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기 잡기를 피한 기적의 단어 '갈대박'

말실수-001

by 김형범

1996년, 대한민국에 아직 IMF라는 거대한 파도가 덮치기 전이었다.


캠퍼스에는 낭만이 넘쳤지만, 동시에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엄격한 규율과 야만이 공존하던 시절이기도 했다. 특히 대학 동아리의 군기는 매서웠다. 선배의 말 한마디는 곧 법이었고, 후배들은 그 절대적인 권위 앞에 바짝 엎드려야만 했다.


당시 나는 동아리의 실무를 도맡아 하던 2학년 집행부였다. 어느 날, 집행부 동기들과 모여 술잔을 기울이며 고단함을 달래고 있던 자리에 하늘 같은 선배가 불쑥 들이닥쳤다. 선배는 단단히 벼르고 온 듯, 자리에 앉자마자 우리를 향해 불호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잔뜩 얼어붙은 공기 속에서 모두가 숨을 죽인 채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그런데 한참 핏대를 세우던 선배의 입에서 묘한 호통이 터져 나왔다.


"너희들, 이런 식으로 하면 대박 터지는 거야!"


알코올이 혈관을 타고 흐르며 긴장감을 살짝 마비시킨 탓이었을까. 매서운 꾸중을 듣는 와중에도 내 머릿속에는 뜬금없이 순수한 의문표가 떠올랐다. '어? 무슨 이야기지?' 결국 나는 속으로 삼켜야 했을 그 질문을 겁도 없이 입 밖으로 꺼내고 말았다.


"대박이면... 좋은 거 아니야?"


험악했던 공기가 일순간 정지했다. 후배의 당돌한, 혹은 멍청한 반문에 당황한 건 선배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흥분한 나머지 '대갈박(머리)'이 터진다고 해야 할 것을 '대박'으로 잘못 말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선배는 황급히 단어 수습에 나섰다.


"거기에 '갈'을 집어넣어."


하지만 취기로 인해 평소보다 한 박자 느려진 내 두뇌는 그 간단한 단어 퍼즐을 제때 맞추지 못했다. 그리고는 찰나의 정적을 깨고 세상에서 가장 엉뚱한 조합을 뱉어내고 말았다.


"갈대박?"


그 순간, 살얼음판 같던 술자리에는 그야말로 대폭소가 터졌다. 잔뜩 굳어 있던 동기들은 물론이고, 무섭게 날을 세우던 선배마저 더 이상 웃음을 참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선배의 서슬 퍼런 기세는 '갈대박'이라는 정체불명의 단어 한 방에 허무하게 흩어져 버렸다.


'대갈박'이 터질 뻔했던 위기의 밤을 유쾌하게 구원해 준 기적의 단어, '갈대박'. 그날의 살벌했던 군기 잡기는 싱겁고도 유쾌하게 막을 내렸다. 덕분에 우리는 더 이상 혼나지 않았고, 다시 화기애애해진 분위기 속에서 밤이 깊도록 무사히 술잔을 부딪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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