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하나로 바뀐 공기, 달리는 기차 안의 기묘한 사과

인종차별의 서슬 퍼런 칼날을 꺾어버린 어느 노신사의 당당한 위엄

by 김형범

1850년대 미국의 어느 기차 안은 덜컹거리는 소음보다 더 무거운 정적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노예제라는 거대한 장벽이 사람들의 머릿속을 지배하던 시절, 백인 전용 칸에 자리를 잡은 한 백인 노신사와 흑인 소녀의 등장은 그 자체로 폭발적인 긴장감을 자아냈습니다. 곧이어 나타난 차장은 소녀를 발견하자마자 당연하다는 듯 날 선 공격을 퍼붓습니다. 그에게 흑인 아이는 기차에 탈 자격이 없는 존재였고, 소녀를 데려온 노인 역시 규칙을 어긴 불청객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노신사는 차장의 위협적인 기세에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아이를 자신의 딸이라 소개하며, 모든 생명은 창조주 아래 평등하다는 말을 차분히 건넵니다. 분노가 극에 달한 차장이 소녀를 향해 입에 담지 못할 인종차별적 폭언을 쏟아내며 당장 기차 밖으로 던져버리겠다고 소리치는 순간, 객실 구석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한 승객이 황급히 차장의 소매를 붙잡습니다.


승객의 입술을 통해 흘러나온 짧은 이름 하나에 객차 안의 공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습니다. 방금까지 세상을 다 가진 듯 기세등등하던 차장의 얼굴에서는 핏기가 사라졌고, 소녀를 향해 삿대질하던 손은 갈 곳을 잃은 채 허공에서 떨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름은 바로 남부의 노예주들에게는 사신과도 같았던 인물, 존 브라운이었습니다. 차장은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것처럼 태도를 180도 바꾸어 비굴할 정도로 몸을 굽혔습니다. 조금 전까지 '더러운 것'이라 부르던 소녀를 향해 정중히 모자를 벗어 인사를 건네고, 노신사를 '선생님'이라 부르며 극진히 예우하는 모습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실소를 자아내게 할 만큼 기괴한 장면이었습니다. 이 기묘한 상황 속에서 존 브라운은 차장의 비굴함에 만족하지 않고, 상처받은 어린 소녀가 한 명의 숙녀로서 온당한 사과를 받을 때까지 엄중한 기세를 늦추지 않았습니다.


이토록 차장을 공포에 떨게 했던 존 브라운은 미국 역사상 가장 급진적인 노예제 폐지론자로 평가받는 인물입니다. 그는 말과 글을 넘어선 행동가였으며, 노예제라는 거대한 악을 끝내기 위해서는 무력 투쟁도 불사해야 한다고 믿었던 강직한 신념가였습니다. 그는 탈출 노예들을 돕는 지하 조직 활동을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훗날 연방 무기고를 습격해 노예 봉기를 시도하다 처형되기에 이릅니다. 비록 그의 직접적인 봉기는 실패로 끝났지만, 그가 뿌린 신념의 불씨와 희생은 남북전쟁이라는 거대한 폭풍의 결정적인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쇠사슬을 끊어내고 얻어낸 노예 해방이라는 역사의 물줄기 뒤에는, 기차 안에서 아이의 손을 잡고 당당히 맞섰던 노신사의 서슬 퍼런 결기가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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