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슬프다 결국 그들도 반성할 줄 몰랐던 그들과 같구나.
- 대한민국의 우익은 보수가 아니다. 보수는 참된 가치를 지키려는 자, 또는 많은 선택의 기로에서 현재의 가치의 소중함을 아는 자이다. 우리는 광복 이후 이승만 대통령 시절부터 40년을 넘는 시간 동안 민주주의라는 허울 아래서 살아왔다. 초대 이승만 대통령부터 군부 정권의 전두환 정권까지, 마치 중국 진시황이 되려는 듯 독재와 영구 집권에 매달렸다. 자신을 위해 헌법과 법을 바꾸고, 자신들의 유리한 지형을 만들기 위해 선거 제도와 정치 구조를 바꾸면서 그들은 독재를 통한 영구 집권을 통해 자신들만의 왕국을 만들려고 했다. 현명하며 일제 강점기에도 의지를 가지고 저항하던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독재 군부 정권에 대해서 지속적이고 치열하게 정권에 저항을 했다. 1987년, 마침내 그 열의를 바탕으로 민주주의를 이끌어냈으며 독재와 군부 정권은 막을 내렸고 역사 속에서 진정한 민주주의를 시작하게 된 해로 기록이 되었다.
그러나 부분적 승리 이후에 민주주의를 완결 하지 못 하고 독재에 저항하던 세력들 간의 권력 다툼이 시작되었다. 현재 집권 세력인 386세대는 독재 시절 정치권에 대한 저항과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던 두 거인을 중심으로 세력이 나누어졌고, 두 세력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집안 싸움으로 국민들이 이루어 놓은 민주주의의 시작을 5년이나 늦추게 만들었다. 87년 6.29 선언 이후에 두 세력은 하나로 뭉치지 못하고 파벌을 형성하며, 출신 지역을 중심으로 한 기득권 세력을 만들어 갔다. 결국 다음 선거에서도 둘은 하나로 합치지 못하였다. 서로가 정권을 잡기 위해서 싸운 결과 최악의 선택을 하고 말았다. 힘의 크기가 비슷했던 두 세력 중 영남을 중심으로 한 세력은 척결과 청산의 대상이던 과거 독재 세력과 영합하여 대통령이 되었다. 이 잘못된 단추 하나가 지금의 대한민국의 정치 지형과 세력의 판도를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대한민국 정치는 영남과 호남으로 나누어진 지역 정치와 두 세력의 이념 주의에 매몰된 사람들 간의 전쟁터로 변하였다. 과거 독재에 저항하던 세력들은 두 세력으로 분리가 되었고, 국민의 저항으로 얻은 기회는 결국 권력의 향방을 놓고 대립했던 두 세력으로 인해 새로운 민주주의를 시작도 하지 못하고 잃어버리고 말았다. 권력을 위해 지금의 386세대는 분열하고 야합 하면서 참된 민주주의 정치를 시작하지 못하게 되었다.
%<독재 정권에 대한 저항이라는 공동의 목표가 사라지는 순간, 결국 비어있는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내부 싸움으로 변하였다.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한다는 소리는 공허한 메아리가 되었고, 권력의 중심을 차지하기 위한 비열함만이 남았다. 독재를 몰아낸 국민들의 열의와 희생은 새로운 권력자를 탄생 시키는 과정의 역할을 했을 뿐이었다. 독재 정권 이후의 권력과 정치 지형의 변화는 386세대의 기득권 진출을 위한 기회가 되었고, 이미 이때 그들 또한 과거의 독재 정권들의 이익을 차지하기에 바빴다. 결국 공동의 적이 사라지고 사회에 새로운 변화를 만들고 미래를 건설해야 했지만, 두 세력은 서로의 존재를 용인하지 않고 지역 갈등과 새로운 이념의 대결인 보수와 진보로 구분되어 싸우기 시작했다. 현재 대한민국 내에서 보수와 진보로 구분되는 시점은 대한민국이 진정한 민주주의를 얻었던 1987년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지금 우리가 보수라고 칭하고 우익으로 부르는 세력의 태반은 독재 정권 시절의 힘을 계승하고 그들과 야합하여 정권을 얻었던 민주 세력이다. 보수우파라 떠벌리는 지금 세력들의 구성은 독재 정권 시절의 정치인과 그에 맞서 저항하던 세력의 일부가 뭉쳐서 만들어진 세력이다. 대한민국에서 국민의 힘으로 독재의 막은 내렸으나 정치 분야에서는 독재 세력의 잔재와 사람들이 꾸준하게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지금 정권을 잡은 세대들인 386세대는 자신들 세력의 성격을 보수와 진보라는 두 가지의 대립되는 이념을 기반으로 한 집단으로 규정 지었다. 1980년 이후 세계의 지형은 냉전이 종식이 되고 공산주의 국가들의 제도적 실패가 확실시되는 시기였다. 특히 경제적인 측면에서 공산주의 국가는 자유주의 세력에게 대항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경제력의 차이는 군사력의 차이를 가져오고 있었다. 그동안 군사력을 통한 힘의 논리로 균형을 유지하던 공산주의 진영은, 경제 불균형으로 인한 사회 문제가 심각한 수준으로 발생하기 시작하면서 국가 체제를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 체제로 유지하기 힘들어졌다. 그리고 이미 공산주의 사상은 실질적 붕괴 선언이 늦어졌을 뿐 내부에서는 체제의 붕괴가 시작되고 있었다. 냉전은 자유진영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세계는 이런 변화가 오고 서로 간의 새로운 결합과 분열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민주주의를 이룬 대한민국에는 분단 이라는 현실이 존재하고 있었다. 