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광주의 무덤에서 역사를 찾다.

분원리 방문기

by 정호성

#1. 6월도 반을 지나가는 어느 토요일 새벽 3시, 지친 몸을 이끌고 들어와 집에 누웠다. 내일 약속된 열 시에 맞춰 몸을 일으킬 수 있을까 걱정하면서도 주저앉기 시작한 윗 눈꺼풀에서 힘이 빠진다. 가랑비만으로는 식힐 수 없는 후덥지근한 공기가 방안을 채운다. 꿈속에서까지도 내일 일어날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이 떠나질 않아 밤새 뒤척이다가 아침 9시가 되어서야 눈을 떠 밖을 내다본다. 비가 그쳤다. 소낙비가 내리면 더 쉴 수 있었으련만, 아쉽게도 하늘은 바람에 의지해 서서히 흐림에서 맑음으로 색을 갈아 입는다. 그래, 오늘이 그날이다. 고향 광주의 무덤과 비석 사이에 숨결처럼 살아 전해 내려오는 이 고을 민초들의 이야기들을 찾아 글로 옮겨보자고 술 친구들과 의기투합한지 한 달. 이젠 드디어 몸을 움직여 그 흔적들을 더듬어 가야하는 첫 날이다. 술 자리에서의 의기투합이라는 것이 늘 그렇듯 며칠이 지나 돌이켜 보면 술이 왠수야라는 푸념만 남는다. 광주시는 그냥 인구가 갑자기 늘어난 광주군일 뿐, 아직은 수도권 변방의 촌락. 민초들의 삶은 대한민국 어디나 있는 것이고 이곳에 태어난 민초가 특별하게 아름다운 삶을 살았다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아마도 술의 힘을 빌어 그간 머리와 가슴을 떠나지 않은 광주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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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광주시. 군에서 시로의 승격이 몇 년 전의 일이라 그런지 마음 한 켠에는 여전히 광주군으로 남아있는 나의 고향. 전라도 광주와 이름이 같아서 인터넷에서 조차 검색 빈도가 한참을 뒤로 밀리는 동네. 광주의 광은 분명 넓은 ‘광’자인데, 지금은 왠지 손 바닥만한 시골 땅이 되어버린 것 같은 왜소함. 예전에는 강남과 하남, 남으로는 안산까지 광주 땅이었다는데, 지금은 그나마 남한산성을 반 정도 관리하고 있다는 이유 하나로 역사, 문화 도시라는 명함을 내밀 수 있다는 사실에 약간은 자괴감까지 드는 우리 광주다. 수도 서울에서 한 시간, 이제 경강선 덕분에 대한민국 최고의 부자 동네 강남에서도 한 시간. 천당 밑에 분당이라던데, 분당까지는 채 20분도 안 걸리는 동네. 대한민국 4차 산업을 짊어졌다는 판교는 전철로 세 정거장이니, 교통 인프라만 생각한다면 경기도에서 둘 째 가라면 서러운 도시여야 할 터인데, 정작 우리들은 아직도 우리의 광주를 도시보다는 시골이라고 부른다. 가끔씩 광주를 찾는 지인들이 아직도 이런 촌에서 사는 거야 라는 동정의 눈길로 쳐다볼 때마다 느끼는 약간의 창피스러움. 그러나 거기에 일일이 변명하는 것도 사실은 매우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광주로 들어서는 모든 초입의 시가지는 도시인지 공단인지 농촌인지 구분할 수 없는 무정체성의 어지러움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갈마 터널을 지나면서 내려다 보이는 삼리의 무질서한 건물들, 태재고개와 대재고개 쪽은 둘다 고개가 얼마나 높은지 경쟁하는 것처럼 높은 고개를 넘어서야 겨우 펼쳐지는 손바닥 만한 평지, 굽이 굽이 오포읍의 산들을 메우는 회색빛 비석과 묘지들. 동쪽은 어떤가. 하남을 넘어 들어서는 광주는 비포장 버스길로 2시간이던 때가 엊그제의 일처럼 느겨지곤 한다. 그나마 재를 넘지 않고 들어서는 43번 국도는 용인 에버랜드의 화려함 속에 뒤섞인 돼지 농장 냄세를 한 껏 들이마시고 나서야 겨우 접하게 된다. 광주에 첫 발을 내 딛는 타지역 사람들에겐 첫 인상이 썩 좋을 리가 없게 된 이유이다.


