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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윌마 Sep 26. 2020

나에게 비협조적인 존재는 바로 자신

지나치게 자신을 추구하세요. 그 끝이 죽음이라도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면 오래 살 수 있다는 신탁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알게 되면 단명한다는 얘기지요. 자기 자신을 아는 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습니다. 누구일까요? 오래 살 것 같습니다. 나르시시즘은 지나친 자기애를 뜻하는 말입니다. 물에 비친 자기 모습에 반해서 끝내는 자기와 이름이 같은 수선화가 된 그리스 신화의 나르키소스에서 유래되었죠. 독일의 정신과 의사 네케가 1899년 처음 사용하였고 이후 프로이트가 정신분석 용어로 도입하면서 널리 알려졌습니다.
나르키소스는 아름다운 미소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흠모합니다. 젊은이들은 그와 가까이 지내고 싶고, 소녀들은 그에게 사랑을 갈구합니다. 하지만 그 누구의 마음도 받아주지 않습니다. 강한 자존심은 그 누구와의 사랑도 허락하지 않습니다. 단 한 사람을 제외하면 말입니다. 우리말에 메아리에 해당하는 에코도 나르키소스에게 실연을 당합니다. 나르키소스의 사냥하는 모습에 반한 에코는 몰래 그를 따라다닙니다. 하지만 나르키소스는 잔인하게 에코의 사랑을 거절합니다. 숲의 님페 에코는 식음을 전폐하고 슬퍼하다 몸은 사라지고 목소리만 남습니다. 나르키소스를 향한 수많은 원망이 하늘을 향합니다.
“그도 사랑하는 것을 영원히 얻지 못하게 하소서!”
나르키소스는 결국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로부터 기이한 형벌을 받게 됩니다. 바로 단 한 사람, 자기 자신을 알게 되는 형벌입니다.
사냥 중에 목이 마른 나르키소스는 샘을 찾습니다. 수정처럼 맑은 샘입니다. 그가 샘에 다가가자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아름다운 형상이 나타납니다. 신이 빚어 놓은 듯한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봅니다. 바로 샘에 비친 자기 자신을 사랑하게 된 것이죠. 잡으려고 손이 물에 닿으면 흩어져 버립니다.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습니다. 애가 타서 울부짖어도 자신의 사랑은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샘에 살던 프리지어 님프는 이 모든 과정을 함께 합니다. 처음에는 나르키소스가 자신을 사랑하는 줄 알았죠. 하지만 용기 내어 나르키소스 앞에 나선 프리지어에게 나르키소스는 미친 듯이 화를 냅니다. 샘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흩뜨린 그녀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나르키소스는 결국 샘을 바라보는 자세로 숨을 거둡니다. 죽은 나르키소스는 한 송이 수선화로 피어나 물을 바라보는 꽃이 되었습니다. 프리지어는 나르키소스를 잊지 못해 수선화 옆에 있게 해달라고 하늘에 간청합니다. 수선화가 필 때 항상 함께 피는 꽃이 바로 프리지어입니다.