분단으로 인해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여전히 반공 프레임과 공산주의 사상과 체제에 대한 싸움이 계속되었다. 독재 정권이 막을 내린 후 시작된 두 세력의 다툼은 보수와 진보로 나누어졌다. 독재와 군사 정권이 막을 내린 후 직접 선거로서 처음 실시된 대통령 투표는 당시 독재 저항에 대항했던 두 세력 간의 내부 싸움으로 권력의 교체에 실패하고 말았다. 두 세력은 정치권 내에서 권력을 잡기 위한 분열이 일어났고, 권력에 대한 욕심은 독재에 대한 청산과 그 세력들에 대한 정리의 기회를 없애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 두 세력 중 처음 정권을 잡은 세력은 과거의 세력과 영합 한 현재 보수라 불리는 세력들의 집단이 되었다. 그 결과 독재 잔재의 정치인과 세력들을 청산하고 새로운 정치와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데,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으로 독재 시절의 정치인과 세력들을 받아들인 첫 민주주의 정권으로 인해, 정치의 세계는 권력의 영구적 독점만 사라 졌을 뿐 새로운 시스템과 환경을 만들지 못하였고,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의 정치 구조와 과거 독재 시절과 군부 정권 시절의 폐단이 지속되었다. 두 번째 민주 정권은 호남을 중심으로 한 진보 세력이 정권을 창출했다. 그러나 정권을 차지한 세력 또한 권력을 얻기 위해 독재 시절의 잔재 세력 일부와의 결합하였다. 그리고 이후로도 결코 자신들의 정치 지형을 바꾸기 위한 시도와 노력은 하지 않았다. 민주 정권 창출 이후 보다 향상된 민주주의 형태와 안정적인 정치 구조를 통해 견제와 협의의 정치를 할 수 있는 구조로 개편하지 않았고 과거의 정치 구조와 구성을 유지 해왔다. 정권을 창출하고 정권의 중심이었던 대통령이 정치 개편을 추진하기 위한 정치적 선택이나 행동은, 자신의 내부 세력들의 반대와 기득권 유지를 위한 정치인들의 대항에 부딪혀 개혁을 하지 못하였다.
독재에 맞서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권력을 이용하고, 정치를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써 권력을 활용한다는 그들의 신념은 자신들이 잡은 권력을 유지하고 정권을 빼앗는 것에만 매몰되어 왔었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기득권으로 불리는 386세대와 이전 독재 정권의 후예들은 서로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을 뿐, 국민과 사회를 위한 개혁과 봉사에는 관심이 없다. 지금 서로가 보수와 진보로 부르는 두 세력은 서로를 좌익 우익으로 부르고 있다. 좌익은 진보를 표방하고 도덕적 가치를 중요시한다고 내비치면서, 우익을 향해 보수라 지칭하고 도덕적 가치를 상실했으며 비 민주 세력으로 규정하고 폄하하고 있다. 특히 박근혜 정권의 실패를 우익 및 보수 전체의 치부로 만들었으며, 대한민국 정치와 사회 내부에서 진보와 보수를 이분적 시각으로 분류하고 선 악의 대결로 몰아가고 있다. 87년 이후 권력 차지를 위한 싸움으로 인해 청산하지 못한 독재 잔재 세력들 또한 우익과 보수의 한 덩어리로 만들어 악의 대명사로 만들었다. 지금의 잘못된 폐단과 정치적 오류나 실수는 모두 현재 보수라 불리는 세력들의 결과라고 이야기한다. 그들은 자신들 진보 정권의 시작이었던 과거 호남과 DJ세력 또한 정권 창출을 위해 독재의 잔재였던 김종필과의 야합은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386세대들의 정의는 독재 및 군부 정권이 막을 내린 이후부터 자신들의 정권 유지와 권력 차지에 대한 욕심으로 시작이 비뚤어져 있었다. 그리고 진보 보수를 떠나 그들 세력들의 공통된 특징은, 결과를 상황에 따라 해석하는 "내로남불"의 정의이다. 모든 해석은 자의적 해석으로 정당성을 부여하고, 타인의 행동은 보편적 가치관과 절대적 선 악의 싸움에서 악으로 치부하는 가변적 정의를 절대적 정의라고 주장하는 세대이다.
현재 대한민국 기성세대들과 기득권층의 구성은 87년을 중심으로 나누어진 두 세력이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의 민낯은 과거를 단절 시키지 못했고, 권력의 욕심으로 인해 민주주의 기반을 만들지 못했음에도 반성하나 없고 자신들이 진리이고 선인 양 행동하는 위선자 집단이다. 87년 6.29 선언 이후 두 세력이 분리되어 권력 다툼을 하지 않고 선의의 경쟁과 협의로 독재 잔재를 청산하고 인적 쇄신을 단행했다면 최소한 박근혜 정권의 탄생과 제2의 독립과 같은 국민들의 노고였던 추운 겨울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오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386세대 그들은 아직도 자신들만의 노력으로 지금의 대한민국이 민주주의를 실행할 수 있으며, 독재와 군부 정권의 막을 내린 것은 자신들의 희생과 저항의 결과로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 대한민국에서 기득권은 자신들에게 있고 그것을 누리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다.
