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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에 한번, 사막에 나타난 9일간의 유토피아

현실을 지우고 자유를 짓는, 네바다 사막의 기적 같은 도시 이야기

by 김형범

혹독한 미국 네바다 사막, 건조한 모래 평원 위에 매년 9일 동안만 존재했다가 마법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특별한 도시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이 도시의 이름은 ‘블랙 록 시티(Black Rock City)’이며, 바로 우리가 ‘버닝맨(Burning Man)’ 축제라고 부르는 거대한 사회 실험의 무대입니다. 지난 2023년 여름, 이곳에 예기치 않은 폭우가 쏟아져 축제 참가자 수만 명이 진흙 속에 고립되면서 전 세계적인 뉴스로 보도된 바 있는데, 이처럼 극한 환경에서 펼쳐지는 버닝맨은 단순한 예술 축제를 넘어선 하나의 철학적 프로젝트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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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특별한 도시를 움직이는 동력은 우리가 사는 세상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블랙 록 시티에서는 돈이나 시장 경제의 원리가 통하지 않습니다. 대신, 이곳은 ‘10대 원칙’이라는 독특한 철학적 약속을 따르며, 그중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탈상품화(Decommodification)’와 ‘선물 주기(Gifting)’ 원칙입니다. 즉, 이곳에서는 상업적 거래, 광고, 스폰서십이 명시적으로 금지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현금을 주고 물건을 사고파는 대신, 자신의 재능, 시간, 또는 예술 작품을 다른 이들에게 대가 없이 나누어주는 ‘선물 경제’를 실천합니다. 이 약속은 참가자들이 일상적인 소비 규범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물질적 소유가 아닌 순수한 ‘경험’과 내면의 ‘자기표현’에 집중하도록 이끌기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비상업적 유토피아가 사막 한가운데서 가능하려면, 놀랍도록 엄격한 조건이 따라붙습니다. 바로 ‘급진적 자립(Radical Self-reliance)’이라는 원칙인데, 이곳에서는 물, 식량, 숙소, 심지어 의료 서비스까지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개인 스스로 책임지고 준비해야 합니다. 시장이 제공하는 어떤 편의 시설도 없기에, 참가자들은 극한 환경 속에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독립적인 역량을 갖추어야만 이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강한 자립심은 곧 ‘급진적 자기표현(Radical Self-expression)’으로 이어집니다. 사회적 제약이나 외부의 시선에 얽매이지 않고 가장 자유로운 모습으로 창조적인 예술을 선보이는 행위 자체가, 공동체에 기여하는 가장 값진 ‘선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 도시의 존재를 완성하고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가장 엄격한 약속은 바로 ‘흔적 남기지 않기(Leaving No Trace, LNT)’ 원칙입니다. 버닝맨의 공동 창립자 래리 하비가 이 원칙을 제정했을 때, 이는 축제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윤리로 확립되었습니다. 축제가 끝나면, 블랙 록 시티는 건설되기 이전의 사막 상태로 완벽하게 되돌려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 참가자들은 ‘MOOP(Matter Out of Place)’, 즉 사막에 원래 없었던 모든 물질을 제거해야 합니다. 이는 일반적인 쓰레기는 물론이고, 텐트 말뚝 같은 건축 잔해, 심지어 설거지나 샤워로 발생한 물에 포함된 아주 미세한 입자들까지도 해당됩니다. 참가자들은 자신이 만든 모든 쓰레기를 반드시 집으로 가져가야 하며, 유기 폐기물 처리를 위해 퇴비화 장치를 사용하는 등 최고 수준의 환경 책임을 요구받습니다. 축제가 끝난 후에는 복원팀이 정밀 청소 작업을 벌이고, ‘MOOP 맵’을 만들어 환경 규정 준수 여부를 투명하게 공개하며, 규정을 지키지 못한 캠프는 다음 행사 참여가 어려울 정도로 엄격하게 관리됩니다. 이 놀라운 환경 책임이야말로 블랙 록 시티가 매년 정부의 허가를 받아 이 사막에 재림할 수 있는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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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적으로 버닝맨이라는 이 특별한 실험은 우리 현대 사회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돈이 통하지 않는 곳에서 과연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는가, 그리고 우리가 만든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2023년의 폭우 사태는 아무리 자립적인 공동체일지라도 기후 변화와 같은 전 지구적 문제로부터는 자유로울 수 없다는 취약성을 명확히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축제는 무조건적인 나눔이라는 가치와 완벽한 환경 복원이라는 압도적인 윤리적 기준이 현실에서 작동할 수 있음을 증명합니다. 버닝맨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이 문화가 사막이라는 고립된 공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더 넓은 세상으로 확장되어야 한다는 의지에 담겨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도 소비 대신 공헌을, 그리고 무분별한 흔적 대신 급진적인 책임감을 선택할 수 있다는 희망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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