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왜 우리에게 싸움을 거는가?
첫번째 - 지금 상황까지의 전반적인 관계를 알아야함.
두번째 - 현재 한국의 정치적 상황과 지금 상황의 연계는 잘못된 결과를 가져옴.
세번쩨 - 잘못을 지적하거나 잘못된 부분에 대한 지적은 가감없이 사실에 기반함.(민족주의감정배제)
네번째 - 언어든 행동이든 폭력에 굴복하거나, 상대에게 폭력을 휘둘려서는 안됨.
다섯째 - 지금의 상황과 그 국가의 국민들의 민족성은 관계가 없음.
여섯째 - 내가쓰는 글은 내 주관의 깊이가 있으니, 결코 동의하지도 부정하지도 마시길.
위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결국 현재 일본이 처한 상황은, 동북아에서의 역할에 대한 불만과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는 한국의 위상에 대한 불안감을 경제제재를 통해 풀면서, 아베정권은 개헌이라는 오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발판을 만들기 위해 일부러 트러블을 만들어 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아베정권은 자국의 평화헌법9조의 개정을 위한 국내우호여론 조성을 위해서는 타국과의 갈등이 필요했다. 궁극적 목적은 한국과의 무역전쟁을 통해 미국으로 하여금 동북아에서의 자국의 역할의 중요성 부각과, 한국과의 갈등으로 동북아를 미국의지로 개편하기 위해서 헌법9조의 개정이 필요함을 주장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한국과의 트러블은 일본 국내의 혐한 감정을 증폭시키고 한국을 빌미로 국내여론의 전환을 꾀하는 전략적 행동이다. 일본의 아베정권은 과거 청산되었다고 판단한 한일관계의 압박과 경제의 규모만큼 위치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 스스로 열등감에 빠진 상황이고, 원인으로 끝없는 한국과의 과거 역사에 청산 문제로 침략국의 이미지를 벗지못하는 현실과 아시아 경제시장에서 한국의 성장은 자신들의 위치를 퇴보 시킨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 아베정권의 의식은 한국내에서 벌어진 과거사에 대한 배상 판결과 위안부합의 파기등의 문제가 다시 국제사회에 이슈가 되고, 또는 그 판결로 인해 새로운 전후 배상문제에 자국이 빨려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로 행하고 있다.
다시 정리하자면.
1. 아베정권과 극우세려은 아시아와 세계에서 자신들의 위치에 불만을 가지고 있다.
2. 과거 역사에 대한 대한민국 국민들의 행동으로 국제사회에 침략자로서 인식되는 상황을 벗어나기 위함.
3. 80년대 침체기로 들어간 자국의 경제성장의 원인의 일부를 한국의 성장으로 인식한다.
4. 경제는 가졌으나 군사력이 없는 국력은 세계무대에서 반쪽자리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5. 배상판결의 인정은 과거 불법행위의 인정과 같다. 그럼으로 아베정권은 배상판결을 인정하게 되면 과거 한일청구권 협약이나, 한국내 또는 중국등 과거 침략국에서 벌인 행동의 정당성이 위배된다. 그럼 각 국가에서 벌어질 전후배상이 아시아에 새로운 이슈로 자국의 경제와 위치를 압박할 수 있기 때문이다.
- 2차세계대전 이후 세계는 급격한 이념전쟁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새로운 이념전쟁은 국가간의 전쟁이 아니라 국가내부의 사회시스템의 변화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두 이념과 사상의 전쟁이었다. 이념전쟁은 결국 하나의 국가에서 어떤 사회경제시스템을 채용하고 이를 위한 정치시스템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였다. 전후 세계질서는 2차세계대전을 통해 급격히 부상한 미국과 구소련을 중심으로 재편 되기 시작했다. 이념전쟁이 극대화된 원인으로는 세계대전이후 유럽의 식민지 정책이 종말을 맞으면서 유럽내부와 아시아 아프리카에 식민지로 있던 여러 국가들이 새로이 독립을 하게 되었고, 자신들의 국가 시스템을 어떤 것을 도입하고 선택할것인지에 대한 문제와 맞물려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 기존의 식민지들은 대부분 유럽의 강대국인 영국, 프랑스, 스페인등의 자본주의를 선택한 국가들의 종주국으로서 자본주의의 피해지역이 대다수를 차지하였다. 그리고 유럽 본토또한 전쟁이 끝나고 국가의 기능이 정상을 찾아가면서 전쟁중 부재였던 정부를 새로이 구축하고 사회를 정상으로 돌려야 했다. 전쟁은 과거의 정부구조와 사회계급시스템의 몰락을 가져왔고, 세계의 국가시스템의 기반은 미국과 구소련을 중심으로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국가시스템으로 나누어지고 있었다. 일찍이 영국이나 프랑스는 왕권의 횡포에 대항하여 시민들의 자발적인 혁명을 통해 새로운 사회시스템을 만들었고, 산업혁명을 통해서는 자본주의가 뿌리깊게 박혀있었다. 그러나 그외의 유럽 여러 국가들은 경제나 정치부분에 있어서 영국이나 프랑스와 같은 변화를 가지지 못했으며, 산업혁명을 통해 부를 축적하기 보단 오히려 자본주의의 자본의 집중화에 위한 피해를 받은 경우가 많았다. 전쟁이후 유럽 국가들의 내부에서는 새로운 국가시스템을 위한 치열한 내전과 반정부 세력에 의해 정부와 국가전복이 일어났으며, 내전은 주로 미국의 정보부와 구소련 공산당의 후원을 얻은 세력들간의 싸움으로 나타났다.