진실을 비추는 거울이 있다면, 지금 386세대 들 특히 진보와 보수라 자칭하는 기득권 세력인 그들에게, 거울에 비친 자신의 진실 된 모습을 보여 줬으면 한다. 과연 거울에 비친 자신들의 민낯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들을 진실의 거울에 비추면 어느 누구도 눈동자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들의 눈동자는 진실을 볼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에 거울에 자신의 눈이 없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지금 기득권이면 기성세대들인 386세대들의 민낯은 위선을 통한 거짓 된 정의와 진리를 외치는 양치기 소년과 같다. 그들은 에고이스트 이면서 나르시시즘에 빠진 사이코패스로 보인다.
<1> 대한민국 사회에 보수와 진보의 형성은 1987년 이후의 민주화 과정에서 생겨난 아이덴티티이다.
<2> 현재 민주당, 자한당으로 분리되고 대립되는 두 세력은 과거 독재에 대항한 투쟁 세력의 한 몸.
<3> 87년을 중심으로 민주주의 제도 정착. 386세대의 정치 세력 다툼으로 지역 위주의 정치 형태가
정착되었으며, 정치권력 차지를 위해 분열된 386세대는 각각 독재 잔재와 결합.
<4> 민주주의 기반의 붕괴와 박근혜 정권 탄생은 지금의 386세대 민주당, 자한당의 책임이 크다.
<5> 386세대의 부정이 지금 한국 사회의 부정과 부패를 만들었음. 현재 우리 사회에 문제에 대한 책임
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국민의 힘으로 이루어낸 6.29 선언을 자신들 세대의 승리의 전유물로 착각.
- 도덕은 무엇인가? 도덕은 사람에게 있어서 각 개인의 주관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최소한의 양보할 수 없는 선의의 가치이다. 도덕은 객관적 잣대로 재기는 힘들다. 지구 상에 있는 많은 종류의 사람과 각 개인들이 도덕이라는 가치관을 성립하고 구축하기 위해서는, 선험적인 경험과 소속된 조직 내부에서 만들어진 문화와 환경 및 가치 기준을 받쳐줄 지식의 획득 및 축적이 필요하다. 도덕적 기준은 개인의 환경과 경험을 토대로 주관적 관점에서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가치나 행동을 기준으로 삼는다. 어떤 사람이든 환경과 위치에 관계없이 자신만의 도덕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 가치가 타인에게는 악으로 보일 수도 있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선한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래서 도덕은 주관적 가치이다. 도덕에 대해 논의를 하거나 이야기를 할 때는 자신만의 기준으로 평가하거나 바라봐서는 안된다. 도덕은 각자 개인이 가지는 최소한의 선한 가치이며 이 도덕의 형성은 유전적이거나 선천적이지 않다. 그리고 개인적 선은 보편적 선이 아니다. 도덕의 개인적 선이라는 것은 판단하는 개인이 가진 경험과 환경 및 기준에 의해 결정된다. 도덕의 형성에 대해 영향을 끼치는 가장 큰 요소는 가족과 종교 및 자라온 환경에 의해서, 논리적 사고가 가능한 시점까지 지식과 경험에 의해 결정되고 만들어진다. 그 이후 새로운 기준을 만들기는 굉장히 어렵다. 최초 형성된 자신의 판단 기준과 선과 악의 구분 조건에 대한 변화는 평생을 살아가는 자신의 뿌리와 같다. 그 뿌리를 바꾸고 변화 시키기 위해선 자아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고 굳어버린 가치관을 새롭게 만들기 위해선, 우선 자신을 부정하는 모순의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 도덕적 기준이 정해진 이후의 삶 속에서 인간 개인의 변화를 유도하고 가지고 있는 기준과 가치관의 변화를 만드는 것은 자기 모순에 빠지는 악몽을 경험하거나 아니면 기억상실이나 죽음과 비슷한 경험을 하지 않는 이상 힘들다. 그만큼 도덕이란 유전자에 각인된 명령과 같이 강력한 자기 통제 수단이기도 하며,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개인이 선택을 하는 기준의 첫 번째 고려 요소 이기도 하다. 인간은 어느 순간을 기준으로 사회에서 자신의 행동과 표현에 대한 기준을 정하고 행동하게 된다. 그 순간이 빠를 수도 있고 아니면 늦을 수도 있다. 그러나 기준이 정해지는 순간은 자신을 중심으로 한 선과 악의 기준이 명확해진다. 그래서 개인의 도덕은 보편적 선을 지향하기보다는 개인의 경험과 사고의 방법에 따라 다른 기준과 행동 양식을 가진다. 도덕은 주관적 관점이고 주관적 가치이다.
개인의 도덕은 그 개인의 과거와 지금을 표현하는 주관적 기준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사회에 도덕적 기준을 세운다. 그럼 사회가 세운 도덕적 잣대와 기준은 개인의 도덕적 기준과는 어떻게 다르고 어떻게 형성되는 것일까? 개인의 도덕이 주관적이라면 사회적 도덕의 기준을 형성하는 과정은 복잡하고 난해한 문제를 가질 것이다. 그 기준이 사회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기득권 층의 권력과 이익에 반하는 경우 필연적으로 법이라는 기준과 만나게 된다. 인류 학자나 사회 학자들은 사회와 조직의 변화에 가장 늦게 대응하는 것은 바로 법이라고 했다. 그것이 법이 가지는 장점이자 단점인 것이다. 이런 많은 이유로 법은 변화하고 발전하는 과정에 있는 사회에서는 이율 배반적인 형태로 존재하게 된다.
