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기억이 세대의 기준이 될 수 있을까
어릴 적 기억 속 한 장면이 지금도 또렷하게 남아 있습니다. 청계천 고가도로 아래, 당시에는 '이류극장'이라 불리던 작은 영화관에 들어갔던 날이었습니다. 바닥은 들쭉날쭉했고, 의자는 삐걱거리며 기대기도 어려웠지만, 그 안에서 마주한 세계는 그 무엇보다도 생생했습니다. 스크린에는 커다란 로봇이 등장했고, 태권도로 악당을 쓰러뜨리며 박진감 넘치는 장면을 쏟아냈습니다. 그것이 바로 ‘태권 브이’였습니다. 사람들은 환호했고, 어린 저는 가슴이 쿵쾅거릴 만큼 흥분했고, 그 순간은 제 안에 오랫동안 감정의 뿌리처럼 남았습니다.
당시만 해도 태권 브이는 단순한 애니메이션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멋진 영웅이 있다는 자부심, 일본 히어로들에 견줄 수 있는 국산 캐릭터라는 자긍심이 그 안에 깃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였는지, 그 기억은 세월이 지나도 쉽게 희미해지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지금까지도 제 안 어딘가에는 그때의 감정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얼마 전, 광복 80주년 전야제 행사에서 태권 브이가 국회의사당 돔을 열고 출격하는 장면이 연출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반가웠습니다. 잊고 지냈던 어린 시절의 감정이 되살아나는 듯한 기분이 들었고, 한동안 그 장면을 머릿속에 그려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곧 그 감정은 다른 형태로 바뀌었습니다. 왠지 모를 낯섦, 그리고 서서히 올라오는 불편함이 있었습니다. 반가움이 오래가지 못한 이유를 곱씹다 보니, 그 기획이 가진 구조 자체에 질문이 생겼습니다.
이번 기획의 중심에 있는 인물은 탁현민이었습니다. 문재인 정부 시절 뛰어난 문화 감각과 상징 연출로 여러 국가 행사를 기획해온 인물로, 저 역시 그가 만든 장면들에서 감탄을 느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이 다시 등장했을 때, 기대감도 없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꺼낸 상징이 태권 브이였다는 사실은, 처음에는 반가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묘한 감정을 남겼습니다.
태권 브이는 1976년에 만들어진 한국 최초의 국산 로봇 애니메이션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일본 애니메이션 ‘마징가 Z’의 영향이 짙게 배어 있습니다. 외형적인 디자인부터 조종 방식, 이야기 전개 구조까지 많은 부분에서 유사성이 발견됩니다. 당시에는 일본 문화 콘텐츠 수입이 통제되어 있었고, 창작 환경 자체가 열악했기에 이런 영향은 불가피한 면도 있었겠지만, 그 사실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감동으로 받아들여져야 하느냐는 질문은 별개의 차원입니다.
광복절은 단지 과거를 기념하는 날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날을 통해 지금의 우리가 어떤 문화 감각을 갖고 있는지, 어떤 상징을 공유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되돌아봐야 합니다. 그런데 과거 일본 문화의 궤적이 선명한 캐릭터가, 광복절이라는 상징적인 무대에서 다시 출현한다면, 과연 그것이 지금 이 시대에 맞는 선택일까요. 물론 당시에 태권 브이는 자부심의 산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기억은 '그 시절의 감정'이어야 합니다. 지금은 다릅니다. 시대도, 감정도, 우리가 가진 문화적 자신감도 달라졌습니다.
이 기획이 불편했던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단지 과거의 감정을 불러오는 수준을 넘어서, 지금의 대중이 그 감정을 함께 느낄 거라 가정했다는 데에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감동을 다시 ‘사용’하려 한 것이지요. 그리고 그 감동은, 그 시절에 그것을 느꼈던 세대의 것입니다. 지금의 세대는 그 감정을 알지 못합니다. 아니, 알 필요도 없습니다. 추억은 개인의 것이지, 세대 전체를 관통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번 기획은, 감정이 공감으로 전환되지 못한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감정은 때로는 구조가 되고, 구조는 어느 순간 권력의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나도 그 시대를 통과한 사람이기에, 이 감정을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해하는 것과 그것을 반복하려는 시도는 다릅니다. 감동은 공유될 수 있지만, 감정은 시대와 맥락을 통해서만 진짜 공감으로 전환됩니다. 감정은 살아 있는 것이고, 살아 있는 감정은 시대와 함께 움직여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그 감정의 유통기한에 대해 솔직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나의 감동이 누군가에게는 낡은 신화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신화를 끌어다 쓰는 방식이 공감을 얻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 감정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언어인지 아닌지를 묻는 일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이 감정 구조의 기원과 그 감정이 어떻게 지금 세대의 감성과 충돌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려 합니다. 왜 우리는 여전히 같은 감정을 되풀이하려 하고, 새로운 감정은 어디에서 거부당하고 있는지, 그 질문에서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감동은 감정에서 태어나지만, 감정은 시대의 언어를 통해 다시 살아나야 진짜가 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