 그 이야기에는 눈물과 분노, 그리고 다시는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바람이 담깁니다. 그런데 어떤 이야기는 너무 오래 반복되다 보면, 어느 순간 현실을 설명하는 수단이 아니라 현실을 덮는 구조가 되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는 그런 기억의 구조 위에 세워진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스라엘은 전통적인 의미의 국가들과는 다르게, 특정한 이야기 위에 정체성을 형성한 나라입니다. 유대 민족의 수천 년에 걸친 디아스포라와 박해의 역사, 그리고 20세기 중반의 홀로코스트는 단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존재 이유를 설명하는 중심 서사로 작동해왔습니다. 특히 나치에 의해 조직적으로 학살당한 600만 명의 유대인 희생자는, 전 세계적으로도 가장 강력한 ‘도덕적 기억’이 되었고, 이스라엘은 그 기억을 국가 정체성의 핵심으로 삼아 왔습니다.


문제는 이 기억이 단지 과거를 추모하는 것을 넘어서서, 오늘날의 정치적 행위와 무력 사용까지도 정당화하는 기제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다시는 당하지 않겠다”는 슬로건은 이해할 수 있고, 어느 정도 정당한 역사적 반응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구호가 이란에 대한 선제공격, 팔레스타인에 대한 지속적인 군사적 봉쇄, 가자지구에 대한 무차별적 폭격의 근거가 될 때, 그 기억은 더 이상 순수한 추모의 언어가 아니라, 현실의 폭력을 감추는 서사로 전락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스스로를 여전히 피해자의 위치에 둡니다. 이는 국제무대에서도 강력하게 작동하는 프레임입니다. 이스라엘을 비판하면 종종 “반유대주의”라는 말이 따라붙고, 홀로코스트의 고통을 부정하려는 시도라는 프레임이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는 것과 유대인을 향한 혐오나 부정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정치적 권력에 대한 비판을 특정 종교나 민족 전체에 대한 혐오로 둔갑시키는 프레임은, 사실상 비판 자체를 무력화하기 위한 수단에 가깝습니다.


특히 팔레스타인 문제를 보면 이 구조는 더욱 선명해집니다. 팔레스타인은 국가로서 인정받지 못한 채, 국경을 마음대로 넘을 수 없고, 전기와 식수조차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는 현실에 살고 있습니다. 매번 반복되는 군사 작전 속에서 민간인들이 희생되지만, 그것은 “자위권 행사”라는 말로 정리됩니다. 이러한 말들은 이스라엘이 피해자의 이야기로부터 획득한 정당성에 기반해 있습니다. 이 정당성은 시간이 지나면서 국제사회에서 일종의 면책 특권처럼 작용하게 되었고, 결국 “피해의 기억이 더 이상 타인의 고통을 볼 수 없게 만드는 구조”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기억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기억이 계속해서 다른 사람의 고통을 가리고, 다른 이야기를 말할 수 없게 만든다면, 그것은 더 이상 기억이 아니라 신화가 됩니다. 신화는 반복되면서 스스로를 강화하고, 반론을 허용하지 않으며, 현실을 설명하지 않고 오히려 현실을 왜곡합니다. 이스라엘이 과거의 피해자였던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사실이 오늘날의 모든 행위에 대한 도덕적 면죄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진정한 기억이란, 고통을 반복하지 않기 위한 윤리적 기반이어야 합니다. 그것은 누군가를 다시는 죽게 하지 않겠다는 약속이지, 내가 죽지 않기 위해 누군가를 먼저 죽일 수 있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고통의 기억은 국가 정체성을 구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정체성이 타인의 삶을 억압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게 될 때, 우리는 반드시 그 이야기의 구조를 되묻고 해체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고통은 다시 사람을 살리는 이야기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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