세계대전 이후 세계질서의 재편과정에서 새로이 등장한 국가내부의 이념전쟁은 자유진영과 공산진영 두 세력의 주축인 미국과 구소련이 주도했으며, 이 과정에서 미국은 일본에 대한 전승국으로서 일본을 전후에 임시 지배하는 형태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전후 일본의 처리에 대해서는 미국이 주도하는 형태가 되었고, 일본은 미국의 선택에 의해 그 운명이 달리할 상황이었다. 그러나 아시아는 구소련의 공산화와 중국의 공산화로 인해 공산주의 진영이 영토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미국은 아시아에서 거대해진 공산주의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전후의 일본에 대한 제재를 강하게 할 수는 없었다. 아시아에서 미국이 거점으로 삼을 수 있는 국가는 일본과 당시 중국 국민당이 공산당에 밀려 후퇴해 만든 대만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애초 미국은 일본 내부의 경제시스템을 경공업 위주의 소규모 경제시스템으로 바꿀려고 했으나, 아시아에서 해방이후 한국의 내전이 발발하면서 미국은 일본의 군사목적의 중공업시스템과 기존의 군사무기 제조공장에 대한 폐기를 진행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한국 내전에 참전하기 위해서는 일본이라는 전략요충지가 중요해 졌고, 한국의 내전이 끝난후의 세계는 이념주의간의 냉전의 시대로 돌입하였다. 그리고 유럽에서는 하나의 국가라도 자신들의 진영으로 끌어오기 위한 이념의 대리전쟁이 많이 발생하였고, 유럽의 이념전쟁에는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한 자본주의 국가들이 지원을 하고 있었다. 이에 미국은 아시아에서 자신들의 세력을 넓히는 과정에 일본의 전후 패전국 처리를 진행하는것은 손해를 자처하는 것이라고 판단했고, 이에 미국은 일본의 군대를 해산하고 경제에 대해서는 기존의 산업시설을 활용하여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세계전쟁이후 일본은 한국과 중국 그리고 동남아에 주었던 피해에 대해서 사과나 배상을 하지 않은 상태로 전후 경제발전을 할 수 있었다. 특히 그 피해가 컸던 한국과 중국에 대해서 중국은 공산화가 되었기 때문에 당시 미국으로서는 적의 세력에 대한 배상을 할 필요가 없었고, 한국은 일본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이상 냉전시대 살아남기 힘든 지역적 특성이 있었서 배상에 대한 요구를 할 수 없었다. 결국 일본은 한국, 중국, 동남아시아에 큰 피해와 상처를 주고도 전후 경제적 배상이나 기타의 피해없이 미국의 지원하에 경제발전을 이룩 할 수 있었다.
결국 전후 일본이 죄과를 치루지 않고 유지된 원인은 이념전쟁으로 냉전의 발발과, 미국의 자국의 이익을 위한 세력 보존으로 일본을 제2의 미국으로 만들고 아시아에서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한 요충지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후 미국은 일본을 경제파트너로 인정하게 되었고, 불과 20년만에 일본은 전세계 8위의 규모의 경제를 이룩하고 IMF8조국과 OECD에 가입하게 되었다. 일본의 성장은 일본이 과거사에 대한 반성을 필요치 않도록 만들었으며, 이에대한 반사이익은 미국이 독점하고 얻고 있었다. 오늘날까지도 일본은 미국에 저항을 하지 못하는 가장큰 이유는 일본 무력의 대부분은 미국에 의존하고 있다는 현실이다. 만약 일본이 군사적 패권을 다시 찾는다면 미국의 지금과 같은 일본의 핸들링은 쉽지 않을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한,미,일 동맹중 한국의 지리적 위치의 중요성과 전략적 요충지로서 작용하고 있지만, 이는 일본이 헌법9조에 묶여 군사력을 가질수 없는 현실때문이다. 일본이 군사력을 가지고 확장의 기회가 생긴다면, 동북아에서 한국을 제외한 미,일동맹만으로도 미국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 2차세계대전이후 이념전쟁으로 인한 세불리기 전략으로 전후 일본의 전략적 중요성.
- 한국의 내전에 대응하고 차후 아시아에서 미국의 패권 유지를 위한 기지로 역할.
- 전후 냉전시대의 진영간의 새로운 전쟁 형태로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간의 경제전쟁.
- 미국의 세계경제의 중심 역할과 미국 경제성장을 위한 파트너로서 일본의 역할필요.
- 2차대전이후 지속되던 냉전은 각세력간의 세불리기와 각진영간의 경제전쟁으로 변하였다. 국가간의 전쟁은 없었으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두시스템의 경제전쟁으로 변화하였고, 군사적 대치는 꾸준하게 진행되어 왔으나 핵이라는 비대칭 무기로 서로가 군사적 억지 상태가 유지되었다. 냉전기간에는 국지전 또는 내전이나 쿠데타등에 의한 이념전쟁이 꾸준하게 발생되었다. 쿠데타나 내전은 주로 두세력의 후원을 얻은 반 정부세력들의 저항에 위해 국가 전복이나 사회시스템 변화를 위해 일어났다. 그리고 두 세력은 경제력을 통해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기 시작했고, 70년대 중반까지 두 진영의 경제성장은 거의 비슷하거나 공산주의시스템 좀더 앞서나가는 상황이었다. 전후 공산주의세력의 경제우의는 페허 상태의 국가를 복구시키고 사회를 안정시키는데 필요한 요소인 일원화된 목표의식과 공동행동을 위해서는 공산주의 시스템이 적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세력이 안정적인 시스템을 유지하기 시작했고, 전쟁기간 발전한 과학은 인류에게 새로운 경제발전의 기회를 제공했으며 세계는 새로운 성장을 맞이하게 되었다. 전후 복구의 초기목적은 사람들의 생존을 위한 의,식,주의 해결과 기본적으로 생존을 위한 기본욕구 해결의 만족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의,식,주의 기본이 해결되고나서 사람들은 기본욕구 이상의 부가적인 욕망의 만족을 위한 목표를 가지고 행동을 하게 되었고, 생존욕구이상의 욕망의 달성과 개인화된 욕구의 만족을 위한 경제발전과 변화에 대해서는 공산주의 경제시스템 보다는 자본주의 경제시스템이 훌륭하게 작동했다. 70년대 이후 과학의 발전은 인간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었고 보다 다양한 욕구를 충족할 수 있었다. 자본주의 내에서는 자신의 노력과 능력으로 이런 다양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고, 이런 욕구의 충족에 대한 댓가는 자본주의 국가의 국민들의 생산성 향상과 빠른 경제성장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공산주의 경제시스템 하에서는 개인의 욕구 충족보다는 사회전체의 이익과 공동분배시스템으로 개인의 욕구와 욕망이 억눌려 생산성 향상이 뒤쳐졌고, 시간이 지날 수록 자본주의 국가에 뒤쳐지게 되었다. 70년대 이후 벌어진 경제는 80년대를 기점으로 공산주의 세력의 중심이던 구 소련연방의 개방과, 경제분야에서 자본주의 시스템을 받아 들이면서 일대 변화가 일어나고 냉전이 종식되었다.
