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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nDora Feb 26. 2018

대한민국 보수와 진보를 이야기하다.

누가  보수이고 누가 진보인가, 잘못된 대한민국을 진단하다.

2016년 촛불 혁명 이후 변화된 것 중 하나는 보수와 진보에 대한 사회적 헤게모니이다.

 보수와 진보를 구분하는 법부터, 사회의 악과 선을 나누는 것 까지 2016년 12월을 지나 대한민국 사회는 많은 것이 변했다. 아쉬운 건 이 과정을 거치면서 너무 많은 오해와 잘못된 진실 속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것, 그리고 그 사실을 우리는 인지하지 못하고 하나의 보편적 진실로서 믿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보수라고 자처하면 타인의 호감을 받지 못한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대한민국의 보수는 악이 아닌 악을 자처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설령 이전의 보수라 지칭하던 자들이 결코 보수가 아님에도, 그들과 보수를 동일시해서 보수는 나쁜 것이라는 결론을 짓고 만다. 보수는 정말 나쁜 것 일까? 그럼 진보는 좋은 것 인가? 어느덧 사회에 자리 잡은 이 프레임은 당분간 벗어나기 힘들 것 같다. 그래도 나는 보수주의자이기 때문에 보수에 대한 가치와 진보에 대한 가치가, 사람들에게 올바르게 인식되고 전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 이 글을 쓴다.

 또 하나의 아이러니는 나는 스스로 보수주의자라 칭하면서, 정당은 정의당 소속이다. 일반적으로 정의당은 진보정당으로 분류가 되는데 어째서 나는 보수주의를 자처하면서 정의당을 지지할까? 그것 또한 이글에서 설명하도록 하겠다.

 우선 보수와 진보를 나누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에 대해서 반대한다. 세계를 반으로 뚝 잘라서 나누듯이 보수우파, 진보좌파 이렇게 나누어 부르는 것이 지금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가지고 있는 시각이다. 그럼 우리는 정말로 보수의 가치와 진보의 가치를 인식하고, 그것을 올바르게 바라보고 있는 걸까? 우선 우리가 일반적으로 바라보는 보수와 진보의 형태에 대해 생각을 해보자. 보수라 고하면 떠오르는 것은 지난 9년의 이명박근혜 정권을 떠오르는 사람들이 태반일 것이다. 그리고 그 9년을 보수정당의 지배로 분류해 바라보는 시선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현재의 문재인 정부 청와대와 민주당, 정의당을 진보정당으로 규정하고 바라본다. 어째서 우리는 그 정당이나 그 정권을 단순하게 별다른 기준 없이 보수다 진보다 이렇게 나누어 버린 것일까. 정말 이명박근혜는 보수의 가치를 가지고 행동을 하고 국가를 운영한 자들인가? 

