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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윌마 Sep 23. 2020

그림 앞에 서는 것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언어


눈 앞에 상황을 표현할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해 죄 없는 머리를 쥐어뜯곤 합니다. 분명 느낌은 오는데 떠오르는 단어들은 죄다 2%가 부족하거든요. 코 끝은 간질거리는데 재채기가 나오지 않는 것 마냥 답답한 순간입니다. 끝내 답을 찾지 못하면 천재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그 유명한 말을 들먹였습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철학자로서 자신이 도달할 수 있는 궁극의 지점에 서서 침묵을 선택했던 그 역시 자신의 논고에 결정적 오류가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는 긴 침묵을 깨고 철학에 복귀했습니다.
나는 행복한 걸까?’
이 질문에 나는 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침묵했습니다. 실상은 침묵을 깨고 끊임없이 묻고 답을 해야 했습니다. 몰랐을 때는 보이지 않더니 알고 나니 이런 상황이 참 많았습니다. 사람을 모르고 사랑을 했습니다. 사람을 아느냐는 질문에는 침묵했습니다. 이해를 모르고 대화를 했습니다. 공감했냐는 질문에는 침묵했습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침묵했던 나는 어느새 말할 수 있는 것에도 침묵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미술평론가는 ‘그림을 본다는 것’은 그림과 첫 만남에서 받은 충격을 놓치지 않고 그것을 면밀하게 검토해서 자신의 소회를 밝히고 재해석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안목을 넓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화가 천경자(1924~2015)의 그림을 봤을 때 뭔가 느낌이 달랐습니다. 첫 만남이 아니었는데도 분명 충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느낌을 정확히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형체를 가질 만하면 흩어지는 구름처럼 말이 되지 못한 그 무엇을 찾으려고 그 날은 찾고 읽고 긁적이느라 긴 밤을 보냈습니다. 그림을 본다는 것, 흐르는 강물 같은 이 말이 살짝 어색했습니다. 한쪽으로만 흐르는 짝사랑 같은 느낌이었죠. 세상에 한쪽으로만 흐르는 강이 있을까요? 그림을 본다는 것은 그림을 보는 섬세함을 따라가며 내 삶도 같이 섬세해지고 섬세해진 만큼 풍요로워지는 느낌이 강합니다. 그런데 나는 그림 앞에서 말할 수 없어 침묵했던 그 무엇을 이해하고 싶었습니다. 내가 그 날 했던 일은 그림을 보는 것이 아니라 부름에 끌리 듯 그림 앞에 서는 것이었습니다. 서경식 선생님이 마음을 나눈 그림 앞에 서서 하신 말씀은 내가 찾던 바로 그 말이었습니다.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언어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그 날 이후 그림이 마음에 들어왔습니다. 그림 앞에서 자주 망부석이 되었습니다. 좋아지는 데는 별반 이유가 없었는데, 한번 좋아지고 나니 모든 것이 이유였습니다.


대화 중에 생각이 많아지는 지점에서 자주 말을 멈췄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세상을 쉽게 사는데 내 세상만 복잡한 것 같았습니다. 주위도 그러했지만 나 역시 궁극의 지점에 있을 내 말이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차마 말은 못 하고 글을 썼습니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 궁금해서 글을 썼고 글은 내가 꺼내지 못했던 말을 대신해 주었습니다. 생각은 밤하늘 별 같아서 샛별처럼 빛나기도 하지만, 아지랑이 같은 생각은 아무리 눈을 크게 떠도 어두운 하늘로 숨어들던 별처럼 흐릿하기만 했습니다. 일상에서 스치는 생각을 놓치지 않으려고 틈틈이 기록을 남겼습니다. 작은 발견에 지었던 미소, 목에 가시 같은 불편함의 정체, 무념무상의 순간에 떠오르는 생각, 블랙홀처럼 침잠하는 내면의 감정, 차마 말 못 할 부끄러움을 담았습니다. 한사코 흩어지려는 생각을 선으로 묶어 별자리처럼 의미를 가진 문장을 얻으면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습니다.


따로 놀던 생각을 씨줄과 날줄로 맞추면서 많은 변화를 만났습니다. 생각만으로는 찾기 어려웠던 부분이 극명하게 드러났습니다. 말이나 생각은 그릇에 담기는 것이 아니기에 앞뒤가 맞지 않아도 은근슬쩍 넘어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글이라는 옷을 입는 순간 부족한 부분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단절된 부위를 메우고 비워야 할 곳을 쳐내고 나서야 생각은 비로소 바로 설 수 있었습니다. 바로 선 생각에 기대어 글을 말처럼 쓸 수 있겠다 싶을 때쯤 글쓰기가 어려워졌습니다. 말하고 글을 쓰는 행위는 소통과 설득의 과정을 통해 결국은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일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에서 사람을 설득하기 위한 세 가지 요소로 로고스(Logos), 파토스(Pathos), 에토스(Ethos)를 들었습니다. 여기서 파토스는 감정이입과 동일시를 통해 상대를 설득하는 방식입니다. 정서의 교류가 원활히 진행되기 위해 먼저 마음의 물꼬를 튼 후에 잔잔하게 때로는 격양적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하는 사람의 사람됨을 뜻하는 에토스를 가장 높게 쳤지만 일상에서 사람들은 파토스를 많이 사용합니다. 로고스는 논리와 이성을 말합니다.
"소박하게, 그러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잘 이어간 글이네요. 아쉬운 건 글의 파토스가 없는 거예요. 물 흐르듯 하다가도 때론 굽이치는 부분이 있어야 하는데, 너무 잔잔하기만 한 거죠. 뭔가 허전해요. 그게 뭘까요?”
내가 쓴 글에 대한 평가는 내 삶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내가 대화에서 말을 멈춘 지점은 이성적 생각을 넘어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글쓰기가 어려워진 지점 역시 동일했습니다. 나는 좋다 싫다 같은 기본적인 감정을 표현하는데도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자주 사용하지 않으면 퇴화하듯이 내 안에서 감정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침묵했습니다. 내가 말할 수 없어 침묵했던 그 무엇은 바로 나의 진짜 감정이었습니다. 내가 쓴 글은 온전히 자신의 이유로 쓰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림은 억눌린 감정을 대신 표현해 주는 또 하나의 언어였습니다.