법은 보수적이다. 그리고 법은 최후의 보루이며 변화보다는 안정을 위해 존재한다. 사회가 그리고 조직의 소속원 들 간의 지켜야 할 최소의 규칙이긴 하나, 법을 지키는 것 만으로는 사회는 변화 발전할 수 없다. 법은 변화된 사회의 결과를 보여주는 명시적 형태의 알림 장치이지 사회 공통의 도덕적 기준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회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법 이전에 그 사회가 가지는 패러다임을 변화 시킨다. 패러다임의 변화의 과정은 사회 내부의 공통된 도덕적 기준의 변화를 통해 이루어지고, 개인 대다수의 인식의 변화를 통해 여론을 형성하고 서로가 지켜야 할 선한 도덕적 기준으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낸다. 새로 만들어지고 동의한 사회 공통의 도덕적 기준은 법 이전에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지켜야 할 중요한 기준이 되며, 특히 기준의 적용은 기득권과 지배 계층에게 강력한 제재의 하나로서 작용한다. 사회에 안정적 기준이 형성되면 정치의 시스템을 통해 과거의 낡은 법을 폐지하거나, 새로운 법을 만들어서 법제 화하고 제도로서 받아들인다. 이런 과정을 통해 사회는 변화하고 발전한다. 사회 공통의 도덕적 기준이야 말로 그 시대의 구성원들이 원하고 합의한 이상적인 룰이다. 새로운 도덕적 기준이나, 사회에 형성된 기존의 도덕적 기준은 구성원 대다수의 동의와 합의를 통해 형성된다. 그 속에는 그 시대의 사회가 가진 불합리와 대다수 민중들의 열망과 요구가 들어가 있다. 그에 반해 법은 사회 구성원들 간의 중재와 통제를 위해 강제성을 가지는 제도이고, 개인이나 사회에 대한 피해의 방지와 사회의 안전 및 유지 목적을 위해 작용한다. 법으로 제정되고 만들어지면 위반을 할 경우 그에 대한 처벌이나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다. 그러나 합의된 사회 공통의 도덕은 위반을 하더라도 강제 제제나 위반자에 대한 형벌을 가하지 못한다. 위반자에 대해서는 주로 여론을 통한 공격이나 행동에 대한 공개 비난을 통해 성토의 형태로 이루어진다.
사회 공통의 도덕적 기준은 어떻게 형성이 될까? 사회는 기본적으로 지키려는 보수와 변화를 추구하는 진보 세력들 간의 충돌과 합의를 통해 발전한다. 이 과정은 인류 역사 이래 불변의 법칙으로 작용하며, 보수는 사회의 기득권이나 기성세대들이 가지는 현존하는 사회 규칙이며 주로 법제 화 되거나 또는 관습이나 전통이란 단어로 이루어진다. 진보는 사회가 가진 불합리하다고 판단되는 부분에 대해서 또는 그 시대의 가치의 변화에 호응하여 나타난다. 진보는 얼핏 보기에는 사회와 대립하고 갈등 하는 구조를 지닌 것처럼 보이나, 내면은 보수의 부족한 부분이나 자생적 발전이 없는 경우 진보적 사고와 행동을 통해 발전하는 원동력을 제공한다. 이런 과정에서 사회나 조직의 공통된 도덕적 기준 또는 합의된 규칙들은 보수적 관점에서는 안정된 사회 유지를 위한 제도와 장치로서 존재하고, 진보적 관점에서는 시대 가치의 변화에 맞춰서 변화하고 지향해야 될 제도와 장치로서 존재한다. 개인의 도덕적 가치가 사회 공통의 도덕적 가치로 승화 하기 위해선, 사회를 구성하는 구성원들의 대 다수의 인식이 동일한 가치 기준을 가져야 하며 구성원들이 시대의 도덕적 기준으로 인정하여야 한다. 도덕적 기준으로 인정된 사회 공통의 가치는 사회 구성원 대부분이 지켜야 할 아젠다로서 존재하며, 공통된 도덕적 기준은 정치 및 경제, 연예계 등 사회에 영향을 끼치는 공인들과 인플루언서들에 대한 평가의 기준이 되며, 일반 구성원들에 비해서 평가의 기준과 영향은 보다 엄격하게 적용되며 평가의 결과는 사회에 보다 큰 파장으로 영향을 끼친다. 그리고 법제 화 되거나 룰이나 규칙으로 지정되기 전의 공통된 도덕적 가치는 진보의 사회 가치로 보아야 하며, 소수 구성원들의 불만과 그들이 가지는 도덕적 가치의 평등 기준으로 인해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진보의 가치로 시작된 작은 가치는 사회 내부의 다른 존재와 조직들과의 연대와 연계를 통해 성장하고, 처음 형성된 기준이 연대와 연합을 통해 성장하면서 사회 내부의 새로운 담론으로 부상한다. 성장한 담론은 법제 화를 목표하거나 공인된 사회의 룰과 규칙으로서 인정받기 위해서 기존 보수의 이념과 가치와 대립하거나 상호 호응하는 단계를 거치게 된다. 성장의 단계를 거친 후 사회 조직 내에서 인정받는 도덕적 기준이 되면, 기존 보수적 가치와 이념을 가진 법이나 규칙은 사장 되거나 새로운 도덕적 기준이 된 공통된 가치에 편입이 되고 진보적 가치를 가진 새로운 가치가 보수적 가치로 사회 내부로 자리 잡는다. 사회 공통된 가치는 새로운 보수적 가치를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진보적 가치를 탄생 시키고 발전시킨다. 