#3. 광주는 유서 깊은 동네야. 신익희의 생가가 있고 허난설헌의 묘가 있고, 남한산성과 조선 백자로 문화와 예술이 숨쉬고, 역사가 살아있는 아름다운 도시지. 지금은 민선 3기 동안 진행된 난개발로 인해 그리 보이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조선시대까지는 그랬을 거야.. 아마도..지금 내가 느끼는 고향 광주에 대한 열등감은 수도권의 한 도시로서 타지역과 비교할 때 느끼는 것일 뿐, 결국 이를 확인하려면, 직접 걸어서 찾아갈 수 밖에, 내가 모르는 고향의 숨겨진 아름다움을. 그래서 시작한 작은 프로젝트였다. 적어도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서울의 베드타운이 아니라 조상이 뿌리 내린 아름다운 삶의 터전임을 확인하는 것


#4. 퇴촌에 들어선 우리 일행은 싸지만 혹시나 맛이 좋을 수도 있는 커피를 찾다가 결국은 포기하고 롯데리아로 들어섰다. 분명 열어 놓았어야 할 동네의 작은 카페들은 일요일 오전이라 불이 켜져 있지 않았고, 매뉴얼대로 오픈시간이 정해진 롯데리아는 딱 가격 만큼의 맛을 내는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내 놓는다. 그나마 우릴 잠시 동안의 기쁨에 젇어 들게 만든 것은 처마가 아닌 접이식 어닝 밑에 있던 제비집 속의 두 마리 아기 제비의 지저귐. 그렇다 예전에는 참 제비집이 많았었다. 기와집과 스레트 집으로 빼곡한 막 새마을 운동이 열기를 띠던 우리들의 어린 시절에, 제비는 툇마루에 똥을 싸대기도 하는 불청객임과 동시에, 행혀나 착한 흥부처럼 부자가 되는 길을 열어 줄 수 있다는 희망을 물고 오던 새였다. 논과 밭이 공장으로 바뀌고 흙먼지 가득한 신장로에 아스팔트가 깔리는 사이, 그 많던 제비들은 어느 동네로 다 가버린 것일까. 여기 광주도 산업화와 발전이라는 미명하에 많은 것들을 어정쩡한 상태로 잃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어찌할 것인가. 발전은 삶의 편안함을 가져오고 농촌은 공장으로 그리고 다시 상가로 바뀌어 온 것을. 그 사이 잃어버린 농악대의 피리 소리와 동네의 가래떡을 한 곳에 담고 비탈을 오르던 우리네 리어카는 그저 마음 속의 잔상으로 남아 버린 것을... 혹시 주인이 제비집이 있는 것을 모르고 어닝을 접으면 어떻게 되지하는 걱정에 점원을 불러 제비집을 손으로 가리키자, 마치 우리의 걱정을 알고나 있던 듯이 고개를 끄덕여 제비집의 존재를 인정한다. 기와집 대문 위에서 붉은 롯데리아 어닝 밑으로 바뀌어야 하는 이유를 제비는 이해하고 있을까?


