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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잃어가는 기록, 윌리엄 어터몰렌

치매 진단 후 5년, 한 화가가 붓으로 그린 기억과의 처절한 투쟁

by 김형범

만약 당신의 기억이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사라진다는 것을 인지한다면 어떤 기분일까요. 자신의 이름을 잊고, 사랑하는 이의 얼굴조차 알아보지 못하게 되는 병 앞에서, 한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처절한 저항은 무엇일까요. 여기, 자신의 정체성이 붕괴되는 과정을 붓으로 기록한 화가가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윌리엄 어터몰렌(William Utermohlen, 1933~2007). 그의 이야기는 단순한 예술가의 생애를 넘어, 인간의 존엄과 기억의 소중함에 대한 깊은 울림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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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나 영국 런던에서 활동했던 어터몰렌은 생전 프랜시스 베이컨이나 독일 표현주의의 영향을 받은 강렬한 구상 회화를 주로 그렸습니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대상의 감정과 개성을 뚜렷하게 포착하며 인정받았지만, 그의 삶은 1995년 62세의 나이에 알츠하이머병 진단을 받으면서 예상치 못한 시련에 직면하게 됩니다. 병마는 그의 기억뿐 아니라 그를 예술가로 존재하게 했던 인지 기능, 즉 형태를 인지하고 재구성하며 색채를 조화시키는 능력을 잠식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어터몰렌은 절망 대신, 자신의 존재를 붙잡아 두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붓을 들었습니다. 그는 알츠하이머라는 병을 이해하고, 변화하는 자신을 기록하려는 의지로 2000년경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될 때까지 약 5년간 자화상을 집중적으로 그렸습니다.


그의 자화상 연작은 뇌 속에서 벌어지는 소리 없는 전쟁의 시각적 연대기가 되었습니다. 진단 직후의 자화상은 여전히 뚜렷한 개성과 화풍을 유지했지만, 자신을 마주하는 화가의 눈빛에는 곧 닥쳐올 소멸에 대한 공포와 고립감이 선명하게 서려 있었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병이 악화될수록, 화폭에 담긴 변화는 더욱 극적으로 나타납니다. 형태는 점차 일그러지고, 윤곽선은 불분명해지며, 그림의 구성이나 비례감각마저 무너져 내리기 시작합니다. 강렬했던 색채는 희미해지고 세부 묘사는 단순화되더니, 나중에는 얼굴의 형상을 겨우 짐작할 수 있는 추상적인 형태로 변모해갑니다. 이러한 시각적 변화는 알츠하이머병 환자의 인지 기능 저하가 예술적 표현 능력에 어떻게 반영되는지를 보여주는 독특한 증거로서, 그의 작품은 예술적 가치를 넘어 신경과 분야에서 교육 및 연구 자료로 활용될 만큼 의학적으로도 귀중한 기록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윌리엄 어터몰렌의 자화상은 한 예술가가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가는 과정 속에서 마지막까지 존엄을 지키려 했던 처절한 의지의 증언입니다. 그는 결국 2000년경 붓을 완전히 놓았고 2007년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아내 패트리샤 어터몰렌은 남편의 작품이 세상에 알려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녀의 헌신 덕분에 우리는 그의 그림을 통해 치매 환자들이 겪는 내면의 고통과 인간 정신의 붕괴 과정을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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