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7 come out and play - billie eilish
https://youtu.be/iPyGdP0kvAU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 수플레의 곡은 이 맘 때쯤 딱 어울리는 노래입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어둑어둑한 겨울 아침. 따뜻하고 포근한 이불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꼼지락 거리는 발가락. 빼꼼 내민 코 끝에 닿는 시린 겨울 아침 공기. 이불 밖으로 손을 뻗었을 때 손이 닿는 곳에 따뜻한 커피가 한 잔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그런 겨울 아침이 떠오르는 노래예요.
수플레 독자 분들에게 올해는 어떤 한 해였나요?
저에게 올해는 나 스스로를 가장 잘 알게 된 한 해였어요.
나에 대한 불확신이 요동치던 한 해의 시작부터, 지금 이 순간 나 스스로가 너무 마음에 든다고 말할 수 있는 지금까지, 감정과 생각들을 서두르지 않고 조금씩 정리하다 보니 한 해가 어느새 흘렀더라고요.
그 과정에서는 어느 때보다 나 자신을 애정을 가지고 들여다보고, 뜯어내고, 깊게 관찰했던 시간들이 있었어요. 오랫동안 내가 되고 싶던 모습이 어느새 내 모습이 되어 있는 걸 발견하기도 했고, 인정하기 싫어 애써 모른척했지만 이젠 쿨하게 인정하게 되는 내 모습도 있었구요.
그래서 저에겐 올해가 유난히 기억에 많이 남을 것 같아요.
올해 초, 이십 대의 마지막 한 해를 어떻게 보낼까 궁리하던 나에게 불안함 한 덩이를 안겨준 건 동생이 불쑥 내민 심리 검사 하나였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본인이 느끼는 감정 유형을 알아보는 '성인 애착 유형 검사'. 어렵지 않게 검사를 끝내고 받아 든 결과는 생각과는 다르게 다소 충격적이었다.
공포 회피형 불안정 애착.
이 유형의 특징은 자기 부정-타인 부정형. 다른 사람과 가까워지면서도 상대에게 상처를 받을까 봐 쉽게 의지하지 않는 유형이라고 했다. 이름부터가 공포스러운 진단명을 보고 있으니 전혀 예상치 못했던 불치병을 선고받은 기분이었다.
이 결과가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성인 애착 유형은 어린 시절 가족과의 관계에서 형성되는 부분이 크다는 것 때문이었다.
남이 보기에도 내가 느끼기에도 큰 우여곡절 없이 평범한 집안에서 사랑받으며 잘 커 왔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는 걸까? 마치 지금의 나라는 사람을 만들어 온 새끼줄이 나도 모르는 과거 어딘가에서부터 꼬여 있었던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이런 유형이 나오게 된 이유는 뭘까, 며칠을 고민하며 나는 원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따뜻했지만 다소 엄했던 부모님, 늘 보이지 않는 경쟁을 할 수밖에 없었던 친구이자 라이벌이던 쌍둥이 동생, 가까워 보이지만 가부장적인 분위기가 남아있었던 대가족의 분위기. 그리고 그 속에서 너무 빨리 눈치 보는 법을 알아버린 어린 시절의 나.
전문가가 정확한 진단을 내린 것도 아니지만 그때부터 나는 내가 가진 문제들의 원인을 어린 시절에서 찾기 시작했다.
다소 강한 인정 욕구, 가족에 대한 애착,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 새로운 것을 찾는 나의 행동부터, 당장 지금의 회사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 친구의 성공을 온전히 축하해주지 못하고 있는 못난 모습까지.
그러자 이때까지 잘 살아오고 있다고 느꼈던 확신들에 힘이 빠졌다. 스물아홉이 되어서야 이것들을 알아채다니. 나는 조금 울적해졌다.
그렇게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심리 클리닉을 방문했다. 도대체 나라는 사람에게는, 정확히는 나라는 사람의 어린 시절에는 어떤 문제가 있었던 것인지 알고 싶어서였다. (올해 초 수플레에도 이 심리 검사에 대해 쓴 적이 있었다.)
1시간의 상담에서 나는 가족에 대해, 나의 어린 시절에 대해 이야기했다. 물론 기대했던 뾰족한 처방은 없었다.
마스크 위로 보이는 무덤덤한 눈으로 내 얘기를 듣던 상담 선생님은 '그리 문제가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혹시 좀 더 자신을 알아보고 싶으면 1-2번 정도 더 상담을 받아봐도 좋다'라고 얘기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 심리 상담 자체는 아무런 소득은 없었어.
심리 상담이 다 그렇다곤 하지만 말이야."