일본은 전후 미국의 지원과 한국전쟁의 특혜로 빠른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그리고 전후 20년만에 세계에 두각을 나타내고 70년대이후 고도 성장을 하기 시작했다. 70년대 미국은 베트남전의 재정부담과 자국의 인건비 상승및 원유등의 원자재가격의 상승으로 생산품에 대한 비용이 증가하였고, 미국경제는 고도의 스태그플레이션으로 빠져들었다. 미국은 스태그플레이션의 결과로 시장에 뿌려진 달러의 통화량을 줄이기 위한 정책을 시행하였다. 미국 은행들은 통화량 감소와 전쟁으로 뿌려진 달러의 회수를 위해 금리인상 및 긴축재정을 실시하였다. 80년 초,중반에는 정책의 결과로 해외 달러 통화량은 줄어들었으나 은행들의 고금리정책으로 인해 세계의 달러가 미국으로 몰려들었고, 외환시장에서의 달러강세로 수출 수입의 무역적자가 시작되었다. 무역수지 적자는 미국연방정부의 재정적자로 이어졌고 쌍적자로 인해 내수시장이 붕괴하고 장기 경기침체에 허덕이고 있었다. 미국은 달러강세로 인한 무역수지 적자 해소와 재정적자의 해결을 위해서, 당시 세계 G5(미국, 프랑스, 영국, 독일, 일본)의 재무장관들을 플라자호텔로 불러들여 달러 하락을 위한 강제 조치를 시행하게 하였다. 1985년 플라자합의로 독일과일본은 자국통화의 대달러 가치를 상승시켰고, 당시 마르크와 엔화는 1년사이에 50%이상의 평가절상이 되었다. 1달러에 250엔의 가치가 1년만에 120엔으로 엔화는 가치상승 했고 달러는 가치하락하게 되었다. 독일과 일본은 플라자합의 이후 달러하락 정책으로 무역수지악화에 대한 정책을 세우고 진행하였다. 일본정부는 달러하락으로 엔화의 가치상승에 대한 정책으로써, 내수를 중심으로한 새로운 경제성장모델의 하나로 이용했다. 은행들은 엔고 현상으로 국내로 몰린 자금에 대해 저금리 대출 정책을 진행하였다. 특히 담보대출에 대해서는 담보로 제공된 부동산의 담보가치를 평가절상하여 실거래가 이상의 부실대출을 진행하였다. 은행들의 부동산 가치에 대한 부실평가는 단기적으로 부동산 소유자의 수익으로 전환되었다. 부동산의 새로운 소유자는 또 다른 은행과의 담보감정평가를 통해 가치상승을 노리고 새로운 부실대출을 만들어냈다. 은행들의 부동산 담보 대출은 일본내부의 부동산 버블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미국은 세계에서 일본과 독일의 추격이 두려웠으며, 1970년대 미국은 대내외 여건으로 인해 발생한 스태그플레이션을 막기위해 고금리 긴축재정정책을 시행하였다. 고금리정책에 의한 여파로 자국으로 달러가 몰리면서 달러강세현상이 일어닜다. 달러가치 상승으로 인한 통상무역수지는 적자로 경상수지가 악화 되었고, 연방은 전후사상 최대의 재정적자에 빠져있었다. 85년 플라자합의는 무역수지 개선과 재정악화를 벗어나기 위한 조치로써, 미국의 최대 경제파트너이자 경상수지적자의 최대원인인 일본과 독일로 하여금 엔화와 마르크화의 가치상승을 일으켜 달러화 약세를 유도하도록한 강제조치였다. 독일은 마르크화 가치를 올렸고 이로인한 무역수지 적자를 감수하면서도 자국내에서의 인플레이션 현상에 대해서는 철저한 고금리정책을 통해 통화량 증가를 막은 반면, 일본은 엔화 가치상승을 기회로 내수경기의 부흥을 시도했다. 일본에서는 85년이후 연간 전체통화량이 10%씩 증가하게 되었고, 부동산과 주식시장은 버블의 힘에 강제상승하게 되었다. 일본은 85년 플라자합의로 경제의 안정화를 기하는 정책을 시행해야 했으나 이를 무시하고 오히려 자국 시장에 버블을 일으키는 포퓰리즘 정책을 시행했고, 일본시장은 부동산 버블과 신용버블에 의해서 실가치의 2배이상의 버블과 부실채권이 발생했다. 엔화가치상승을 내수시장으로 전환하여 부동산과 신용버블을 이용한 경제정책은, 내수를 중심으로 일본국내경기에 단기 상승과 성장의 요인으로 작용했지만, 일본은 무역을 통한 경제성장과 수익을 내는 구조이기 때문에 경제통상분야에서는 무역수지 적자를 기록하였다. 국내 총생산 부분에서는 단기적으로는 무역경상수지는 마이너스를 기록했지만 전체 국내총생산 지표인 GDP는 상승했으며, 경상수지적자에도 불구하고 전체 GDP가 상승한 원인은 일본국내의 부동산과 신용버블이 원인일 수 밖에 없다.