하나의 사회가 보수적 가치가 우선 되느냐 아니면 진보적 가치가 우선 되는가? 의 문제는 사회가 어떤 형태로 존재하고 있고 어떤 단계의 변화를 가지고 있는 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사회가 발전과 지속적인 성장의 단계의 상황이라면, 즉 사회가 경제나 정치 및 문화적인 관점에서 역동적이고 꾸준한 변화와 탈피를 진행 중에 있다면, 그 사회는 보수적 가치가 우선되는 경우라 볼 수 있고, 반대로 사회가 정체되고 정치, 경제, 문화적 관점에서 비 역동적 이면서 변화하지 않는 경우는 내부적으로 진보적 가치가 성장하고 활동하기 쉬운 상태라 볼 수 있다. 역설적으로 보수적 가치는 유기적 생명체와 같은 사회 조직의 활동성과 관련이 있다. 자신이 속한 사회가 변화하고 발전적이며 역동적이라면 사회에 새로운 변화와 가치 기준의 평가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사회는 기존의 가치를 존중하면서 지속되기를 바란다. 반대로 비 역동적이고 변화가 없으며 발전이 없는 사회는 구성원들이 불만이 내부의 변화를 요구하게 되고, 불만과 발전에 대한 욕구는 새로운 가치의 도입과 변화를 위한 요구가 표출된다. 그런 요구는 구성원들의 진보적 사고에 대한 원동력을 제공하고 사회 조직은 진보의 가치를 새로운 가치로 인정하고 도덕적 기준으로 삼는다. 공통된 도덕적 기준이란, 개인의 관점에서는 주관적 관점이다. 그러나 사회가 공통된 가치를 가지는 형태는 그런 주관적 관점이 모여서 하나의 지향점을 향해 나아갈 때 만들어진다. 그리고 사회가 보수적 가치를 우선 시 하느냐 아니면 진보적 가치를 우선 시 하느냐는, 내가 속한 사회의 현재 상태에 따라 변화하며 이에 따라 보수적 사회인가 진보적 사회 인가가 결정된다. 사회 조직의 형태가 결정되어지면 자연스럽게 사회 공통의 도덕적 기준 또한 정해지고 이는 사회 구성원 전체가 지켜야 할 도덕적 기준이 되고 거대 담론으로 자리 잡는다.
그럼 현재 대한민국의 상태와 기성세대들 및 기득권 층에 대한 진단을 해보자. 현재 대한민국 기성세대와 기득권 층의 민낯은 독재 정권과 군부 정권의 몰락 이후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 파벌과 지역적 세력으로 분리되어 대립하고 싸워왔다. 민주화 과정의 하나로서 독재 정권과 군부 정권 산하의 잔재 세력에 대해서 정치적 청산을 진행해야 했으나, 정치 권력을 향한 두 세력의 욕심으로 정치 청산을 마무리 하지 못했다. 두 세력은 자신들의 정권 집권을 위해 독재 세력과 연합 하거나 야합 하는 과정을 거쳤고, 아직도 대한민국 내부에는 당시 독재 세력의 잔재와 정치인들이 존재 한다. 광복 이후 친일 청산을 하지 못하고 일제 강점기 당시의 친일 세력을 광복 이후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정부 조직의 일원으로 이용하던 상황과 비슷하게 전개 되었다. 87년 6.10 항쟁은 점차 거세지던 민주화의 열망이 국민들 전체의 열망으로 진화하여 투쟁한 결과이다. 6.10 항쟁을 위해 피를 흘리고 쓰러졌던 당시의 민주 투사들과 열악하지만 민주화를 위해 몸을 던지던 지역의 작은 투사들을 기억한다. 그들의 열망이고 염원이던 민주주의 정치의 시작과 희망과 꿈을 우리는 아직도 기억한다. 87년 6.10 항쟁의 과정과 결과는 독재와 군부 정권에 대항해 맞서 싸우고 피를 흘린 이들이 386세대 만은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다. 386세대는 학생 신분과 사회 초년생으로서 보다 치열하게 저항하고 민주화를 위해 희생을 했던 것은 사실이다. 민주화의 열망과 대한민국 경제와 문화 발전에 대한 변화의 변곡점이 386세대에 맞춰져 있던 것일 뿐, 대한민국 대 다수의 국민과 민중들은 독재의 청산과 군부 정권에 저항한 투사들 중의 한 명이었다. 87년 이후 90년대 초반의 민주화 과정에 참여했던 세대 들 중 60년생이면서 80년대 학번이고 20대 후반 및 30대 초반의 나이를 가진 세대는 386세대라 불리는 지금의 기득권과 기성세대였던 것이다. 대한민국은 80년을 기점으로 경제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고 국가와 정부 주도 하에서 기적적인 성장을 이루었다. 경제 성장을 기반으로 86년 아시안 게임과 88년 서울 올림픽을 개최하였으며, 국제 사회에서는 국가의 위상이 해가 다르게 올라가고 있었다. 경제 발전은 국민들의 교육의 수준을 높였고 문화적인 변화와 사회의 가치 기준에 대한 변화를 가져 오게 하였다. 교육의 수준 향상은 국민들에게 계층 향상과 신분 상승의 사다리 역할을 하게 만들었으며, 교육을 통해 사회 내부의 불공정과 불합리한 제도를 인식하게 되었고, 독재와 군부 정권에 의한 정치의 문제와 경제 발전으로 인한 부의 불균형에 대해서 깨닫고 새로운 인식의 변화를 가지게 되었다. 