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캔버스 앞에 서면 두려움을 느낀다. 캔버스를 정면으로 마주하지 못하고 주위를 서성거린다. 애써 붓을 잡았지만, 시작부터 망쳤다. 까만 묵색이었다. 생(生)과 사(死)의 갈림길에 선 것처럼 처참한 기분이었다. 무슨 생각에서였던지 캔버스를 까맣게 덧칠했다. 칠하고 또 칠했다. 까맣게 막막한 바탕은 그 자체로 새로운 시작이었다. 오히려 어떤 고백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바탕이었다. 망친 채로 작별했다면 평생 아픈 기억으로 남았을 것이다.
나는 꿈을 꾼다. 학살 관련 책을 쓰기 위해 자료를 읽으면서 시작된 악몽이다. 공수부대를 피해 달아나다 어깨를 곤봉으로 맞고 쓰러지는 나. 착검한 총을 두 손으로 모아쥔 그가 힘껏 내 가슴을 찔렀을 때의 전율하는 나.1 현실의 나는 불안하다. 무성한 나무들 사이를 걷다가 갑자기 사방이 탁 트이는, 내 몸이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는 구간을 만나면 그 길은 언제나 까마득하다. 어딘가 저격수가 사람들을 조준하고 있을 거라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내게는 생생하다.2
악몽과 생시가 불분명하게 뒤섞인 시기를 통과하는 사람에게 믿기지 않는 장면이 포착될 때, 꿈에 본 상징을 현실에서 마주할 때, 나의 감각은 신뢰할 수 없는 것이 된다.3 이 돌연한 고통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거대한 칼이 허공에 떠서 내 몸을 겨누고 있는 것 같다.4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나. 관계망은 끊어지고 삶은 파괴되어 파편화된 조각 위에 나는 서 있다. 꿈에도 현실에도 존재한다는 것은 버겁다.
처음 그 검은 나무들의 꿈을 꾼 이후로, 생(生)의 한 편에서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그 벌판에 눈이 내린다. 우듬지가 잘린 검은 나무들 위로 눈부신 육각형의 결정들이 맺혔다 부스러진다. 발등까지 물에 잠기면 놀란 나는 뒤를 돌아본다. 거기 바다가 밀려들어온다. 파도가 휩쓸어가버린 저 아래의 뼈들까지.5 나는 계속해서 떠오르는 그 광경에 마음이 쓰인다. 적당한 장소를 찾아 나무들을 세우고, 등신대 나무에 먹을 입힐 수 있지 않을까. 모든 일이 끝난 뒤, 흰 천 같은 눈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와 그들을 덮어주길 기다릴 수 있지 않을까. 그 과정을 짧은 기록영화로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
“먹을 칠하는 일은 깊은 잠을 입히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왜 오히려 악몽을 견디는 사람들처럼 느껴지는 걸까?”6
총검에 숨이 끊어져 온기 없는 얼굴에 내린 눈은 녹지 않고 쌓였다. 여기저기 포개지고 스러진 사람들은 벌판에 쓰러진 나무와 다르지 않았다. 그 속에서 내 사람들 시신을 확인하려면 얼굴에 쌓인 그 눈을 일일이 닦아야 했다. 살얼음이 벤 얼굴은 저마다 살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눈이 내려도 녹지 않는 나무였다. 나무를 세워 심고, 먹 옷을 입혀서 가슴 속에 활활 일어나는 불을 가진 사람처럼 새로운 시작으로 눈을 맞게 하고 싶었다.
“무엇을 생각하면 견딜 수 있나.
가슴에 활활 일어나는 불이 없다면,
기어이 돌아가 껴안을 네가 없다면.”7
꿈보다 더 극적인 것이 현실이다. 모든 걸 걸고라도 멈추고 싶은 것,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들을 겪고 나면 더 이상 내가 알던 나는 없다. 살고 싶어하는 몸. 움푹 찔리고 베이는 몸. 뿌리치고 껴안고 매달리는 몸. 무릎 끓는 몸. 애원하는 몸. 피인지 진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이 끝없이 새어나오는 몸.8 그렇게 모든 것이 빠져나가고 나는 고목처럼 메말라간다. 삶에 아무런 미련이 없다. 나는 날마다 수신인이 정해지지 않는 유서를 쓴다. 이런 형편없는 글로는 누구에게도 이별을 알릴 수 없다. 유서를 봉투째 찢어버린다.
“처음부터 다시 써
진짜 작별 인사를, 제대로.”9
다시 찬물 샤워를 하고 돌아와 조금 전에 쓴 유서를 다시 찢어버린다.
“그걸 쓰려면 생각해야 했다.
어디서부터 모든 게 부스러지기 시작했는지.
언제가 갈림길이었는지.
어느 틈과 마디가 임계점이었는지.”10
사람을 살게 하는 힘은 의외로 사소하다. 끝내지 못한 작별 인사가 나를 살게 했다. 유서를 받을 마지막 수신자에 대한 책임감이 가냘픈 생의 끈을 이어주었다. 어제의 좌절 옆에 오늘의 좌절을 세우고 다시 좌절하는 힘으로 내일의 좌절을 만나는 게 우리네 삶 아니던가. 그렇게 죽음이 나를 비껴갔다. 인생과 화해하지 않았지만 다시 살아야 했다.
한강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주 4·3’ 사건이 배경이다. 양민 학살과 실종된 가족을 찾기 위한 생존자의 길고 깊은 투쟁의 서사다. 생과 사, 꿈과 현실, 만남과 작별. 용서와 치유. 한강의 소설에는 독자로 하여금 경계를 경험하게 하는 힘이 있다. 독자들은 저마다의 경계를 경험하며 때로는 거부하지만 끝내 빠져든다. 소설의 화자 경하는 죽음이 비껴간 어느 날, 우연히 제주를 찾아 4·3의 기록과 마주한다. 죄다 지우고 싶을 때, 누군가 지우려고 할 때, 한사코 들여다봐야 한다고 한강은 말한다. 사건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건 거대한 힘이 아니다. 사소한 책임감처럼 작은 힘들이 모여 기억하고 기록한다. 제주 4·3 때 죽은 사람들을 살릴 수 없더라도, 작별하지 않는 힘으로 그들을 만나야 한다. 진실한 작별은 만남이다.
폭풍 칠 때, 찬 바람 불 때, 어스름 할 때 이게 진짜 제주다.11 한 발씩 힘껏 땅을 다니고 그 바람을 가르며 걷던 순간을 생각한다. 그들이 왔구나.12 바람이 부는 한 우리는 4·3 제주를 만나는 중이다. 작별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