1980년대초부터 시작된 신자유주의 경제는 금융시장의 개방과 국제투자시장의 역동성에의해 국가간의 산업과 경제구조는 서로 영향을 주는 구조로 변하였다. 일본의 은행이나 금융시장 또한 세계은행들의 결정과 국제기준을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각 국가의 금융시장 개방과 기업들의 투자 국제화로 외환을 취급하는 은행들은 서로가 긴밀한 관계에 놓여 있었고, 금융투자와 자본이동의 국제화로 외환을 취급하는 세계 각국의 은행들은 자본이동과 국제투자 안정화를 위한 조치를 취하게 되었다. 국제금융시장의 안정화를 위한 조치로서 외환을 취급하는 주요 은행들의 모임에서, 금융과 자본의 국제화에 대한 투자안정성 확보를 위해 은행들의 BIS(자기자본비율, 자산가치은행자본율)를 8%로이상 확보하기로 1989년 합의를 이루었다. 전세계 외환을 취급하는 은행들의 BIS인상 결정으로 일본내의 은행또한 BIS를 국제기준에 맞추어야만 했다. 특히 일본의 경제구조는 무역을 중심으로한 생산과 유통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은행의 BIS는 6%선이었으며 은행들의 총자산 규모는 부동산대출의 버블에 의해서 상승된 상태였기 때문에, 일본의 은행들은 BIS를 국제기준에 맞추는데는 상당한 금액의 추가 확보가 필요해졌다. 일본은 세계 각 국가은행들의 합의로 BIS인상에 대한 부담과 일본 내부에서 부동산과 신용 버블로 인해 발생된 통화량 증가로 인플레이션이 발생했고, 인플레이션은 일본내수시장의 물가상승의 원인이 되었다. 일본은 갑자기 결정된 세계은행들의 BIS인상 및 부동산과 신용버블로 발생된 인플레이션에의한 국내물가상승을 막기위해서 금리인상을 시도하였다. 은행들의 금리인상은 일본 기업과 가계에 이자 부담으로 인한 디플레이션으로 작용했으며, 디플레이션에 의해서 통화량이 감소한 내수시장은 일본은행들의 대출시장의 주를 이루는 부동산 담보대출에 대한 부실의 원인으로 작용하며 부동산 버블붕괴로 인한 경기침체를 초래했다. 부동산 버블은 다시 은행들에게 새로운 압박으로 작용했고, 은행들은 부실처리 및 재정건전성을 위해 금리 인상과 더불어 총액대출규제를 시행하게 되었다. 일본 은행들의 금리 인상과 새로이 적용된 총액대출규제는 담보와 신용이 연동하여 정해지는 형태였다. 이로 인해 일본기업들과 가계는 이자의 부담을 버티지 못하거나 부동산의 가치하락으로 인한 은행들의 대출회수 압박때문에 채권이 부실화되고 내수시장 경색으로 이어졌다. 부실채권과 버블붕괴및 시장경색의 여파로 1991년 100%의 자산가치를 가졌던 부동산 시장은 1998년에는 그가치가 20%로로 하락했고, 부동산의 가치하락은 은행들이 담보로 잡고있던 대량의 부동산들의 자산붕괴를 가져왔다. 부동산 담보가치의 하락으로 은행들의 자산가치는 급락하고 채권으로 잡고 있던 부동산들은 부실채권으로 변하였으며, 부실채권의 증가는 일본은행과 금융권들의 도산으로 이어졌다. 이후 20년간 일본은 성장율이 0%대에서 머물렀고, 2016년 1%대를회복 2017년에 이르러서야 3%대성장을 기록하게 되었다.
일본은 1980년 미국의 달러화 하락을 위한 플라자합의로 인해 이미 성장 동력이 주춤한 상태였고, 독일처럼 통화량을 줄이고 긴축재정및 내실을 다지는 기간으로 신성장 동력을 찾았다면, 미국을 넘볼 수 있는 유일한 경제대국이 될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당시 플라자 합의는 일본으로 하여금 경제력 이외에 강한 군사력의 필요성을 느끼게 했다. 미국이 세계를 주도할 수 있는 두 가지 요인중 첫 번째는 달러가 기축환율이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전세계 군사력 1위의 힘을 바탕으로한 세계경찰 역할로 타국으로 하여금 미국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일본 군사력이 자국의 방어가 가능하고 타국과의 전쟁이 가능한 상황이었다면, 일본은 1985년 플라자합의를 강행 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미국은 냉전 패권싸움으로 자국의 재정수지는 악화되었고, 달러 강세로 인하여 무역수지는 적자를 면치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를 타개할 수 있는 방안은 세계 2위 3위 일본과 독일이 달러의 가치하락을 위해 자국통화를 강제로 평가절상하여 무역수지를 개선하고, 자국에 모여있는 달러를 다시 세계시장으로 돌려보내는 것만이 탈출구였다. 독일과 일본은 전후 미국의 도움으로 경제대국이 되었으나, 과거 2차대전의 전범국으로서 군사력을 확보하지 못하는 상황이었고, 자국 국방과 방위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미국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이 플라자 합의를 이끌어 내게된 주요배경으로 볼 수 있다.
일본 아베정부와 일부 우익세력들은 일본경제가 장기간 침체된 시기에, 한국은 그 수혜를 입은 국가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 경제의 성장과정에서 일본의 경제원조와 기술원조가 급속도의 경제성장을 이끌었고, 지금 한국이 일본과 세계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는건 일본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있다. 일본의 우익세력들은 80년대 미국에의한 플라자합의와 이후 자국의 버블 붕괴로 인한 경제침제의 원인으로는, 2차대전이후 군사력을 가지지 못한 상황때문에 발생된 결과라고 생각한다. 국제사회에서 자신들이 우의의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군사력 확보와 군사대국이 되는것이 무엇보다 중요 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일본이 군사력을 확보하고 키우기 위해서는 현재 평화헌법9조를 개정해야한다. 그래서 일본의 위상을 강화하는 걸림돌인 평화헌법9조를 수정하기 위해 일본 아베정부와 우익은 다양한 여론전과 트러블을 유도하고 있다. 현재 발생한 한국과의 무역전쟁이외에도, 러시아와의 쿠릴열도 분쟁과, 중국과의 센카쿠열도 분쟁, 그리고 우리나라와의 독도영토 분쟁을 일으키고 있다. 일본이 이러한 영토분쟁은 승리가 목적이 아니라 자국민과 국제사회에 자국의 안보를 위해 군사력 확보와 강화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평화헌법9조의 개정을 추진하기 위함이다. 일본이 군사력을 확보하고 군대를 활용한 대외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평화헌법9조 개정을 통해 군대를 보유할 수 있도록 개정하고 해외에서 타국과 전쟁을 할 수 있도록 고쳐야한다 .
- 미국의 재정악화 및 무역수지 적자극복과 경제위기극복을 위한 독일과 일본의 경제회생요구.
- 통화의 절상을 통한 엔고에 대한 대책으로, 고도의 인플레를 통한 금융정책 시행으로인한 버블형성.
- 무역 중심의 경제구조에서 새로운 경제모델로의 전환 실패.
- 인플레이에 대한 경고 무시로 인해 급격한 내수 물가의 상승이 시작. 금융의 버블붕괴로 자산가치 하락.
- 아시아에서 한국을 중심으로한 새로운 신흥 경제대국의 등장으로 자국의 입지 축소.
- 일본 아베정부와 우익세력들의 생각은, 국제사회에 군사력이 없는 자국의 경제력은 그 위치가 불안하다고 느끼고 있으며, 국제사회에서 경제원조 이외에도 여러 군사옵션을 제공함으로써 일본이 군대보유의 필요성 을 강조하고 있다.
