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과학자의 두개의 얼굴
20세기 초, 세상은 심각한 식량난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인구는 빠르게 늘어나는 반면, 농작물을 풍족하게 키울 비료는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대부분의 질소 비료는 칠레의 초석 광산에 의존했는데, 그 자원은 한정되어 있었습니다. 과학자들은 어떻게든 공기 중의 질소를 활용하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바로 이때, 독일의 한 과학자가 인류를 구원할 기적을 만들어냈습니다. 그의 이름은 프리츠 하버, 그는 공기 중의 질소를 포착하여 인공 비료의 핵심인 암모니아를 합성하는 하버-보쉬 공정을 개발했습니다. 이 기술은 전 세계 농업 생산량을 비약적으로 증가시켰고, 인류는 비로소 굶주림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공기로 빵을 만든 사람'이라 칭송했고, 그는 이 공로로 1918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습니다. 그의 발명은 수많은 생명을 살린 위대한 업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버가 노벨상을 수상한 그해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해이기도 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인류를 구원한 천재는 바로 그 전쟁에서 끔찍한 무기를 개발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그는 독일군을 위해 염소 가스 같은 독가스를 만들고, 직접 전장에서 사용을 주도했습니다. 평화의 상징인 노벨상과 전쟁의 상징인 독가스, 이 상반된 두 단어는 한 사람의 이름 아래에서 공존했습니다. 그는 '화학 무기의 아버지'라는 오명을 얻었으며, 그의 독가스는 수많은 군인과 민간인을 고통스럽게 죽음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그의 과학이 인류에게 구원과 파멸을 동시에 선사한 것입니다.
더욱 기묘한 비극은 그의 인생 여정과 얽혀 있습니다. 1868년 당시 독일 제국에 속했던 브레슬라우에서 태어난 하버는 유대인이었습니다. 명석한 두뇌를 가진 그는 학업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화학 연구에 매진하며 승승장구했습니다. 독일에서 유대인으로서의 사회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종교를 개종하고 프로이센 시민권을 얻을 만큼 독일 사회에 완벽하게 동화되려 노력했습니다. 그는 진정한 애국자로서 조국 독일을 위해 자신의 모든 재능을 바치고자 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자신의 모든 연구를 전쟁에 쏟아부었고, 그 결과가 바로 독가스 개발이었습니다. 이는 그와 그의 가족에게도 비극적인 그림자를 드리웠습니다. 독가스 개발에 반대했던 아내 클라라 임머바르는 고통스러운 갈등 끝에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하버는 조국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심을 보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배신한 것은 바로 그토록 사랑했던 조국이었습니다. 1933년 나치 정권이 집권하면서 유대인 탄압이 시작되었고, 그는 자신이 설립하고 이끌던 카이저 빌헬름 물리화학 연구소 소장 자리에서 해고당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조국에 바쳤던 헌신과 업적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을 잃어야 했습니다. 결국 그는 나치 독일을 떠나 스위스와 영국 등을 떠돌다 1934년 병으로 외로운 최후를 맞았습니다. 더욱 끔찍한 것은 그가 만든 독가스의 후속 물질에서 비롯된 비극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인이었지만 나치 정권의 박해를 피해 조국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개발한 시안화수소 기반의 살충제는 훗날 나치에 의해 수백만 유대인을 학살하는 가스실의 독가스로 변질되었습니다. 인류를 굶주림에서 구한 위대한 과학 기술이 인류를 학살하는 데 사용된 것입니다. 한 과학자의 두 얼굴이 인류 역사에 드리운 가장 극적인 명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과학은 그 자체로 선하거나 악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의도와 시대의 흐름에 따라 구원의 빛이 될 수도, 파멸의 그림자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프리츠 하버의 이야기는 극명하게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