그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세대가 시기적으로 386세대이며, 국민들의 교육에 대한 높은 의지로 인해 시대의 주역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87년 6.10 항쟁의 출발점과 민주화를 이끈 6.29 선언의 결과는 386세대의 학내 투쟁과 노동 운동을 통한 국민들의 의식 개혁을 통해 이루어 졌다. 386세대가 대한민국 정치와 사회에 대해서 자신들의 희생과 노력을 통해 민주화를 이루고 과거 보다는 나은 사회를 만드는 과정에 기여를 한 부분은 일부 인정을 할 수 있다. 단지, 민주화를 이루어낸 과정과 노력이 오롯이 자신들 만의 힘으로 이루어 졌으며, 자신들 만이 민주주의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그 생각에 대해서는 동의 하지 못한다. 오히려 87년 이후 정치 민주화 과정에서 자신들의 권력 욕심으로 독재, 군부 정권 잔재 들에게 5년의 시간을 빼앗긴 것에 대해서는 반성의 기미도 없으면서, 촛불 혁명을 통해 새롭게 만들어낸 대한민국의 주인으로서 또는 리더로서의 기득권과 특별한 선민 의식 만을 가지는 행태는 정말 볼 수 없을 정도다. 촛불이 타오르고 새로운 대한민국에 대한 열망은 국민들 하나하나의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나라와 사회에 대한 걱정과 정의로운 사회를 위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과거 청산하지 못했던 세력들이 보수라는 이념을 등에 없고 사회 중심에서 정치를 하고, 대한민국 사회에서 주류로서 행동을 할 때 정권 집권과 유지를 위해 아귀다툼 하던 사람들은 대체 누구였단 말인가. 민주주의 중심이라고 외치고 시대의 혁명을 이루어 냈다고 자부하는 386세대 당신들이다. 87년 6.10 항쟁의 결과로 직접 민주주의가 실현이 되었다. 대한민국 사회 내부와 외부에서는 앞으로 펼쳐질 민주주의에 대해서 국민들은 커다란 기대와 희망을 품고 있었다. 반 독재와 군부 정권 타도를 외쳤던 민주 세력들은 서로의 협력을 통해서 과거 독재, 군부 세력의 후예와 잔재들을 청산하고 새로운 민주주의라는 운동장을 미래 세대와 대한민국 후예들을 위해 다지고 기둥을 세워 놓아야 했었다. 독재와 군부 정권의 잔재 세력들을 청산했다면 보수라 불리는 세력들에 의해 10년 간의 암울했던 민주주의 정치의 공백기를 겪지 않았을 것이며, 추운 겨울날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와 민주주의를 되찾기 위한 힘겨운 노력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386세대는 청산 되지 않은 과거 친일의 후손에 대해서는 날카로운 비판과 공격을 가하면서, 청산할 수 있었지만 청산하지 못했던 독재 군부 세력과 그 잔재 세력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들이 권력에 대한 욕심으로 동지로 삼았던 대상 이었고, 지금도 자신들과 정치적 이해와 권력 유지를 위한 협력의 대상이기 때문일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 기성세대이며 기득권층인 386세대는 겉으로는 사회 공정성과 불평등에 대한 변화와 개혁을 이야기 하지만, 이면에는 자신들은 기득권 계층이고 대한민국 계급 속에서 특권층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87년 6.10 항쟁의 중심이었던 과거를 바탕으로 아직도 정의는 자신들에게 있다고 믿고 있으며, 정의라는 이름 하에 진보와 보수의 구분을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나눈다. 과거 진보적 식견과 견해를 가졌던 386세대는 지금은 사회 기성세대로 존재한다. 시간의 흐름은 진보주의자였던 세대를 사회의 기성세대로 변화 시켜 새로운 보수 세력으로 만들어 냈으며, 지금 사회 중심에 있는 386세대는 우리 사회의 기득권 층으로 올라섰다. 정작 자신들은 기득권 층이 아니라고 스스로 믿고 있으며 아직도 진보의 중심으로서 시대 변화에 대한 의무와 권리를 가진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런 자신들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이미 몰락해 버린 과거의 보수 세력을 최대의 적으로 규정하고 거짓 된 위선과 꾸며진 정의를 부르짖는 무서운 세대로 변하였다. 자신들이 행하는 기득권의 행사는 정의로운 행동으로 포장하고, 사회 안에서 발생하는 불공정하고 불합리한 현상이나 문제는 보수라 불리는 이름 없는 세력들의 악한 행동에 의한 결과로 몰아붙인다. 그들의 도덕은 자신들을 향한 잣대는 아니다. 그들의 도덕적 잣대는 적이라고 불리는 자신들의 반대 세력을 재단하기 위해 필요한 기준으로서, 사회 정의라는 이름으로 휘두르는 칼이 되어 있다. 그 칼은 자신과 자신들 진영의 세력과 사람들에게는 털끝 하나 건들지 않으면서 적이라고 규정되어 지거나 또는 반대되는 세력들에게는 가차 없는 심판의 칼날을 들이댄다. 