- 일본은 전후 미국의 지원을 바탕으로 세계 2위의 경제 대국까지 이룩했었다. 그리고 한때는 1인당 GNP가 미국을 앞지른 상황도 있었다. 일본의 고도성장기를 뒷받침한것은 전자와 자동차 산업이다. 50년 대에는 흑백텔레비전, 세탁기, 냉장고 60년대 이후는 칼라텔레비전, 에어컨, 자동차를 중심으로 무역을 통한 수익 극대화가 이루어 졌고, 그외 정밀기계 및 조선등 중공업이 받쳐주면서 꾸준한 안정성장이 이루어졌다. 고도성장의 근간인 무역수지흑자는 미국과의 무역을 통한 경상수지 흑자가 가장많았으며, 반대로 미국은 자국의 스태그플레이션 극복을 위한 고금리 긴축재정으로 달러가 상승한 상태였다. 독일과 일본의 성장은 미국의 재정악화와 경상수지 적자및 달러화 가치 상승으로 인한 자국으로의 달러집중현상의 원인이 되었고, 미국의 현상탈출을 위해서는 무역대상국인 독일과 일본의 통화가치 상승이 필요했다. 미국은 자국의 무역수지 개선을 위한 조치로 플라자합의를 통한 달러화 약세를 만들기 위해서 독일과 일본의 통화가치상승을 강제하였다. 85년 플라자 합의를 통해 엔화가 가치상승하면서 기존 수출산업인 무역수지 흑자를 통한 성장이 더 이상 힘들어 졌다. 일본은 엔화상승을 기회로 국내 내수를 통한 성장및 자산투자형태로 산업을 전환하였다. 엔화의 가치 상승으로 인한 무역에서의 적자폭을 상쇄하기 위해 일본 정부는 은행의 금리인하를 유도하고, 일본내부에 통화량을 증가시키는 인플레이션 정책을 진행하였다. 은행을 통한 인플레이션 정책은 단기적으론 엔고에 의한 무역수지 악화를 막는 역할을 했다.
당시의 일본의 상황은 얼마전 서브프라임이전의 미국처럼 부동산 가치평가를 극대화시켜 잉여가치를 발생시키고, 버블에 의해 발생된 가치에 대해 은행은 저금리 정상대출을 해주었다. 이 돈은 다시 부동산과 주식시장으로 흘러들어가 새로운 버블을 만들어내고 물가상승을 유도하는 경제의 악순환 구조가 계속되었다. 부동산 버블과 신용버블의 효과로 내수시장은 단기 호황을 누렸으나 통화의 증가는 인플레이션과 물가상승의 원인이 되었다. 인플레이로 인한 거품이 꺼지면서 일본내부는 버블로 인한 부실채권의 처리로 1990년 초부터 성장율이 0수준으로 떨어졌다. 결국 85년 이후 엔고정책을 단순한 돌려막기 정책으로 전환한것이 악수로 작용했고, 그 기간에 한국은 일본의 중심시장이던 전자와 경공업 및 조선과 중공업 그리고 석유화학제품 시장에서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이후 한국은 일본의 기술과 산업시설등을 자신들의 경제구조에 맞게 변화시켜, 가성비 높은 인력을 활용하여 세계무역시장에서 고품질의 상품을 제공할 수 있었다. 50년대 이후 세계시장에서 최고의 품질과 경쟁력을 자랑했던 일본의 전자제품과 중간재 상품들은 점차 한국과 대만 및 중국등에 의해 시장이 분화되고 넘어갔으며, 2000년 이후 일본은 상품의 중간재나 완성품 보다는 원자재 가공을 통한 상품의 소재공급자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21세기 들어서 20세기 후반 시작된 세계단위의 FTA협상의 결과 세계경제는 국가별 또는 단위별 분업의 형태로 경제의 구조가 바뀌어 졌다. 21세기 이전에도 국가간의 무역은 꾸준히 있어왔고, 국가간의 FTA 또한 꾸준하게 진행되어왔다. 그러나 당시의 무역은 주로 서로간의 완제품을 생산하고 주고 받거나, 연료가 되는 석유 및 석탄, 철등 산업재의 원료가 되는 원자재의 무역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20세기후반 신자유주의 경제구조 아래서는 기업들이 이익을 내기위한 방법의 하나로 노동집약적인 산업과 기술집약적 산업을 분리 운영하기 시작했으며, 노동력이 저렴하고 경제개발이 덜 된 지역이나 국가는 완제품 생산을 위한 제조업 공장 위주의 산업을 유치했고, 완제품을 위한 중간재 개발이나 제조는 노동력이 비싼만큼 능력이되는 국가나 지역에서 제조 수출하게 되었다. 이런 제조의 대단위 분업화로 인해 각 국가와 지역들은 자신들의 현재 상황에 맞는 산업구조를 만들고 유지하는 형태가 되었다. 아시아 지역도 이런 국가단위 분업체인구조의 형태를 가지고 있으며, 중국은 완제품의 생산을 위한 기지로서, 일본은 원자재 가공 및 상품소재의 공급처로, 한국은 원자재를 이용한 중간재 상품의 개발과 제조의 역할을 하게되었다. 분업체인이전에는 일본의 전자나 경공업 제품등 완제품들은 세계시장에서 최고의 상품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기술이 점차 고도화 되고 산업의 규모가 커지면서 완제품 생산에 대한 비용중 인건비는 국가별 산업수준에 따라 많은 차이을 보였다. 특히 일본의 인건비 부담으로는 중국이나 동남아시장에서 제품을 완성하는 것과 비교해서는 감당이 안되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FTA와 각종 무역규제의 완화로 국가간의 통상에 있어서 관세 및 무역을 위한 유통의 비용이 감소하였다. 그로인해 세계 각국의 대기업들은 개발과 생산의 단계를 분업화 하고 제품의 제조와 같은 단순 노동의 결과물에 대해서는 비용이 저렴한 국가에서 생산하고 유통하게 되었다. 이는 이익 극대화를 위한 단순한 전략이었고, 분업의 결과로 각 국가들은 자신들의 산업의 기반을 선택발전시킬 수 있었다. 그동안 개발과 제품의 생산 및 유통을 소속된 국가에서 일원화하는 방식은 노동력의 비용증가로 인해 상품의 가격을 올릴 수 밖에 없었고, 제품의 품질을 떠나서 가격의 상승으로 소비시장에서 매출이 감소할 수 밖에 없었다. 이로인한 제품에 대한 분업화는 경제의 단위가 하나의 국가에서 지역적 묶음이나 경제수준이 비슷한 국가들의 연합형태을 만들어 냈고, 이를 위해서 각국들은 다양한 FTA를 진해하여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 할 수 있는 경제구조를 설계할 수 있게 되었다. 경제의 블럭화와 제품 생산에 대한 분업화는 일본또한 예외가 아니라 일본기업들도 개발 및 생산의 단계를 분리하고 이를 위해서 기업의 구조를 변화시킬 수 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일본또한 노동집약적 산업인 제품의 완성은 비용이 저렴한 중국이나 동남아를 중심으로 생산기지와 유통기지를 건설했고, 일본 내부는 제품의 완성을 위한 원자재의 생산과 개발에 주력하는 기술집약접 산업을 고도화 했다. 특히 중국시장의 개방은 소비시장의 증가와 생산시장의 기지 역할로서 저렴한 인건비를 중심으로 세계에서 대기업들의 생산기지와 유통기지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생산기지와 유통기지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중국은 원자재 및 중간재 수입을 위한 무역시장을 개방하여야 했고, 무역시장의 개방으로 중국은 소비시장으로서의 역할도 하게 되었다.
