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자지라, 중동에 자유를 들여오다

왕의 취미가 만든 언론혁명

by 김형범

중동에서 언론의 자유라는 말은 오랜 세월 동안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렸습니다. 권위주의 정권과 왕정이 주를 이루는 지역에서, 기자들이 정권을 비판한다는 건 곧 목숨을 내놓는 일과도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996년, 세상이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작은 변화가 시작됐습니다. 놀랍게도 그 시작점은 왕실이었습니다. 한 왕의 ‘취미’처럼 보였던 선택이, 언론사에 한 획을 긋는 결과를 만들어냈습니다.


1990년대 초, 영국의 BBC는 아랍어 위성 방송을 시작하려 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 자본과 손잡고 'BBC 아랍어 방송'을 개국했지만, 이 실험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BBC 특유의 편집 독립성과 보도 자유는 사우디 왕가의 입장과 충돌했고, 왕실 비리를 다룬 보도가 나오자마자 방송은 폐지됐습니다. 단 2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언론 자유와 중동 자본은 결국 공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장면을 지켜본 또 다른 왕이 있었습니다. 바로 카타르의 하마드 빈 칼리파 알타니 국왕이었습니다. 그는 사우디와 달랐습니다. 언론의 힘을 정치적 도구로만 보지 않았고, BBC가 시도했던 편집 독립의 가치를 흥미롭게 여겼습니다. 그는 BBC에서 해고된 인력과 장비를 그대로 인수했고, 단 하나의 조건만 내걸었습니다. "카타르 왕실만 건드리지 마라." 나머지는 자유롭게 하라는 뜻이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방송국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알자지라’입니다. 1996년 11월 1일, 카타르 도하에서 첫 방송을 시작한 알자지라는, 하루 6시간 방송에서 시작해 단 몇 년 만에 24시간 국제 뉴스 채널로 성장했습니다. 놀랍게도 이 방송은 아랍 세계의 터부였던 사우디 왕가의 부패, 이집트 정권의 억압,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까지 거침없이 다뤘습니다. ‘왕실의 취미’로 시작된 방송이 오히려 권력을 향해 칼날을 세운 것이죠.


물론 알자지라는 수많은 논란에 휘말렸습니다.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의견까지 다루며 일부 국가로부터 테러 옹호 채널이라는 비난도 받았고, 보도를 이유로 몇몇 국가는 알자지라 방송을 금지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채널은 시청자들로부터 신뢰를 얻었고, ‘알자지라 효과’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세계 여론에 영향을 미치는 매체가 되었습니다.


알자지라의 출범과 성장은 한 왕이 보여준 독특한 선택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는 언론을 통제의 수단이 아닌 실험의 장으로 보았고, 중동 사회에 없던 새로운 목소리를 허용했습니다. 물론 그 자유는 절대적이지 않았고, 아직도 카타르 왕실은 건드릴 수 없는 영역으로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제한된 자유가 만들어낸 파장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언론의 자유가 전통적인 권위와 어떻게 충돌하고 또 공존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로 남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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