진보의 가치는 법과 사회가 정한 규칙이나 룰에 대해서 시대의 정신이 변화를 요구할 때 앞에서 이끌어가는 가치이다. 진보는 사회가 가지는 기존의 규칙과 법과는 대립이 되거나 또는 새로운 기준을 가질 수 밖에 없다. 변화의 요구에 대응하고 변화를 이끌어 내는 것이 사회 속에서 진보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지금 386세대는 어떤가? 자신들과 적대하거나 대립 되는 세력에 대해서는 진보의 이름으로 도덕적 잣대를 기준 한 칼날을 휘두르고 있다. 그런데 같은 문제가 자신과 자신의 세력에게 발생하면 그들은 하나같이 똑같은 변명을 가지고 대응한다. 그것은 바로 현재 실정법을 어기지 않았다는 변명이다. 자신과 자신의 세력의 행동으로 사회 대 다수의 국민이나 민중들이 자신들을 공격할 때, 그들이 내놓는 대안과 핑계는 누구나 동일하다. 변화된 진보의 도덕적 가치는 아랑곳 하지 않고 법을 위반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도덕적 흠결을 감출려고 한다. 이런 행동과 이유를 대는 것은 386세대는 이미 시대의 보수라는 증거이며, 변화된 사회의 도덕적 가치 기준을 불편해 하는 것은 자신들 스스로가 현재 법의 기득권을 누리는 계층이라는 증거이다. 그들의 법을 기준으로 하고 사회 룰을 핑계 삼는 행동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단지 진보라는 가치를 주장하면서 자신들의 안위와 위치를 다지기 위한 방법으로서 진영 싸움을 이끌고 가는 것이 불편하고 보기 힘들 뿐이다. 스스로 인정을 하지 못할 뿐 사회 구성원들 대부분은 지금 세대의 기득권과 기성세대는 386세대임을 인정한다. 그들의 도덕은 이미 법의 테두리 안에 있으며 그들의 도덕적 잣대는 어느 시대나 사회가 그러하듯 기득권 층이 가지는 모습과 형태를 닮았다. 그리고 그들이 부르짖는 정의는 철 지나고 빛 바랜 그림처럼 변하였다. 변화하지 못하는 진보는 자체로 보수화 된다. 과거의 진보적 가치는 과거 속에서 진보적 가치로 존재할 뿐 지금 시대의 진보적 가치는 다른 형태와 모양을 가지고 존재한다. 그리고 진보적 가치만이 도덕적 우위에 있는 가치는 아니다. 기형화된 한국 사회와 정치 구조로 인해 보수의 평가와 기준이 잘못되어 오래도록 보수는 악한 존재이고 항상 부도덕한 존재로서 평가 받아왔다. 그러나 시간은 이미 많이 흘렀으며, 촛불 혁명을 기점으로 과거 보수라 불렸던 존재들 또한 이 땅에는 이미 사라졌다. 물론 아직 정치권에는 과거의 영광을 이야기 하는 제 정신이 아닌 사람들도 존재한다. 그러나 그들이 존재한들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은 거의 없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공통된 도덕적 가치를 세우기 위해서는 건강한 보수를 다시 세우는 것이 아니다. 진보라 자칭했던 지금의 기성세대들과 기득권 층이 건강하고 합리적인 보수로서 자리를 잡고, 새롭게 자라나는 젊은 세대들을 시대의 새로운 진보로 인정을 하고 소통을 통해서 사회 공통의 도덕적 가치에 대한 합의를 만들고 세워 나가는 것이다. 386세대는 지금의 모습대로 자신들을 법의 뒤편에 숨기고 권력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 보수 세력을 만들어 낸다면, 그들 또한 젊은 세대들로부터 똑같은 취급을 받게 될 것이다. 이미 지난 과거의 피해 의식을 통해서 현재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 해서는 안된다. 지금의 386세대는 그들이 혐오하던 과거의 보수와 모습이 닮아가고 있다. 존재하지 않는 보수를 찾지 말고 지금의 중심 세대를 보수로 인정하는 지혜와 용기가 그들에게 필요하다.
<1> 개인의 도덕은 주관적이며, 환경과 지식의 영향을 받는다.
<2> 한번 형성된 도덕적 가치의 기준은 변화하기 힘들다.
<3> 개인의 도덕적 기준은 주관적 관점에서는 선이나, 타인의 관점에서는 선도 악도 될 수 있다.
<4> 개인의 도덕적 기준으로 사회 공통의 도덕적 기준을 만들기 위해서는 시대의 이념과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5> 사회 공통의 도덕적 기준은 법과의 관계는 이율배반 적일 수 있으며, 주로 진보적 가치를 가진다.
<6> 대한민국의 도덕적 가치는 87년 6월 항쟁을 기준을 나누어 진다.
<7> 386세대가 6월 항쟁의 주역이기는 하나, 그들만의 역사적 사건은 아니다.
<8> 현재 대한민국 사회에 기득권과 보수는 386세대이다.
<9> 과거에 얽매어 진보임을 주장하는 386세대는 과거의 보수라 불리는 세력과 닮아간다.
<10> 보수를 새로이 세우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기득권인 386세대가 보수로서 진보와 소통하고 대한민국 내부에서 새로운 사회 공통의 도덕적 가치를 만들어야 한다.