세계 경제의 분업화로 일본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물론 한국도 어느정도 성장한 경제를 중심으로 중국과 일본 경제와의 연계를 위한 산업 구조의 변화가 필요해졌다. 일본의 선택은 무엇보다 이익이 높고 산업의 중심이 되는 원자재의 가공과 공급을 위한 역할을 선택하였고, 이는 전체 산업의 흐름속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게되는 제품제조를 위한 기술과 제품의 공급 역할이다. 세계 경제에서 분업체계의 구조와 단계는 제품의 개발 및 원자재공급 - 중간재생산 - 완제품의 형태이며, 이중 개발과 원자재 공급은 전체시장의 뼈대 역할을 하는 중심이 되었다. 사람으로 보자면 일본은 줄기세포와 각 역할을 하게되는 세포들의 개발과 공급을 한국은 이를 기반으로 한 간, 췌장 및 인체에 필요한 장기의 제조를, 중국은 이를 기반으로한 사람의 완성체를 만드는 역할이다. 인체에서 가장 중요시 되는 세포의 공급은 인체를 제품으로 봤을때 제품의 품질을 결정지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전체 제품의 완성도는 각각의 역할인 세폼의 품질과 이를 기반으로한 장기의 생산기술과 마지막으로 각 장기를 연결해서 제품화 시키는 기술 이세가지의 조화가 무엇보다 중요하고, 특히 제품의 품질은 기반이 되는 원자재인 제품의 품질에의해 99% 결정이 난다. 이후의 기술력이나 제조 능력은 어떤 원자재를 쓰느냐에 따라 결과물의 품질이 달라지며, 좋은 제품은 공급되는 원자재의 퀄리티에 따른 결과로 이어진다. 이는 현재 일본의 역할이 전체 시장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말해준다. 일본의 원자재와 제품의 퀄리티는 특히 전자제품의 완성을 위한 반도체와 전기 제품의 중간재 시장에서 중간재의 성능과 기능을 담보하는 역할을 한다. 대한민국이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1위의 역할을 할수 있는것 또한 일본의 원자재가 좋고 이를 가공하여 만들어내는 대한민국의 기술력또한 세계 1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중간재를 활용해여 최종 제품을 생산하는 중국의 인건비또한 저렴화 그들의 제조능력또한 좋기 때문이며, 한국과 일본 및 중국의 전자제품이 다른 유럽이나 미국등의 국가에 비해 가격과 성능면에서 앞서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과 일본, 중국은 각국의 산업의 발전과 경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삼국의 긴밀한 협조와 협력이 필요한 이유이다.
한때 세계 경제의 중심을 자처하던 일본, 전자는 쏘니 자동차는 도요타를 중심으로 유럽과 미국시장에서 최고의 품질과 성능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일본은 국제무역에서 두가지 혜택을 얻고 있었다. 첫 번째 전후 미국의 지원이었는데, 1970년대 닉스 독트린 이전까지는 전세계 은행들은 금본위제의 환율및 통화발행 정책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2차대전 이후 미국은 자국의 승전을 기회로 달러발행을 금본위제가 아닌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서 찍어내어 세계에 뿌려댔다. 유럽이나 일본은 미국의 필요에 의해 수입한 물품 대금을 달러로 수금을 하게 되었는데 이때 각국의 환율정책은 연동형 변동환율이 아니라 달러에 대한 고정환율을 금을 기준으로 갖고 정하였다. 일본은 자국의 엔화에 대한 가치를 최대한 낮추고 수출에 유리한 위치를 가질 수 있었다. 두 번째 전쟁이후 의 패전국으로서 역할은 일부 유럽과 미국에 대한 배상만을 하고 있었다. 그것이 샌프란시스코 조약이다. 이 협정으로 일본은 최대 피해국인 한국과 중국에 대한 전후 배상에서 면제를 받았고, 이념대결인 6.25를 통해 해체되어야 할 자국의 중공업과 경공업을 기반으로 새로운 기술을 기반으로 성장 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하게 되었다. 일본은 독일보다도 적은 배상과 전쟁에 대한 책임에 대해서 면책을 받았던 것이다. 이 두가지는 일본이 전후에 새로운 경제대국으로 발돋음 하는 기회를 준것이다. 그러나 이후 미국의 무분별한 달러발행은 미국으로 하여금 스스로 인프레이션을 넘어 스태그플레이션의 늪으로 빠져들게 하였고, 유럽 여러국가들의 압력에 결국 미국은 금본위제 시행을 위반한 사실을 발표한다. 미국을 제외한 국가들은 금융위기에 대한 미국 달러에 대해서 금본위제를 탈피하고 새로운 세계의 기축 통화로 인정하게 되었다. 당시 달러를 무효화 하는건 유럽 강대국들과 달러 소지자 국가들의 재정을 악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미국의 달러는 그대로 사용을 하고 그 때부터 각국은 달러에대해 변동환율을 적용하게 되었다. 그런 영향으로 독일과 일본은 자국 환율에 대해서 고정환율정책으로 일관할 수는 없었다. 경제가 커지고 자국 화폐의 통화량이 늘면서 자연스럽게 마르크화와 엔화는 상승을 해야 됨에도 고정환율 정책으로 저환율 정책을 유지하고 있었고, 이는 미국의 통상경기를 어렵게 하고 미국으로 하여금 재정적자와 무역적자에 빠지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미국은 두 국가로 하여금 플라자 합의를 이행하게 만들었다. 미국은 세계 국채를 줄이기 위해 단기간 달러를 빨아들여 자국의 통화를 줄이고 달러 가치를 높여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야 미국이 타국에서 밀린 채무에 대해서 최대한 달러를 통해 적은량으로 국채를 갚을 수 밖에 없기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달러 가치 상승은 무역수지 적자를 높이고 재정악화를 가져오는 결과를 낳았다. 미국으로서는 달러가치를 떨어뜨리지 않고 무역수지 흑자를 만들어 재정건전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주 거래국의 가치를 높이는 정책을 펼 수 밖에 없었다. 즉 국채도 줄여야 하고, 자체 달러의 통화량도 늘려야 하는데 이를 해결할 방법은 제1, 2무역국으로 부터 무역수지 흑자를 만들어내고 그들 이익의 일부를 환율을 통해 회수 할 수 밖에 없었다. 그 것이 플라자합의의 목표이다. 냉전시대에는 국가가 선택한 사회시스템에 따라 세계는 양분화되어 경제도 정치도 지역적 위치가 아닌 시스템에 따라 블럭화 되었다. 냉전 기간에는 제품의 생산 소비 유통이 한계적 이었고, 자본주의 시스템 또한 반쪽짜리 경제 시스템 이었다. 그러나 80년대 구소련 연방의 해체와 동유럽 국가들의 변화에 따라 세계의 크기는 넓어졌으며, 소비시장 또한 빠르게 증가해 갔다. 그리고 넓어진 소비시장 만큼 새로운 경제구조가 발생했고, 유럽과 아시아의 새로운 시장은 자본주의 국가들의 기업들로서는 새로운 먹잇감으로서 훌륭했다.