#5. 분원리에 들어서는 굽이 굽이 길은 언제나 그렇듯이 화사한 드라이브 코스를 즐기고 있다는 기쁨을 누리게 한다. 마을 어귀에 내려서는 길 오른편에 서있는 두 모텔은 어쩜 저리 저급한 색깔을 칠하고 저리도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을까 생각하며 색깔이 좀 그렇죠 하고 묻자 학덕 선배는 아마도 30여년 전부터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라고 답한다. 대학교 때 였던가, 선후배들과 함께 밤새 술자리를 가졌던 기억이 있고, 참 그렇지, 분원리에 잠깐 들어섰다 없어진 호텔에서는 신혼 첫날밤을 보냈던 기억이 남아 있다. 그리고 아직도 공직에 몸 담았었다는 자부심이 크신 장인 어른. 술이 거나해 지실 때만다 당신의 남종면 부면장 시절을 담담히 들려 주시곤 했던. 지금은 도자기보다는 붕어찜이 더 유명한 곳. 이제 팔당 물 코앞까지 화려한 카페가 들어차면서 팔당호로 넘어가는 낙조를 보러 오는 곳.


#5 분원리는 나에게는 물이자 호수다. 그래서인지 이곳을 지날 때면 언제나 팔당호 쪽만 보면서 오른 편의 낮은 구릉들은 무심코 지나치기 일쑤였는데, 오늘은 다른 날과 달리 분원리 초입 내리막길이 끝나는 지점에 분원 초등학교 건물이 올려다 보인다. 왼편의 팔당 댐의 빛깔은 갓 비가 게인 하늘보다 더 진한 푸른 빛을 반사시키고 있고, 도로 옆의 나지막한 산들은 맑은 청록색으로 팔당의 물과 이쁨 겨루기를 하고 있다.


#6. 일행을 안내역을 맡은 학덕 선배가 차를 우회해 초등학교 입구를 찾았지만, 좁디 좁은 도로위에는 차의 통행을 막는 철골 막대 하나와 쇠사슬이 길을 막고 나선다. 결국, 차를 돌려 백자박물관 이정표를 따라 차 하나가 겨우 들어설 만한 도로를 오르니, 초등학교로 오르는 계단이 하나 높게 서있었다. 왜 여기 왔을까 영문도 모른 채 계단을 올라서자, 작은 놀이터 너머로 십 여개 교실을 있을 법한 초등학교가 하나 서있다. 분원 초등학교. 분명 일제 강점기 때 지어진 낡고 허름한 교사, 한 때는 학생 천명의 큰 학교였다는 학덕형의 말을 의심 섞인 눈으로 쳐다보게 되는 아담한 교정. 조선 백자의 유서 깊은 가마터임에도 일제가 자긍심과 기억을 지울 목적으로 일부러 이 자리에 초등학교를 세웠다고 한다. 땅 밑에 수 없이 묻혀있을 도자기 파편 (도편). 학교의 기원이야 어찌 되었든 또는 운동장 밑에 어떤 기억이 묻혀 있든, 팔당댐을 내려다보며 공부했을 많은 학생들은 지금 어른이 되어서도 아름다운 교정을 기억하고 있을까. 지금은 어른의 눈으로도 엄청 큰 플라타너스 한그루가 팔당의 물과 교정을 막아 서있다. 그 크기만 보더라도, 여기는 참 오래된 학교이겠구나를 절로 이해하고 만다.


#7 분원리라는 이름이 한양의 사옹원의 분원이라는 사실을 처음 접한다. 조선시대 궁중의 살림을 관장하는 사옹원, 그리고 당연히 필요했을 도기나 자기를 굽고 조달하는 말하자면 분점이 바로 분원이었던 것이다. [참조: 사옹원 분원 백자번조소] 그러고 보니 물길을 따라 한양에 접근하기 쉽고, 나무가 울창해 도자기를 구울 땔감 [참조: 양질의 땔감이 소나무가 중심]이 풍부했던 이 곳이 도자기를 굽기엔 최적의 장소였다는 사실은 쉽게 수긍이 가는 대목이다. 조선의 마지막 가마터. 조선 초중기부터 말기에 이르는 450여년간 광주의 곳곳에서 수 백개의 가마터가 운영되었고 [참조: 85개 가마터가 사적 314호로 관리, 광주시 일원에 모두 290여개의 가마터가 있는 것으로 조사], 마지막까지 가마터의 온기와 숨결을 지키고자 했다는 이 곳 분원리. 그리고, 수천 수억의 사금파리가 묻힌 땅 위에 딛고 선 분원 초등학교.