오랜만에 만난 친한 오빠에게 꺼낸 연초의 심리 상담 이야기는 여느 때와 비슷하게 마무리되었다.
심리 상담 자체를 통해 개선된 것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이후로 생각을 정리할 방법을 찾아보다 운동을 시작했고, 그러면서 신기하게도 점점 정신적으로도 좋아진 것 같다고.
내 얘기를 듣던 오빠는 자신은 예전에 불면증이 있었노라고 말을 꺼냈다. 밤마다 잠을 자려고 누우면 도무지 잠이 들지를 않고 다음 날 그 피로가 몰려와 하루가 온전히 흘러가지를 않았다고. 그러다 보니 학교 생활도 인간 관계도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 것 같았다고 했다.
견디다 못해 병원을 찾은 오빠는 의사에게 자신의 증상에 대해 털어놓았다. 이렇게 심각한데 약이라도 먹으며 치료를 받아야 하지 않겠냐는 오빠에게 의사는 뇌 초음파를 찍어보자고 말했다.
뇌 초음파? 그렇게나 내가 중증이라는 말인가? 사뭇 심각해진 기분으로 검사를 받고 나온 오빠에게 의사가 내민 결과지는 지극히 '정상'을 가리키고 있었다.
"보통 불면증이 있는 분들은 일상의 문제들의 원인을 잠으로 연결시키게 돼요. 일이 안 되고 집중이 안 되고 인간관계가 꼬이는 모든 문제가 '나의 심한 불면증'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죠.
저는 그런 분들에게 먼저 검사 결과를 보여드리곤 합니다. 본인이 의학적으로 문제가 없는 상태라고 먼저 인지시켜 드리는 거죠.
그럼 보통은 약을 먹지 않아도 괜찮아지는 경우가 많아요. 의학적인 방법이 아닌, 문제를 해결할 다른 방법을 스스로 찾는 거죠."
오빠의 얘기를 들으며 불현듯 떠오른 건 그날 심리 상담이 끝나고 받았던 자율신경계 검사였다. 울적하게 상담실을 나온 나에게 친절한 카운터 직원이 '자율신경계 검사는 무료니 한 번 받아보시라'고 권해 받아본 검사였다.
검사지의 여러 항목은 민망하게도 모두 '지극히 정상'을 가리키고 있었다. 검사지를 받아 들고 왠지 모르게 조금 가벼워진 마음으로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아, 나는 스스로 방법을 찾았던 거구나.
얼마 전, 동생과 카페에서 연말을 맞아 다이어리 정리를 하다가 오랜만에 성인 애착 유형 검사가 떠올랐다. 여전히 어렵지 않게 검사 문항을 하나하나 체크하며, 이제 나 좀 괜찮아진 것 같은데? 라며 새삼 개선되었을 결과를 기대하기도 했다.
그리고 받아 든 결과는 '공포 회피형 불안정 애착'.
한치의 오차도 없이 올해 초와 똑같은 결과가 떠 있는 휴대폰 화면을 보니 어이가 없어 껄껄 웃음이 났다. 나는 동생에게 화면을 내밀며 말했다.
"야, 어쩔 수가 없다. 그냥 이게 나야."
마음에 안 들고 인정하기 싫은 내 모습까지 '그래, 이게 나야'라고 인정하는 것이 어쩌면 가장 어려운 게 아닐까 싶어요.
그래도 마지못해 사랑스러운 나의 또 다른 어떤 모습에게는 '그래, 이게 나지!'하고 어깨를 툭툭 쳐줄 수 있는, 따뜻한 한 해의 마지막이 되길 바라며.
수요일의 플레이리스트(줄여서 수플레)'는 여섯 명의 브런치 작가가 매주 수요일마다 본인의 에세이가 담긴 음악을 소개하는 읽고 쓰는 라디오입니다. 잠들기 전 이름 모를 누군가가 추천해주는 노래를 듣고 싶으셨던 분들, 즐겨 듣는 노래에 다른 누군가는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궁금해본 적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매주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주시지 않을까 싶어요.
물론 음악에 조예가 깊거나 전문적으로 음악에 대해서 잘 아는 '음. 잘. 알'들은 아닙니다. 그저 음악을 좋아하고 혼자만 듣기엔 아까운 나의 플레이리스트를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들일 뿐이죠. 비가 오는 날엔 비 오는 날 듣기 좋은 음악을, 너무 추워서 어딘가에 숨고 싶을 땐 숨어 듣기 좋은 음악을 한 편의 글과 함께 나눠보려고 합니다. 글에 담긴 노래를 들으며 천천히 읽어 내려가시길 추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