일본은 엔화가치의 상승으로 무역시장에서 경상수지 악화를 이어갈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일본은 자국의 통화가 올라감에 따라 자연스럽게 일본 국내에 인플레이션이 발생했고 노동비용 감축을 위해 기업들은 한국이나 동남아에 생산기지를 건설하게 되었다. 그리고 세계는 80년대를 기반으로 냉전의 종식과 3차 산업혁명의 시점으로 볼 수 있는 개인용 컴퓨터 시장이 급속하게 성장하게 되었는데, 그동안 트랜지스터 집적회로에 기반하던 전자산업이 컴퓨터와 관련 시장의 성장으로 반도체 시장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일본 무역의 주를 이뤘던 전자시장은 주로 트랜스터 집적도와 크기를 줄이는 미니화 전략이었고, 전후 30년간의 일본 제품의 주를 이루는 기술이었다. 반도체는 이런 트랜지스터의 몇십배 몇백배의 기능과 성능을 가진 물체로서 전자제품에 있어서는 그 형태와 성능을 완전하게 바꿔놓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반도체는 3차산업에 있어서 싱귤래러티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반도체가 전자제품에 적용됨으로써 전자제품은 그동안 변화하지 못했던 성능과 모양에 있어서 획기적은 변화와 성능개선이 가능해졌으며, 80년대 이후 반도체 시장은 한국 및 대만이 주요 생산및 제조 공급국가로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일본은 자국의 쏘니나 도요타등의 전자제품과 자동차제품의 세계에서 가지는 경쟁력을 과신했고, 일본이 전후 아시아에서 미국을 대신한 맹주로서 자본주의 자유진영의 리더역할을 하고 있었으나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피해에 대한 배상이나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선 제대로 리더의 역할을 할 수는 없었다. 특히 아직도 일본의 전쟁당시 행한 여러 비인도적이고 비인륜적인 과거의 유물이 많이 남아있는 아시아는 일본에 대한 감정이 단순한 경제 원조로는 풀어내기 힘든 상황이다. 이런 청산되지 못한 과거를 가진 일본은 미국의 냉전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아시아 자유진영의 한국과 대만등에 다양한 경제원조와 기술지원등을 하였음에도, 전쟁당시 피해국들은 일본에 대한 과걱의 감정으로 인해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는 힘들었다. 일본 또한 자국의 과거청산이 없는 경제성장으로 인해 전후에 세계경제대국이 되었으나, 일본의 경제성장은 일본정부와 국민으로 하여금 과거 전쟁의 정당성을 부르짖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고, 경제를 통한 대동아 공영권을 확보할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일본은 한국과 아시아에 대한 원조는 서로살기위한 상생이 아닌 자신들의 주도하에 경제대국을 건설하기 위한 보조국의 역할로만 보고 있었다. 그래서 80년 90년대 자국의 수출부진으로 인해 특히 한국은 특혜를 보게되는 국가로 생각하게 되었고, 한국이 성장하게된 기반인 전자시장과 반도체 시장 그리고 인터넷 시장의 기술과 기반을 자신들이 지원해주고 가르쳐 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일본은 한국의 경제성장과 지금 세계에서의 위치는 자신들의 지원이 없이는 불가능 했다고 생각한다. 특히 현재 경제는 전세계 10위권으로 OECD선진국에 가입되어 있으며, 군사력은 세걔7위의 군사대국이고, 과거 80년대 초반 경제의 규모가 자국과는 15배이상 차이가 나던 상황에서 지금은 1.5배의 수준으로까지 높아진 것은 오로지 자신들이 한국을 지원해 주었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있다. 이런 생각은 일본의 우익들이 한국을 은혜를 모르는 국가로서 생각하는 원인으로 작용했고, 일본의 병탄이후 강점기는 한국의 근대화 과정을 압축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일본은 한국에 대해서는 민족적 우월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한국의 성장을 인정하고 동반자로서 생각하기 보다는 한국은 영원한 자신들의 2등국가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일본은 그런 맥락에서 한국에 대한 과거 피해에 대해서도 강제성과 위법성은 없다고 주장하며, 한국이 끊임없이 자국에 대한 과거 반성요구와 과거행위에 대해 지속적으로 제기하고 국제사회에 알리는 행동에 대해서는 일관되게 무시하거나 말도 안되는 주장으로 일관하고 있다. 일본의 과거사에 대한 대책은 항상 두가지이다. 첫 째로 전쟁당시 불법행위는 없었다. 두 번째로 당시의 자신들은 문명을 개화하고 근대화를 시켜준 은혜의 국가이다. 일본 우익들의 이런 입장으로 인해 한국에서 벌어진 최근의 두가지 일을 굉장히 안좋아한다. 첫 번째가 위안부 합의에 대한 파기와 두 번째로 한국에서 벌어진 강제징용배상 판결에 대한 대법원의 결정이다. 