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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윌마 Sep 22. 2020

당신은 행복하세요?

낯설지만 공감이 가는 목소리


그림 아닌 그림 같은 로이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 1923~1997)의 <행복한 눈물>은 거리나 카페에서 쉽게 접하는 작품입니다. 만화 장면 중에 여자 얼굴 부분만 크게 확대하고, 검은 윤곽선과 원색의 가시성으로 그림을 단순화했습니다. 면은 색을 칠한 것이 아니라 작은 점을 하나하나 반복적으로 채웠습니다. 그 유명한 앤디 워홀도 이 그림을 보고 나서는 만화를 활용한 팝아트 쪽은 넘보지 않았습니다. 대중 만화를 작품 소재로 사용했지만, 요즘 웹툰을 보면 만화가 가진 대중성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만화에서 막 튀어나온 것 같은 그림은 쉽게 다가오고 쉽게 지나갑니다. 한 번은 그림 앞에 서 있는데 마음이 통했는지 묻고 싶은 충동이 생겼습니다.
‘너는 뭐가 그렇게 행복하니?’
그림에게 물었는데 그림은 대답할 줄 모릅니다. 물음은 메아리가 되어 돌아옵니다.
‘당신은 행복하세요?’


행복이란 말이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쉽지 않습니다. 낯설게 바라보게 합니다. 인간의 역사는 사랑의 과정을 담은 기록입니다. 삶의 시작부터 끝까지 사랑은 한 사람의 역사를 풍성하게 그리고 굴곡지게 합니다. 사랑이 인간관계의 근원적인 감정이라면 개인은 행복이라는 궁극적인 감정을 추구합니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에서 찾은 행복에 관련된 구절입니다.
‘내 영혼아, 죄를 범하라. 스스로에게 죄를 범하고 폭력을 가하라. 그러나 네가 그렇게 행동한다면 나중에 너 자신을 존중하고 존경할 시간은 없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한 번, 단 한 번뿐이므로. 네 인생은 이제 거의 끝나가는데 너는 살면서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았고, 행복할 때도 마치 다른 사람의 영혼인 듯 취급했다. 자기 영혼의 떨림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행복할 수 없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영혼의 떨림을 보듬고 사랑하지 못하면 나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불안과 우울처럼 삶에 악영향을 끼치는 감정에 지배당합니다. 나의 불행은 개인의 영역에 머물지 않습니다. 내가 힘들면 가족이 힘들고 주위가 힘들어집니다. 개인의 행복은 다시 관계의 문제가 됩니다. 나만 희생하면 된다는 생각은 주위의 그 누구도 원하지 않는 혼자만의 상상입니다.


‘당신은 행복하세요?’
광고 카피 같은 질문을 받을 때면 행복한 것인지 불행한 것인지 고민합니다. 그래도 추는 늘 행복한 쪽으로 기웁니다. 행복해서 행복한 것인지, 행복하지 않다고 말하면 불행해질 것 같아서 그런 것인지 똑 부러지게 말할 수 없습니다. 행복을 판단하는 기준을 일률적으로 정할 수 없습니다. 행복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는 주관적 행복입니다. 대표적으로 돈과 행복의 관계를 들 수 있습니다. 전 세계에 공통으로 사용되는 돈과 행복의 상관관계는 60억 명이 모두 다를 겁니다. 돈은 실제로 행복을 가져다 주기도 하지만 영향을 미치는 정도는 개인의 주관적 상황에 따라 달라집니다. 돈이 많아도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는 반면 돈에 연연하지 않으면서 행복하게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신과 맥락이 맞는 일에는 행복을 느끼지만 자신과 맞지 않는 일을 할 때면 행복이라는 말을 떠올리지 않습니다. 건강과 행복의 상관관계도 비슷합니다. 처음에는 자신만 몹쓸 병에 걸려서 불행하다고 느낄 수 있지만, 완치는 아니더라도 병이 더 나빠지지 않게 관리할 수 있는 자신이 생기면 주관적 행복은 건강한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돈과 건강이 주관적 기준이라면 가족과 공동체는 객관적 기준에 속합니다. 화목한 가족이나 배려가 익숙한 공동체에 속한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에 비해 행복지수가 높습니다. 주관적 행복은 오래가지 않는 특성이 있습니다. 연봉이 올라도 며칠뿐입니다. 두 세배라면 모를까 조금 오른 연봉으로 일 년 내내 행복한 감정을 가지기 어렵습니다. 심리적 적응이 빨리 진행되기 때문이죠. 오히려 통장이 비어 갈수록 상실감이 늘어갑니다. 주관적 행복에 비해 객관적 행복은 생명력이 오래갑니다. 화목한 관계는 돈처럼 단순 비교가 어렵고, 배려는 언제 받아도 기분 좋은 것처럼 심리적 적응이 비교적 먹히지 않는 영역입니다. 인류 역사를 시원하게 기술한 <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행복이란 특정 요인에 의해 전적으로 좌우되는 것이 아니고, 객관적 조건과 주관적 기대의 상관관계에 의해 결정된다고 했습니다.