#8. 문화재 보호 구역이라면서 사람들의 접근을 이렇게 어렵게 만들다니 하는 분한 마음이 갑자기 사라지면서, 산의 경계에 병풍처럼 세워진 울타리에 열 걸음 정도마다 채워진 조선 백자의 사진과 그 고고한 빛깔에 너무도 쉽게 마음을 빼앗겨 버린다. 백자가 귀한가 청자가 귀한가. 아니면 어느 쪽이 값이 나가는 걸까. 어렸을 때는 무엇이든 비교하면서 답을 내던 버릇이 있었던 터라 도자기 전문가를 만나면 꼭 물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는데, 쉰이 다 되어 돌이켜 보면, 참으로 어리석은 의문이었다는 씁쓸함이 밀려온다. 고려가 저물면서 이제는 청자를 버리고 하루 아침에 백자로 간다고 선언한 것도 아닐 테고, 도공들이 청자파와 백자파로 나뉘어 세력 싸움을 한 것도 아닐터인데 말이다. 울타리에 걸린 사진 하나하나에는 여러 가지 형태를 한 백자가 들어 있다. 주전자나 꽃병, 탁주 한사발 들이키고 싶게 만드는 그릇까지 참으로 다양하다.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자기의 표면에 은은하게 베어 나오는 쪽 빛. 박물관에서 흘금 쳐다보고 지나쳤던 교과서에 실렸던 듯한 고려 청자에서도 이런 은은한 쪽 빛이 있었다는 생각을 하면서 언덕 길을 올라섰다. [참조: 철화백자, 청화백자, 청자, 분청사기 등으로 다양한 도자기가 생산]


#7 언덕길에 올라서자 한 눈에 들어선 풍경은 초등학교 운동장 반 정도의 푸른 잔디 밭과 녹슨 철골 벽을 한 박물관 한 동. 그리고 이들을 감싸 안은 아름드리 전나무들. 늘어선 전나무 오른 편 한 귀퉁이로 팔당의 물이 눈부시게 파고 들어 온다. 코로나19 이후 개장보다 폐장이 많았던 탓일까, 초록색 잔디는 무성하게 자라 사람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가 우리의 1차 목적지라는 학덕이 형의 설명에 우선 한숨 돌리면서 발 밑에 나란히 서있는 스물 남짓한 비석들이 서 있음을 깨닫게 된다. 회색 빛에 검은 이끼가 녹처럼 번진 빛깔의 비석들은 초록 잔디와 비교되어 어둡고 우울하다. 한자에 능할 리 없는 일행들은 한 자 한자 떠듬 떠듬, 나름 진지한 표정으로 역사를 읽으려 했지만 정작 형은 네이버에서 검색법을 알려 주었다. 사옹원 관리들의 선정을 기리는 비석들인데, 팔당댐 수몰과 함께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던 비석들을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그 첫 번째 비석이 체제공선정비. 반으로 잘려나간 비석은 채제공을 기리는 선정비 인데, 일제의 손에 반 토막이 난건지 옮기던 중에 잘려나갔는지 알 수 없으나, 온전한 모습을 잃었다는 아픔이 베어 난다. 채재공은 정조 시대의 인물로 실학의 거두 정약용과 더불어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끈 인물로 묘사된 바 있다. [참조 저서: 정조, 채제공, 그리고 정약용] 채제공선정비를 시작으로 시계방향으로 늘어선 이십 여개의 비석들은 [참조: 광주시 향토문화유산 기념물 제3호로 지정] 채제공을 비롯한 사옹원 관리인 번조관의 선정비 19기라는 것만은 마음에 새긴다.