일본은 1965년 한일정상화를 위해서 자신들은 무상3억 유상2억의 원조를 진행했으며 이로써 한국의 전쟁당시 일본에 의한 보상은 끝났다고 생각한다. 1965년 당시 한일 청구권 협상에는 분명하게, 기업 및 민간에서 벌어진 모든 보상과 관련한 행위는 종결되었다고, 명시되어 있다. 그리고 노무현 정부당시에도 민관합동조사관에 의해 한일간 민간보상에대한 청구권은 소멸되었다고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1965년 청구권 협상의 결과가 전후 당시의 모든 행위에 대해서 소멸을 주장할려면 몇가지 사항을 충족해야한다. 우선 일본의 주장대로 당시의 모든행위는 적법한 절차로 이루어졌고 위법한 행위는 없었다. 그리고 전후에 진행된 샌프란시스코조약에 대한 불인정이다. 일본은 전후에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통해서 전쟁으로 인한 각국의 피해에 배상및 보상과 관련한 사항을 마무리 지었다. 이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내용중 일본의 한반도 병탄과 과정은 불법이며 이는 원천 말소되어 한국은 을사조약자체가 불법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이로 인해 병탄자체의 불법으로 인한 그 과정자체가 불법으로서 일본은 한국에 대한 모든 권한이 상실되었고, 이를 인정하는 조약이다. 일본의 논리대로라면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조약자체를 무효화하고 한국에 대해서 정당성을 주장해야 한다. 그러나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조약을 통해 전후의 상황을 마무리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결국 한국점거 자체에 대한 불법성을 인정하는 것과 같다. 그에 반해 65년 한일청구권협상당시 일본은 한국에 대해서 불법성은 인정하지 않았고, 한일청구권은 병탄이후 발생한 과정이 합법이고 이에 대한 보상으로 귀결되어 있다. 즉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고 정당성을 주장하는게 일본이다. 그에 반해 국제조약에서는 자신들의 불법성을 인정한 조약이 존재한다. 이 괴리감은 일본이 풀어야할 숙제이다. 지금 일본은 과거의 병탄이후 행동에 대해 정당성을 주장하는 가운데, 한국에서의 위안부 협상에 대한 합의 파기와 강제징용에 대한 배상확정 판결은 자신들의 주장과 배치되는 결과이다. 두 가지의 한국의 결정은 일본의 위법성을 근거로 두고 내려진 결정이다. 결국 이는 일본이 주장하는 65년 한국과의 한일청구권 협상결과와는 다른 맥락으로 일본우익들은 인정할 수 없는 결과로 생각한다. 그리고 일본은 한미일 공조의 관계또한 싫어한다. 일본이 가진 경제력으로 군사력을 확장하고 키우면 한국 없이도 충분한 동북아의 견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전후의 평화헌법9조에 가로막혀 어쩔 수 없이 한국과의 공조가 필요한 상황이 맘에 안드는 것이다. 일본으로서는 세계에서 자신들의 위치가 한국의 경제성장으로 인해 과거 전쟁시대의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찾기 힘들어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고, 평화헌법9조로 인한 군사력 부재가 한국의 성장을 돕고 있으며 군사력의 부재로 인해 자신들의 국력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일본으로서는 한국의 경제성장을 더이상 지켜볼 수 없는 상황이다. 한국의 동북아에서의 성장은 자신들의 역할을 축소시키고 과거 전쟁당시의 불법행위에 대한 배상문제로 한국과 중국등 동남아로 번질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계기는 미,일 안보조약만으로도 동북아에서 미국의 원하는 역할을 할수 있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군사력의 증대또한 필요하기 때문에, 평화헌법의 개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한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 한국의 경제는 자국의 결정에 의해 좌지우지 될 수 있다고 어필하여야하며, 미국과 일본국민들에게 평화헌법 개정을 통한 군사력 확보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는 주변국인 한국 및 중국, 러시아 및 동남아 일부 국가와의 물리적 마찰도 필요하다. 그러기 위한 조치로서 우선 한국과의 경제전쟁을 시작하는 것이며, 이는 과거의 정당성과 현재의 한국의 성장을 방해하고, 동북아의 균형을 께뜨려 미국과의 안보조약을 미,일 안보조약으로 축소하기 위함이다. 현재 일본은 한일 안보동맹의 파기를 기다리고 있을것이다. 한일 안보동맹 파기는 일본에게는 경제전쟁의 정당성과 자국민들의 군사력 확보에 대한 여론환기 및 미국과의 안보밀착을 가속 할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기때문이다.
- 일본은 전후에 전쟁에 대한 가해자로서의 책임을 전부 지지 않은 상태이다.
- 일본은 냉전의 혜택으로 미국과 일부 유럽국가들과의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책임을 벗어났다.
- 일본은 한국에 대해서 과거는 근대화 과정이고, 자신들의 지원과 원조로 한국이 성장했다고 생각.
- 한국의 성장으로 자신들의 과거사에 대해서 새로운 문제로 국제사회에 대두되는 것을 원치 않음.
- 일본의 우익은 자국민 과의식으로 자신들의 민족성에 대한 우월의식 과잉.
- 한국으로 인해 일본의 위치가 하락했다고 생각하며, 한국에 대한 경제전쟁을 통해 자신들의 힘을 과시.
- 평화헌법9조의 개정을 위해서 대외마찰을 유도하고 일본국내와 미국에게 군사력 필요성을 어필.
Pan Dora기획자
이념주의에 매몰된 대한민국 진보에 대한 비판과 성찰, 보수화 되버린 현재의 진보를 시민과 대중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스토리텔러가 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