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희 이야기 좀 그만해

말실수-002

by 김형범

아내는 웹소설 작가다. 그리고 나는 영화감독 지망생이었다.

연애 시절, 나는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제법 그럴싸한 명분을 내세웠다.


"우리, 같은 이야기꾼끼리 한번 잘 해보자."


나름대로 낭만적인 접근이었다고 자부했지만, 훗날 알게 된 진실은 조금 달랐다. 아내가 내 고백을 받아준 이유는 결코 저 번지르르한 문장 때문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찌어찌 부부의 연을 맺었고, 한 지붕 아래 사는 '글 쓰는 아내'와 '영상 연출하는 남편'이 되었다.


비슷한 창작의 길을 걷다 보니 자연스레 성공한 다른 창작자 부부의 삶이 대화의 안줏거리로 오르내리곤 했다. 그중에서도 내가 유독 자주 꺼냈던 단골 소재는 장항준 감독과 김은희 작가 부부의 일화였다. 감독 남편과 스타 작가 아내. 우리의 포지션과 묘하게 겹쳐 보였기에, 그들이 서로 시너지를 내며 승승장구하는 눈부신 성취가 내심 부러웠던 모양이다. 나는 눈치도 없이 아내 앞에서 "김은희 작가는 말이야..." 라며 운을 띄우는 실수를 반복했다. 나의 그 가벼운 입방정이 아내에게 어떤 압박과 스트레스로 쌓이고 있는지 미처 헤아리지 못한 채 말이다.


어느 날, 마침내 임계점에 다다른 아내의 감정이 폭발하고 말았다.


"김은희 이야기 좀 그만해! 장항준이니까 김은희랑 결혼한 거야. 너니까 나랑 결혼한 거고!!!"


서늘하고도 정확한 일침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몸과 마음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한없이 쭈그러들었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완벽한 패배였다. 아내의 말마따나 장항준 감독에게는 김은희 작가가 어울리고, 나에게는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아내가 어울린다. 내가 장항준 같은 남편이 아닌데, 왜 아내에게 김은희 같은 행보를 은연중에 바라고 압박을 주었단 말인가.


돌아보면 참으로 어리석고 부끄러운 말실수였다. 비교는 창작자의 가장 큰 적이라면서, 정작 가장 가까운 사람의 자존감을 갉아먹는 무례를 범하고 말았다. 아내의 뼈 때리는 호통 덕분에 나는 아주 명확한 진리를 다시금 뼈저리게 깨달았다. 세상의 모든 인연은 결국 자기 결에 맞는 사람을 찾아가는 법이다. 사람들은 철저하게 끼리끼리 논다는 그 단순하고도 명쾌한 진리를, 나는 한바탕 쭈그러든 후에야 온몸으로 인정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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