 우선 보수와 진보를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는 지금 속해있는 우리의 국가나 사회가 무엇을 위해 만들어지고 지속되고 있는 지를 알아야 한다. 현재 '국가란 무엇인가?'를 공동체의 형성 과정에서부터 정리를 하고 있지만,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공동체의 형성은 개인이 외부의 세력에 대항하고 종의 보호와 번영을 위해 결성된 것이다. 이는 공동체가 사회를 형성해서 그 개인을 보호해주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이끌어 가는데 그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보수 및 진보를 선택하고 나누기 전에,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그리고 안전을 위해 이사회를 형성하고 유지하는데 합의를 했음을 명심해야 한다. 즉, 보수든 진보든 그 목적은 사회 구성원 개인들의 개체를 보호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그럼 여기서 왜 보수와 진보가 나뉘는 것일까? 그 이유는 개인들이 모여서 공동체를 형성하고 유지해 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방법의 하나로서 선택의 문제인 것이다.  어떻게 하면 보다 효율적으로 개인을 보호하며, 안정을 유지할 것인가에 대한 방법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인 것이다. 결코 이 둘 사이에는 선이냐 악이냐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 시스템 안에서 선과 악을 논의할 때는 보수 진보의 관점이 아닌, 우리 사회의 시스템을 유지하고, 사회 구성원의 안정을 보장하는데 문제를 발생시키는가, 아닌가를 두고 이야기해야 한다. 그것을 어리석게도 단지 결과만을 가지고 이야기하면, 어느 순간 잘못된 판단을 내리게 된다. 그리고 사회를 분열과 어둠 속으로 끌어 가는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공동체를 형성하고 발전해 가는 과정에서 인류는 수많은 보수와 진보의 갈등을 겪어 왔다. 어느 시기에는 보수적 가치가 우세하고 또 어느 시기에는 진보적 가치가 앞선다. 마치 철학이 그 유수한 역사 속에서 보편적 진실과 가변의 진실 속에서 엎어지고 변화해 왔듯이, 보수와 진보도 그렇게 오래된 세월을 싸우면서 커왔다. 보수와 진보를 어느 시점으로 딱 잘라서 이야기할 수는 없다. 씨족 공동체, 부족 공동체, 연맹국가, 왕정국가, 전제국가, 현대국가 이렇게 커 오면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공동체 사회는 항상 보수와 진보의 갈등을 겪어 왔으며, 미래에도 끊임없이 그 싸움을 이어갈 것이다. 만약 이 싸움이 끊어지면 인류는 두 가지중 하나일 것이다. 멸망을 했거나, 인류의 정신을 누군가 아니면 어느 단체가 컨트롤할 수 있는 완벽한 독재사회가 왔을 때뿐이다. 보수냐 진보냐를 나누는 것이 나쁘다는 게 아니다. 단지 보수냐 진보냐를 고정된 시각에서만 바라보고 해석하는 게 나쁘다는 것이다. 사회를 구조 있게 그리고 좀 더 가치 있게 바라보기 위해서는 구성원들이 확실한 자기 내면의 중심을 잡아주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여기서 문제는 우리가 보수에 붙이는 우파, 진보에 붙이는 좌파, 즉 우파와 좌파는 실질 그 내면을 바라보면 보수냐 진보냐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았으면 한다. 우파 좌파는 단지 인류 역사상 약 100년 남짓되는 시대의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시대의 이데올로기는 그 시대를 반영하는 색깔을 가지고 있지만, 이것을 가지고 보수냐 진보냐를 규정 지어 버리는 건 사회를 분열로 이끄는 큰 문제가 된다. 보수와 진보는 겉으로는 대립하고 각을 세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은 실제로 대립과 조화가 같이 존재한다. 변증법적 현상으로 보다 나은 새로운 가치를 만들고 생산하기 위한 활동이지, 서로를 획책하고 죽이기 위한 싸움은 아니다. 보수와 진보는 이렇듯 좌파냐 우파냐 또는 시장자본주의냐 국가계획경제냐, 아니면 영미식 복지냐 북유럽식 복지냐 등, 그 시대에 따라 다양한 시대의 이념과 결합을 하고 그들을 대리로 내세워 싸우기도 한다. 그리고 한쪽의 이념이나 이데올로기가 무너 졌을 때, 새로운 이념과 결합을 하고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활동을 한다. 즉, 보수냐 진보냐는 보존이냐 변화냐 라는 두 개의 커다란 담론으로 정리를 하면 된다.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시시콜콜한 마르크스주의냐 자유주의냐 또는 시장경제냐 사회경제냐 등의 다양한 이데올로기에 결합을 시키면, 한쪽은 시대의 상황에 따라 악의 역할을 하게 된다. 그렇게 하면 사회는 균형 발전이 힘들어지고, 한쪽의 원사이드 게임으로 오히려 분열과 망국으로 가는 길이 되고 만다. 그래서 지금의 대한민국은 위험하다.