#8. 늘어선 비석들의 중간 쯤의 선정비 앞에서 우리는 학덕이 형의 요구에 따라 비석의 한글자 한글자를 더듬 더듬 읽어 내려갔다. 오늘의 하이라이트인 ‘번조관정공학연선정비’. 풀이하면 번조관인 정학연 공의 선정을 기리는 비석인 셈이다. 많은 번조관이 있었겠으나 이 분이 어떻게 오늘 탐방의 주인공이 되었을까 의아해 하던 차에, 정약용의 장남이라는 안내인의 설명에 우리는 모두 일제히 감탄의 목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렇지, 정약용의 장남이라면..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 감탄사를 연발했지만, 사실을 태어나서 처음 듣는 이름. 팔당호 저 건너 남양주 초입에 정약용을 기리는 실학 박물관이 있고, 수 년전 가족여행으로 간 강진에서는 정약용이 유배 시절 목민심서를 집필한 작은 공부방을 본 기억이 떠올랐지만, 정학연이라니. 귀한 분을 이렇게 누추하게 모시고 기리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잠시, 당시 유배되어 폐족의 위기 까지 몰렸던 가문의 처지를 생각한다면, 감지덕지 할 자리인지도 모를 일이다. 69세의 노인의 몸을 이끌고 궁에 들어가 폐족을 면하게 해 준 왕에게 머리를 조아리고는 이 곳 광주까지 내려와 종8품의 낮은 관직조차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들어 업무에 전념했을 초로의 얼굴이 그려진다. [참조: 번조관 사옹원에 딸린 분원의 실무책임자로, 사옹원에서는 번조소를 둔 광주에 해마다 번조관과 서리(書吏)를 파견하였다. 이들은 좌 ·우 2조로 나뉘어 사기장(沙器匠)들을 감독하고, 장작 등의 조달을 책임 맡았다.] 다산에게는 학연(1783~1859)과 학유가 있었고, 세심하고 꼼꼼하고 어쩌면 엄마 같이 다정다감했던 다산은 유배지에서조차 두 아들에 대한 걱정으로 밤을 지새운 날이 많았을 터였다. 그래서 틈이 날 때마다 두 아들에게 편지를 통해 곁을 지키지 못한 아비의 죄책감을 달랬을지도 모른다. 그 중에서도 둘 째 아들 학유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유배지에서 아들 장남을 만나 [참조: 1805년 유배 4년만에 강진에서] 전해 들은 말을 써서, ‘너희 형도 술이 과한 듯 한데, 너는 그 두 배를 마신다고 하니, 내 걱정이 크지 않을 수 없다.’ 면서, ‘글 공부에는 이 아비의 버릇을 이을 줄 모르고 주량만 아비를 훨씬 넘어서는 구나’ 라고 훈계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아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도 고등학교때 친구들이 찾아 오면, 밤 늦게까지 나를 쫓아 다니곤 하셨다. 아마도 술을 과하게 마시지 않도록 노심초사하며 뒤 꽁무니를 따라 다니셨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산과 그 두 아들의 정을 떠올리면서 아버지가 그리워져 눈시울이 붉어졌다.


[참조: 술 마시는 법도]


네 형이 왔을 때, 시험삼아 술 한잔을 마시게 했더니 취하지 않더구나. 그래서 동생인 너의 주량은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더니 너는 네 형보다 배(倍)도 넘는다 하더구나. 어찌 글공부에는

이 아비의 버릇을 이을 줄 모르고 주량만 아비를 훨씬 넘어서는 거냐? 이거야말로 좋지 못한 소식이구나.


[다산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9. 그러다가 얼마 전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밥 잘 사주는 누나의 남주인공 정해인이 정약용의 6대손이라는 설명을 듣고, 어쩐지 뿌리가 있는 집안의 기풍이 있었던 것 같아 하며 마음이 흐뭇해진다. 남자가 보기에도 참 잘생긴 얼굴이었던 것 같은데, 안내인은 안경을 낀 다산과 현재의 정해인 사진을 보이면서, 정말 닮았다고 칭찬을 한다. 그러고 보니 훌륭한 집안의 자손이라는 것 때문에 ‘책임과 무게감에 부담이 컸다’라는 배우 정해인의 말이 생각이 난다. 경기도콘텐츠진흥원이 제작한 정약용 다큐멘터리에 정해인이 나레이션을 맡았다고 하니, 다음에 비 내리는 주말은 찾아서 꼭 한번 봐야 겠다.


