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최초의 ASMR, 앤디 워홀과 와퍼

무심하게 베어 문 햄버거 한 입이 현대 예술의 상징

by 김형범

정적만이 흐르는 화면 속에서 한 남자가 종이봉투를 부스럭거리며 무언가를 꺼냅니다. 아무런 표정 없이 햄버거 포장지를 벗기고는, 조심스럽게 케첩을 짠 뒤 묵묵히 햄버거를 먹기 시작할 뿐입니다. 화려한 조명도, 입맛을 돋우는 배경음악도 없이 오직 빵을 씹는 소리와 종이가 구겨지는 소리만이 공허한 실내를 채웁니다. 이 기묘하면서도 평범한 장면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팝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입니다. 1982년 덴마크의 영화감독 요르겐 레스가 제작한 다큐멘터리 속 이 장면은,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먹방'이나 'ASMR'의 원형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 이면에는 예술과 대중문화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이 숨어 있습니다.


당시 촬영 현장에서 워홀은 준비된 버거킹 와퍼를 보고 맥도날드는 어디 있느냐며 되물었다고 전해집니다. 평소 맥도날드의 디자인이 가장 예쁘다고 생각했던 그에게 햄버거는 단순한 끼니가 아니라 하나의 시각적인 기호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감독이 다시 사 오겠다고 제안하자 그는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며 담담하게 버거킹을 집어 들었습니다. 약 4분 30초 동안 이어지는 이 긴 호흡의 영상에서 워홀은 마지막 한 입까지 다 삼키고 나서야 비로소 입을 뗍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고 방금 햄버거를 다 먹었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알리는 그의 모습은, 일상의 사소한 행위조차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팝아트적 태도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이 무심한 영상은 제작된 지 37년이 지난 2019년, 미국 최대의 스포츠 축제인 슈퍼볼 광고로 화려하게 부활하며 다시 한번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자극적이고 빠른 편집이 주를 이루는 광고들 사이에서 아무 소리 없이 버거를 먹기만 하는 워홀의 모습은 오히려 시청자들의 시선을 강렬하게 붙잡았습니다. 버거킹은 이 영상을 통해 워홀이 생전에 강조했던 자본주의의 평등성을 다시금 소환해 냈습니다. 대통령이 마시는 콜라나 길거리의 행인이 마시는 콜라가 결국 같은 맛이듯, 와퍼 역시 사회적 지위와 상관없이 누구나 똑같이 즐기는 보편적인 경험이라는 메시지를 던진 것입니다.

https://youtu.be/HcbWkcDRJjc?si=DAp0x6l75Mg8Fr9_


앤디 워홀이 보여준 이 정적인 '먹방'은 단순한 식사 기록을 넘어 대중 소비문화의 본질을 꿰뚫는 하나의 행위 예술처럼 보입니다. 가장 일상적이고 흔한 소재를 선택해 그 안에 담긴 문화적 상징성을 드러내는 방식은 오늘날 우리가 향유하는 다양한 콘텐츠의 뿌리와도 닿아 있습니다. 햄버거 하나를 먹는 지극히 평범한 순간조차 예술가가 그 과정에 개입하고 의미를 부여할 때 비로소 시대를 관통하는 아이콘이 된다는 사실을 이 영상은 증명해 보입니다. 우리는 그저 한 남자가 햄버거를 먹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을 뿐이지만, 그 소리의 여운 속에는 예술과 일상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팝아트의 정수가 깊게 배어 있는 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