- 현재 대한민국은 진보라 불리는 386 세대들이 정권을 잡고 있다. 그러나 많은 곳과 부분에서 사회 구성원들과 마찰이 일어나고 있으며, 이념의 괴리가 발생하고 있다. 특히 기득권이면서도 과거 기득권을 배척하고 그들의 행동을 비판하던 당사자들이 지금 자신들의 행동에서 발생한 잘못으로 인해 사회적 지탄을 받고 있다. 물론 그 원인은 당사자들이 제공한 것이 맞다. 특히 이번 정권은 과거 정권의 잘못으로 인한 반성으로 부터 시작 되었다. 그 잘못의 원인은 대부분이 도덕적 문제이며, 공정하지 못한 과정과 자신들 만의 세상을 위한 행동으로 부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정권의 대 다수 또는 전원은 그런 과거 정권을 비판하고 정의로운 도덕의 칼날로 적폐청산 이라는 칼날을 휘두르고 있다. 기울어지고 잘못된 방향의 정치와 사회를 바로 세우고, 잘못된 정책과 편견으로 인해 피해를 받았던 국민들에게 정의와 자유로움 그리고 공정함을 약속하는 행동의 결과물이다. 그래서 이번 정권을 우리는 "촛불정권" 이라고 부른다. 이번 정권의 모토는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평하며 결과는 정의로운 사회"를 목표로 하고 있다. 그 뜻은 이 세상의 유토피아를 우리 사회에 세우겠다는 것과 같다. 이데아를 목표로 한 만큼 권력을 이용해서 정치를 하고 정책을 만드는 사람들 또한 정의로우며, 공평하고, 평등한 세상을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일 것이라고 국민들과 민중은 생각했다. 그렇게 정의라는 도덕적 잣대를 사회 공통의 기준으로 삼아 과거의 권력자와 위정자들을 처단했고, 사회의 잘못된 부분들을 바로잡기 위한 대통령의 노력에 국민과 민중들은 호응으로 대답을 해주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 수록 자신들이 내비쳤던 이상과는 점점 멀어지는 현실과 과거 자신들의 혐오의 대상이었던 세력들과 닮아가는 모습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 했고, 결국은 부르짖었던 정의로운 사회와 과거 적폐청산 마저 위선을 가장한 도덕적 가식의 모습처럼 비치기 시작했다. 그와 더불어서 정책을 만들고 진행하는 장관이나 차관 등 요직의 사람들의 인사 문제는 지금 정권이 우리의 희망과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는지 의구심이 들도록 만들었다. 아무리 좋은 칼도 가진 자의 의도에 따라 요리를 위한 칼이 될 수도 있고, 사람을 죽이는 살인자의 칼도 될 수 있다. 결국은 정책을 만들고 진행하는 사람에 따라서 똑같은 정책과 제도라도 그 진의가 바뀔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렇기에 국가의 정책을 움직이는 사람들에 대한 평가는 보다 더 냉정해야 하고 자세하게 검증되어야 한다. 그런 인사 검증 과정에서 애초 정부가 내세웠던 4대 불가론은 이미 무용지물 되고 폐기 되었으며, 과거 부패 정권의 장관이나 요직의 인물들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사람들로 채워지기 시작 했다. 그리고 인사를 위한 청문회 과정에서 자신들이 과거 이야기 했던 적폐와 사회 불의에 대한 이야기는 어느덧 법의 테두리 안에서 합법이라는 이름으로 가장했고, 도덕적 가치 또한 법의 범위 안에서 적용하는 기준이 되었다. 설령 과거 법 위반 사실이 드러나더라도 그것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작은 잘못처럼 포장하기에 급급했다. 결국은 이번 정권 또한 국민과 민중들이 원했던 평등과 공평 그리고 정의는 머나먼 나라의 이야기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현재 정권은 자신들의 이익과 권력 유지를 위한 정책과 제도의 시행 만을 목표로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아직도 자신들은 진보라 이야기 하면서 필요할 때는 진보의 도덕적 가치를 내세우고 불리할 때는 과거 부패했던 정권과 비교하는 이중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 지금 대한민국 국민과 민중들은 세계에서 1등 국가를 만들어 달라는 게 아니다. 그리고 모든 국민이 다 잘 사는 그런 세상을 만들어 달라는 것도 아니다. 단지 과거에 편향된 정책을 바로잡고, 그동안 사회 기득권들이 누렸던 권리와 부당한 현실을 조금만 바로 잡아 달라는 것이다. 누구나 똑 같이 벌고 누구나 똑 같이 쓰고 누구나 똑 같은 권리와 혜택을 주는 사회주의 국가를 만들어 달라는 것이 아니라, 조금은 지금보다 나은 벌이와 가족과 가끔은 밖에서 여유롭게 저녁을 먹을 시간과 작은 돈, 아플 때는 내 주머니 사정과 크게 관계없이 병원에 마음 놓고 갈 수 있는 그런 세상을 조금만 보여 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세상은 살인자의 손에 쥐어진 칼로는 요리를 만들지 못하듯이 부패와 기득권을 누리던 사람들은 만들지 못한다. 우선 지금 정부에게는 정책의 결과와 무관하게 정책을 입안하고 진행하는 사람들을 조금 정의로운 사람들로 채워 달라는 것이다. 인간의 능력은 서로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건 정책을 진행하는 사람의 마음 가짐에 따라 정책의 결과와 방향이 많이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능력이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살인자의 손에 쥐어진 칼은 살인을 위해서 쓰이고 요리사의 손에 쥐어진 칼은 요리사를 위해 쓰인다. 우리는 요리사에게 칼을 쥐어 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