수많은 나르키소스 신화를 다룬 그림 중에서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1573~1610)의 그림이 유독 마음에 남습니다. <나르키소스> 그림이 아니더라도 카라바조의 그림은 평소에 접했던 다른 화가의 그림과 확연히 다른 느낌을 줍니다. 강한 빛과 어둠을 대조적으로 표현해서 장면에 극적 긴장감을 불어넣는 방식이 그렇고 종교화에 등장하는 영웅들을 평범한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한 것도 신선했습니다. 정형화된 예수 모습 대신에 볼 살이 통통한 빵집 형 같은 예수는 파격이었죠. 기존 종교화에서 느껴지는 일정한 거리감이 사라지면서 오히려 공감 가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때로는 너무나도 생생한 표현에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카라바조는 영웅을 대체한 평범한 인간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자주 그려 넣었습니다. 그리는 사람에 따라 자화상에 드러나는 자의식은 그 의미가 달라집니다. 뒤러의 자화상에는 주체할 수 없는 삶의 자신감이 물씬 풍겨 납니다. 샤갈은 줄무늬 재킷 차림의 고상하고 확신에 찬 지성인으로 자신을 표현했습니다. 렘브란트의 자화상에는 여유로움과 권위가 담겨 있습니다. 카라바조의 자화상은 그 자체로 타협 없는 묘사의 정수입니다. 자신의 내면에 부유하는 추악함을 실오라기 하나 가리지 않고 드러내는 일은 보는 이에게 잔혹하다는 생각마저 들게 합니다. 마치 시인 김수영이 시내 한복판에서 우산대로 아내를 때려눕힌 범행 이후, 집에 돌아와 마음에 꺼려지는 생각을 담은 시 <죄와 벌>을 읽는 기분이었습니다. 김수영이 노심초사했던 대목은 아는 사람이 그 장면을 보았을까 하는 일이고 그보다 먼저 현장에 두고 온 우산을 아까워하는 마음이었습니다. 나 같았으면 감추기에 급급해 기억에서 지워 버렸을 일을 타협 없이 시에 담아서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샘에 비친 나르키소스의 모습은 자세히 보면 미소년의 모습과 거리가 멉니다. 그래서 <나르키소스> 그림은 나르키소스 신화를 그린 그림이면서 한편으로 자기 자신을 그린 자화상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양날의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소년의 모습도, 샘에 비친 추악한 모습도 모두 카라바조의 모습입니다. 한 사람이 가진 두 가지 모습을 모두 추적할 수 있는 설정으로 나르키소스만큼 좋은 주제가 있을까요? 카라바조는 극단적 자기애의 표본 나르키소스를 자신과 동일시했습니다. 기독교적 질서가 지배하는 광기의 시대에 악동으로 살 수밖에 없었던 그는 자신만이라도 스스로를 인정해 주어야 했습니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시인 윤동주는 <병원>이라는 시에서 지금의 세상은 온통 환자 투성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늙은 의사에게 지금의 세상은 모두 정상입니다. 그중에서 가장 완고한 늙은 의사는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의사도 아니면서 아무 문제없다며 자신을 외면하는 나는 스스로에게 가장 비협조적인 존재입니다. 우리는 주위에 드러난 아픔에는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공감하고 위로하고 격려해 주는 것이죠. 이 단순하고 분명한 이치를 자신에게 베푸는 사람은 드뭅니다. 일이 되어가는 형국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자신에게 아픔은 감당해야 하는 것이지 공감과 위로가 먼저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아프면 안 되는 사람이고, 아픔을 인정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헤어지자는 연인의 말을 장난으로 치부하고 매달리면서 이별을 내 안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도 비슷한 이치입니다. 헤어진다는 상황을 내 스스로 인정하는 순간 연인이 없는 세상은 현실이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세상을 사는 것도 힘들겠지만 지옥 같은 세상에서 아픔을 끌어안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죠. 그렇게 자신은 스스로에게 동행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데 익숙하지 않습니다. 다시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고 싶지 않습니다. 내면에 대한 이해를 회피한다는 점에서 인간은 무지합니다. 수많은 착각과 기대에 기대어 살아갑니다. 기대의 시선은 우리의 기억마저 왜곡시킵니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내기 어려운 세상입니다. 개인의 아픔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은 결코 따뜻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내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더 쓰라린 상처를 경험합니다. 그렇기에 삶의 왜곡을 알면서도 고개 돌리고 모른 척합니다. 그 순간만큼은 살기 위한 방편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내가 듣고 싶은 대로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병원을 찾았던 바로 그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무지합니다. 나의 무지를 선언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역사를 보면 중요한 선언은 다른 선택지가 없는 마지막 순간에 하게 됩니다. 무지 선언을 나를 돌아보는 좋은 계기로 삼지 못하면 벼랑 끝까지 자신을 몰아붙였던 내 자신에게 용서를 구하는 일은 요원해집니다. 다시 신화로 돌아옵니다. 예언을 알고 있었던 나르키소스 부모는 집안의 모든 거울을 치웁니다. 나르키소스가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게 한 것이죠.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는 나르키소스에게 자기 자신을 만나는 일은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경험입니다. 죽도록 자신을 추구하는 일이죠.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우리에게 나르키소스는 말합니다.
‘한 번이라도 지나치게 자신을 추구하세요. 그 끝이 죽음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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