#9. 비석을 한 바퀴 돌아 일행은 박물관 앞 벤치에 앉아 조선의 도자기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도자기를 만드는 과정이야 다 알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영화 고스트에서 페트릭스웨이즈가 여주인공을 뒤에서 껴안고 함게 돌리던 물레질은 생각이 난다. [참조:도자기 제조 과정]


조선 그리고 광주의 도자기는 내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의미와 가치를 지닌 물품이자 산업이었으리라. 도자기하면 영국과 중국, 그리고 조선의 도공을 납치하다 시피 끌고 가 자기 생산을 시작한 일본 정도가 떠오를 만큼, 전 세계에서 자기를 생산할 수 있는 국가는 손에 꼽을 정도라고 한다. 마치 현재의 반도체 산업처럼 조선에서의 도자기는 최첨단 제품인 셈이다. 특히 알료의 원료로 코발트가 사용되었다면, 지금의 자동차 배터리의 핵심인 코발트를 우리 조상들이 먼저 사용한 것이니 의미가 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청자나 백자의 은은한 푸른 빛은 결국 코발트를 사용한 알료 덕분에 태어난 빛깔이었던 것이다. 코발트는 희토류의 일종으로 콩고가 세계의 80% 정도를 차지하고 있고, 갈수록 늘어나는 수요를 공급이 따라 잡지 못해 지금도 값이 천정부지로 솟고 있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으나, 그 코발트가 도자기를 만드는 데 씌였다는 사실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콩고 등 아프리카에서 생산된 코발트는 지금의 중국이 열심히 닦고 있는 일대일로의 루트를 거쳐 머나먼 조선 땅에 들어오게 되고, 그 비싼 값 때문에 관요 제작에 있어서만 이 코발트를 충분히 섞은 알료를 사용했다고 하는 설명을 들었다.


#10. 조선이 만약 도자기 제조 기술과 은 제련 기술을 일본으로부터 지킬 수 있었다면 지금의 우리 역사는 참 많이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행의 시작은 임진왜란이었다. 1592년 임진년 일본내에서 세력을 키운 토요토미는 조선 정벌을 감행해 온다. 그 치욕스런 침탈이야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렵겠지만, 그 전쟁 전에 일본은 이미 조선에서 납치 또는 회유해야 할 기술자들의 명부를 준비해 왔다고 한다. 그중의 하나가 도공이며, 이 때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의 도공들이 일본을 도자기 생산국의 반열에 올려 놓게 된다. 그러나 이들 중 상당 수는 노예 수준의 처우와 힘겨운 노동에 지쳐 지옥 같은 조선의 삶을 등진 이도 있었을 테니, 물건을 만들어 사고 파는 이들을 천시한 조선 사회의 허점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전국 각지의 사기장들이 서로 돌아가며 번조관을 지냈으나, 너무나도 힘든 노역에 도망을 치는 이가 부지기수 였다고 하니, 도자기를 만드는 과정 하나하나가 어느 정도 힘겨운 노동이었는지를 짐작하게 된다. 진한 회색의 백자토를 물길과 산길로 나르고 져 날라 모으게 되면 철과 같은 불순물을 걸러내는 사비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등등...

조선의 질 그릇은 왜 일본에서 국보가 되었는가..


#11. 굳게 닫혀진 박물관을 뒤로 하고 우리는 퇴촌 제일의 만두집을 찾았다.


#12. 그 후 수년이 지나, 낡은 일기장 속 (사실은 내 블로그)에서 먼지에 쌓인 글을 꺼내, 브런치스토리 작가 등극 기념으로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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