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반복해서 돌아가는 하나의 근본 주제
영화제는 언제나 뜨거운 논쟁의 현장이 됩니다. 올해 베네치아영화제 역시 그랬습니다. 심사위원장을 맡은 알렉산더 페인은 영화제 내내 황금사자상 유력 후보로 꼽히던 두 작품, 박찬욱의 「어쩔수가없다」와 힌드 라잡의 가자지구 비극을 다룬 「힌드 라잡의 목소리」를 외면했습니다. 대신 가족 드라마인 짐 자무시의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를 선택했습니다. 예상과 다른 결과에 많은 이들이 실망과 분노를 동시에 드러냈습니다. 어떤 이들은 정치적 목소리를 회피했다고 말했고, 또 다른 이들은 오히려 예술적 완성도를 지켜낸 선택이라 평가했습니다.
2004년 칸영화제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쿠엔틴 타란티노는 예술적 성취가 돋보였던 「올드보이」 대신 정치적 메시지가 강한 다큐멘터리 「화씨 911」을 황금종려상으로 선택했지요. 그때도 “예술을 정치에 희생시켰다”는 비난이 따라붙었습니다. 이렇게 영화제는 늘 정치와 예술이라는 두 갈래 길 앞에서 흔들리고, 심사위원장은 어느 쪽을 택하든 욕을 피할 수 없는 운명에 놓이곤 합니다.
그러나 이런 논쟁을 조금 더 깊게 들여다보면, 사실은 다른 이야기를 발견하게 됩니다. 정치냐 예술이냐는 갈등은 겉으로 보이는 대립일 뿐, 두 선택 모두 결국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정치적 메시지를 강하게 드러내는 영화는 인간이 제도와 권력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고통받는지를 보여줍니다. 반대로 예술적 형식과 감각을 우선시하는 영화는 인간의 내면, 감정, 상상력 같은 더 보편적인 차원을 탐구합니다. 결국 양쪽 모두 인간을 향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런 점은 소설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은 범죄와 형벌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이야기하지만, 더 깊이 들어가면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의 죄책감과 구원, 그리고 인간이 도덕적 선택 앞에서 얼마나 흔들릴 수 있는지를 그려냅니다. 사회학적 주제와 인문학적 내면 탐구가 동시에 얽혀 있는 것이지요. 한국 문학의 예를 들면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있습니다. 겉으로는 단순히 채식을 선택한 여성을 둘러싼 가족의 갈등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억압된 욕망과 자유를 향한 몸부림을 다루며 인간 존재의 본질을 질문합니다. 사회와 개인을 나누어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소설 역시 정치적 맥락과 예술적 탐구를 함께 안고 있습니다.
노랫말도 마찬가지입니다. 밥 딜런의 〈Blowin’ in the Wind〉는 반전과 평화를 외치는 강력한 정치적 목소리를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노랫말이 궁극적으로 묻는 것은 단순히 정치적 구호가 아니라 “인간은 언제쯤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라는 본질적인 물음입니다. 정치적 메시지가 인간의 삶에 대한 근원적 탐구로 이어지는 것이지요. 반대로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는 정치적 의미와는 전혀 상관없는 노래처럼 들리지만, 누구나 겪는 나이듦과 시간의 흐름 앞에서 인간이 느끼는 상실과 덧없음을 그려냅니다. 정치적 노래와 비정치적 노래가 전혀 다른 길을 걷는 것 같지만, 결국 만나는 지점은 인간의 보편적 경험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영화제가 반복해서 겪는 논란을 통해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정치냐 예술이냐의 선택은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선택들이 결국 같은 지점, 곧 인간을 향해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라는 무궁무진한 소재이자 주제는 이야기를 멈추지 않게 만드는 힘이고, 그것이야말로 이야기가 사라지지 않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이야기는 시대마다 다른 얼굴을 하고 나타나지만, 그 속에 흐르는 물줄기는 언제나 같습니다. 인간을 향한 끝없는 물음, 그리고 그 물음에 답하려는 우리의 노력이 이야기를 이어가게 합니다.
정치와 예술의 논쟁이 계속 될 수 있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