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운 여름이 만든 뜻밖의 변화
서울 도심 한복판, 그것도 아파트 단지 옆에서 바나나가 열린 풍경을 본 적이 있는가? 올해 여름, 서울 노원구에서 한 도시농부가 심어놓은 바나나 나무에서 노랗고 탐스러운 열매가 주렁주렁 열렸다. 이 바나나는 수입산 품종을 특별히 개량한 것도 아니다. 그저 한겨울 동안 비닐하우스 안에서 버티다가 4월 말쯤 노지에 옮겨졌을 뿐인데, 한여름의 서울 기후가 동남아시아의 그것을 닮아가면서 기어코 열매를 맺었다.
이 바나나는 아직 상업적으로 재배되거나 유통되는 것은 아니다. 단 한 그루에서 열린 열매일 뿐이다. 하지만 올여름 유난히도 뜨거웠던 서울의 날씨와 겹쳐 보니, “머지않은 미래에는 열대과일을 국산으로 먹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기후위기는 이제 더 이상 먼 이야기만은 아니다. 찌는 듯한 폭염과 잦아진 열대야, 그리고 한 번 쏟아지면 도시를 삼킬 듯한 극한 폭우 속에서 ‘열대과일 서울산’이라는 말이 낯설지만은 않게 들린다. 레드향과 천혜향 같은 아열대 과일이 제주를 넘어 남부지방까지 올라온 지도 꽤 됐다. 앞으로는 애플망고, 바나나처럼 동남아시아를 상징하던 과일들이 국내산 딱지를 붙이고 식탁에 오를지도 모른다.
한편으론 이런 변화가 신기하면서도, 마음 한켠이 무겁다. 우리가 알던 사계절의 리듬은 이미 깨져가고 있다. 올여름을 겪으며 “서울이 이렇게 덥던 곳이었나?” 하고 놀라는 사람들이 많았다. 자연은 분명 우리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다.
바나나 한 송이가 전하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기후위기는 이제 피부로 느끼는 현실이 되었고, 우리의 식탁과 도시 풍경을 서서히 바꿀 것이다. 머지않은 미래, 아이들은 서울산 바나나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겠지만 지금의 우리는 이 풍경을 ‘기적’이라기보다 ‘경고’로 읽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