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폭탄의 심장을 뛰게 만든 ‘은빛 마법’과 철저했던 회수 작전
전쟁의 불길이 전 세계를 뒤덮었던 1940년대, 전장에 투입될 무기를 찍어내던 미국의 공장들은 극심한 갈증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철과 기름의 냄새로 가득해야 할 군수 공장에서 정작 가장 부족했던 것은 다름 아닌 '구리'였습니다. 전함의 배선부터 비행기의 발전기, 탄환의 껍데기에 이르기까지 구리는 현대전의 혈관과도 같았기에, 미국이 가진 모든 구리는 이미 전선으로 떠난 상태였습니다. 바로 이 절박한 순간, 인류의 운명을 바꿀 ‘맨해튼 프로젝트’의 연구실에서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기상천외한 작전이 모의되고 있었습니다.
우라늄을 농축하여 원자폭탄을 만들기 위해서는 집채만 한 거대 전자석들이 필요했습니다. 그 자석의 심장부에 감길 전선은 어마어마한 양의 전도체를 요구했지만, 구리 한 조각조각이 아쉬웠던 군수국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습니다. 이때 프로젝트의 책임자 레슬리 그로브스 장군은 상식의 틀을 깨부수는 제안을 던집니다. 구리가 없다면, 미국 재무부 금고에 잠자고 있는 '은'을 꺼내 쓰자는 것이었습니다. 국가의 화폐 가치를 지탱하던 귀금속을 전선으로 쓰겠다는 이 대담한 발상은 곧바로 실천에 옮겨졌습니다.
은을 빌리기 위해 재무부를 찾았던 니콜스 대령과 재무부 차관보 다니엘 벨의 대화는 오늘날까지도 전설적인 일화로 남아 있습니다. 대령이 무심하게 "은 15,000톤 정도가 필요합니다"라고 말하자, 차관보는 기가 찬 듯 이렇게 응수했습니다. "젊은이, 재무부에서 은을 말할 때는 '톤' 단위가 아니라 '트로이 온스' 단위를 쓴다네." 국가의 부를 통째로 옮겨야 하는 4억 3,000만 온스라는 상상 초월의 분량이었지만, 전쟁의 승리라는 명분 아래 인류 역사상 가장 비싼 '대출'이 성사되었습니다.
그렇게 금고를 나온 은괴들은 비밀리에 녹여져 거대한 전선으로 변모했고, 테네시주 오크리지의 비밀 기지에 설치되었습니다. 우라늄을 분리하는 장치인 '칼루트론'의 심장부에는 구리 대신 번쩍이는 은 코일이 촘촘히 감겼습니다. 수조 원의 가치를 지닌 보물이 전선이 되어 벽 속에 박힌 셈이었지만, 삼엄한 군사 경계와 강력한 고압 전류 덕분에 그 누구도 이 값비싼 전선을 훔칠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은은 구리보다 전기 전도성이 뛰어났기에, 역설적으로 장치의 성능은 기대 이상으로 훌륭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이 거대한 빌린 보물을 돌려주는 과정 또한 장관이었습니다. 미국 정부는 장비를 해체하며 전선 한 토막은 물론, 작업 중에 발생했을지 모를 미세한 은가루 하나까지 회수하기 위해 공장 바닥을 긁어내고 벽면을 닦아내는 저인망식 작업을 벌였습니다. 이 지독하리만큼 철저한 회수 작전 덕분에, 빌려왔던 은의 99.9%가 다시 재무부의 차가운 금고 속으로 돌아갔습니다. 구리가 부족해 멈출 뻔했던 과학의 진보를 국가의 자본력으로 돌파해낸 이 이야기는, 자원 부족이라는 절망 속에서 피어난 가장 화려하고도 실용적인 승부수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