말과 글이라는 언어의 틀에서 벗어나 주위를 다시 보니 세상은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없는 것 투성이더군요. 언어로 정확히 표현할 수 없는 정보와 기능, 눈에 보이지 않는 관계 그리고 손에 잡히지 않는 감정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요? 인간은 현실이라는 우주에서 가장 큰 빅데이터를 경험하면서 감정과 이성에 눈을 뜹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관계가 탄생하죠. 엄마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한눈에 강아지와 고양이를 구별해 냅니다. 해와 달의 차이를 알아내고 표정만으로 사람의 마음을 이해합니다. 어둠 속에서 무서웠던 경험은 두려움과 연결되지만 실상은 불편한 것뿐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는 우리가 쉽게 얻어낸 것이 아닙니다. 오랜 학습과 경험을 통해 얻어 낸 직관입니다.


직관 덕분에 우리는 일상에서 마주치는 많은 장면들을 이해합니다. 그림을 보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시선이 머무는 곳은 모두 그림입니다. 이해가 안 되는 꿈도, 잊지 못할 기억의 한 장면도 그림의 다른 이름입니다. 심지어 마음의 눈으로 보는 감정도 다르지 않습니다. 엄마의 따뜻한 품은 마음에 그림으로 남아 그리움이 되었습니다. 잊은 줄 알았던 감정은 무늬처럼 압축된 이미지로 내 마음속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마치 그림처럼요.
그림은 그렇게 내게 다가왔습니다. 내 마음을 대변해 주는 그림을 발견하면 한 없이 그 앞을 서성거렸습니다. 기억의 서랍에 담긴 이미지와 겹치는 게 있는지 찾는 과정이었죠. 생각이 정리되지 않으면 우리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결국 말과 글은 그리는 것과 맥락이 같습니다. 그렇게 그림에 기대어 내 안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마음을 열었습니다. 그림이 그려진다면 그 말과 글은 온전히 자신의 것입니다.




두 사람이 비슷한 느낌을 주는 부부를 만나면 신기합니다. 비슷한 사람끼리 연을 맺었는지, 연을 맺고 나서 마주 보며 사니 비슷해졌는지 궁금합니다. 코드가 맞는 본성에 맥락을 맞추고 살고 있으니 비슷해 보이는 것 아닐까요? 사람은 닮아갑니다. 하지만 인간이 공통적으로 가진 본성에 맞추어 살고 있다면 닮는다는 표현은 어색합니다. 공통의 분모를 발견했다고 해야 맞습니다.


두려움은 빨리 전파됩니다. 코로나 19(COVID-19)처럼 정체를 알 수 없는 바이러스가 그렇습니다. 두려움은 삶을 위협하는 자연과 사회에서 맞닥뜨리는 위협에 대한 정상적인 반응입니다. 인간이 공통으로 가진 본성에 기대어 작동합니다. 자연과 종교 그리고 사회에서 터득한 지식과 경험을 통해 발전시킨 이성도 사람들의 사고와 행동을 비슷하게 만듭니다. 본성은 발견으로 알게 되고, 이성은 발전으로 얻게 됩니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면 주위 사람들의 모습에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알 듯 모를 듯 나의 모습이 어려 있습니다. 두렵지 않다고 다짐할수록 더 두려워지듯, 아니라고 고개 저을수록 상대방에게서 보이는 나의 모습은 더욱 뚜렷해집니다. 발전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발견입니다. 채우기 위해 쌓아 올린 발전 말고 내면에 숨은 본연의 욕구에 대한 발견입니다. 하지만 생각하고 움직이는 대상을 오랫동안 바라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아내 얼굴, 동료 얼굴을 십분 이상 바라보신 적이 있나요? 바로 이상한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발견하지 못하고 발전에만 매달립니다. 잠자는 아이 얼굴 같으면 그 안에 담긴 수천 가지 표정과 숨바꼭질할 수 있을 텐데요.


그동안 내 시선이 향했던 방향의 반대편에 서야 내면을 바라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게는 그림 앞에 서는 것이었습니다. 그림은 하루 종일  앞을 서성거려 싫은 내색 한번 하지 않았습니다. 일상이라면 그냥 지나쳤을 겁니다. 그림은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비춰주었습니다. 닮은 부부처럼 공통된 천성을 담은 그림 앞에서 내 안의 숨겨진 욕구와 감정의 상관관계를 발견했습니다. 그림과 나는 마주 보지 않았습니다. 그림은 나의 시선을 그림 너머의 지점에 닿게 해 주었습니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본 화가 천경자의 작품들은 바라보는 사람을 한동안 서 있게 만듭니다. 여인의 눈빛. 그 눈빛은 누군가를 바라보지 않습니다. 느낌은 오지만 이해되지 않는 그 무엇인가를 사유하는 눈빛입니다. 시선의 방향이 밝은 쪽의 반대로 역류해서 자신의 내면을 무상하게 바라보는 것 같습니다. 그림과 내가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곳을 함께 바라보고 있습니다. 여인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오히려 침묵으로 말해 주었습니다. 침묵은 감추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는 것이죠. 미인은 침묵 안에 머물던 내게 손을 내밀어 주었습니다. 한나절을 그렇게 미인과 손을 잡고 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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