 대한민국은 단지 사회에 악영향을 끼치는 세력들을 전부 보수로 몰아붙이고 있다. 그리고 진보만이 정의로운 세상처럼 만들어간다. 자연스럽게 문제가 터지면 모든 게 보수정권 시절의 문제로, 그리고 이를 바로 잡는 것은 사회의 진보 세력만이 가능하다는 선악의 논리를 가져다 붙이고 있다. 물론, 작금의 국정농단이나, 공정해야 할 사회에 해를 가한 사람들과 정치인들이 분명 존재하는 것은 맞다. 그리고 그들을 처벌해서 사회를 정화하고 보다 공정하며, 다양한 사회 구성원들이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야 되는 것 또한 맞다. 그러나 여기에는 두 가지만 존재한다. 보수냐 진보냐가 아니라 선한 자와 악한자 이 두 가지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들이 보수적 가치로 악을 행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들이 당시의 기득권 세력이지만, 보수의 가치를 가진 자들도 아니다. 단지 개인의 이익과 자신들만의 안위를 위해서 행한 악한자 들이지 결코 보수는 아니다. 오히려 이들에게 보수주의자로서 묻고 싶다. 너희들은 어떤 가치를 가지고 사회 구성원으로서 활동하고 있는가? 너희가 주장하는 보수의 가치가 무엇인지 묻고 싶은 것이다. 보수는 이들에게 보수의 가치로 자신의 이익과 안위만을 추구하라 하지 않는다. 보수는 너희들에게 빌려준 힘으로 사회 구성원의 보호와 그들의 행복을 위해 노력해야 하며, 지금의 좋은 시스템은 보호하고 잘못된 것은 고치라고 이야기한다. 이렇듯 보수는 사회 시스템의 안정한 보호를 위해 노력하는 자들의 가치이다. 진보는 그 반대편에서 보수가 하지 못하고 놓쳐버린 구성원들과 다양성들을 찾아내고 변화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지금의 문재인 정부 또한 앞으로 10년 15년을 유지하게 되면, 공동체 속에서 보수로 자리 잡는다. 그러면 또 다른 진보의 색깔이 나타나게 되고 이제 보수화된 지금의 진보정권과 대립을 세우게 된다. 이렇듯 보수와 진보는 양면의 동전처럼 딱 구분되지 않는다. 보수와 진보는 이사회를 지탱하는 방식에서 서로가 구분이 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봐도 2000년 이전까지, 신자유주의는 진보 경제학자의 가치였다. 그러나 사회 주류로서 남게 되면서 어느덧 보수의 가치가 된 것이다. 그것은 가치가 변한 게 아니라, 당시의 진보주의 이념이 주류로서 지탱하게 되면서 보수화 되었기 때문이다. 보수와 진보는 물이 흘러 바다로 가듯이, 진보라는 물이 바다에 다다르면 보수의 큰 줄기가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1900년대 초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념은 당시 제국주의와 파시즘 등과 맞서는 진보의 가치였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의 변화에 따러 보수의 가치로 깃발을 흩날린다. 그리고 그에 맞서 새로운 강력한 복지국가가 진보의 가치로 떠오르고 있다. 이렇듯 지금의 진보가치가 후에는 보수 가치로서 자리잡는다. 지금의 보수가 제대로 사회를 수호하고 구성원을 보호하지 못하면 진보의 가치가 이를 뒤집고 새로운 보수로서 자리 잡게 된다. 보수와 진보는 서로가 반목하는 게 아니라 거대한 담론 속에서 커가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나는 보수주의자지만 정당은 정의당을 지지한다. 나에게 있어서는 정의당의 이념이 곧 보수이다. 정의당이 주장하는 다양성과 디테일한 사회정책들이 보수의 가치로서 사회에 자리 잡길 바란다. 

"죄악은 스스로 태어나지 않는다, 죄악은 누군가의 손에서 만들어진다. 그는 보수와 진보로 나누어서는 안 된다. 단지 사회의 악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중도를 이야기해보자. 중도라는 가치는 나는 인정하지 않는다. 중도란 허울 좋은 판타지 같은 이야기다. 사람은 모든 문제에 대해 결정을 내려야 한다. 그때 우리는 두 개의 추중 하나를 선택해서 무게를 실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떻게 중도가 존재할까? 그것도 극중주의라는 이념. 극한의 중도주의가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은 정말 판타지 하다. 그리고 그 결정이 중도의 결정인지는 어떻게 안단 말인가? 무엇의 잣대를 가지고 측정할 수 있는가? 칸트도 헤겔의 변증론도 중도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나의 현상과 반대의 현상이 새로운 다른 해결을 낳는다고 이야기 하지, 중도가 존재한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거기다 현대 사회는 다양한 개인의 기호에 따라 기호 주의가 만연하다. 하나의 사안에 따라 A냐 B냐의 해법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그 외에도 C도 D도 존재한다. 이 다양성 속에서 어떻게 중도를 찾을 것인가? 그리고 그 결정에 대해 누가 중도라고 판단을 해줄 수 있는가. 보수냐 진보냐는 그 결정에 따라 확인이 가능하다. 그런데 그 중간은 누가 이게 중간이라고 사회적 증거를 댈 수 있단 말인가. 진짜 허황된 논리다. 그러나 단 하나 각각의 사안에 따라 진보냐 보수냐 선택을 하는 과정에서 전체를 봤을 때 중간은 있을 수 있다. 극중주의는 허황된 꿈이라 생각한다. 위에 설명했듯이 인류가 멸망하거나, 인류의 정신세계를 완전히 컨트롤할 수 있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사회에 극중주의라는 허무주의는 없었으면 좋겠다. 보수와 진보의 가치만 잘 세우고 유지하면 사회는 충분히 발전할 힘을 기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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