행복의 정의를 알면 쉽게 답할 것 같았던 행복하냐는 물음은 그 이후로도 여전히 막연합니다. 나는 상수(常數)이고 행복이 변수(變數)라고 생각했는데 행복이 나름 상수가 된 뒤에도 답이 나오질 않았습니다. 결국 주어인 나는 상수가 아니었습니다. 행복을 고민하는 일이란 변수인 나를 찾는 과정입니다.


<행복한 눈물>에게 던졌던 '당신은 행복하세요?'라는 질문은 그 자체가 모순입니다. 그림이 주는 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신은 누구세요?'를 먼저 물어야 했습니다. 불안에 떠는 나. 불안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 모르는 나. 어떤 생각이 나를 짓누르는지, 어떤 장면에서 불안해하는지 찾지 않는 나. 나는 아무 문제없다며 자신을 외면하는 나. 외부에 맞서 문제 그 자체에 집중하기보다는 자신을 속이고 모든 원인을 자신에게 돌리는 나.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 과거의 아픈 장면을 보물처럼 끌어안고 끙끙대는 나. 그것도 의식적으로 왜곡해 놓고 이제는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나. 이렇게 다양한 나를 이해하고 공감한 뒤에 행복을 말할 수 있습니다. OX 문제로 들렸던 행복하냐는 물음은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질문이었습니다.


미국 워싱턴에서 융학파 정신분석가로 활동 중인 제임스 홀리스는 ‘그림자는 억압된 삶일 뿐 악한 걸로 봐서는 안 된다. 그림자도 풍부한 잠재력을 지녔고, 우리는 그림자를 의식으로 끌어들임으로써 더욱 흥미롭고 완성된 인간이 된다’고 했습니다. 내 안의 그림자는 가장 공감해 주어야 하는 모습 중의 하나입니다. 하지만 갈 길은 멀고 길마저 험한 상황이면 내 안의 불편한 모습에 마음 한 귀퉁이 내어 주기가 쉽지 않습니다. 불안한 시선으로 나를 지켜보는 주위의 조언을 들어서는 안될 속삭임으로 치부합니다. 누군가의 조언을 무시해도 좋을 만큼 내 삶을 확신하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나중에 알게 나면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지요. 깨닫게 되면 다시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일상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삶에 큰 변화를 주는 목소리는 자기가 아주 특별하니 챙겨 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하루하루 시간 속에 무심히 자리 잡고 있을 뿐이죠. 리더십 권위자의 말을 빌리면, 우리 인생에서 존재 목적에 도움이 되고 풍요와 의미를 가져다주는 여러 중요한 것은 대체로 우리의 시간을 강경하게 요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당장 급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스스로 잊지 말고 챙겨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들어야 할 목소리를 듣지 못하니 주위에서 경적 소리가 늘어납니다. 하지만 경적 소리마저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버리는 것이 최단거리를 달리는 우리가 날마다 저지르는 단절입니다.


낯선 목소리 중에 절대 놓쳐서는 안 되는, 조금만 곱씹어 보면 이마에 새겼어야 할 만큼 공감이 가는 목소리가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신호입니다. 그 신호를 인지했다는 것만으로 의미가 있습니다. 이제껏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합니다. 인지하는 순간 그것은 현실이 되고 머릿속에 이미지화됩니다. 이 신호를 좋은 계기로 삼으면 우리는 다음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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