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은 경계를 모른다. 파릇파릇 돋는 새싹은 이쪽과 저쪽을 구분하지 않는다. 우리가 경계를 지을 때 사용하는 선도 자연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이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은 경계다. 사람은 눈에 들어오는 풍경 정보를 그대로 뇌에 보내지 않는다. 일차로 정보를 가공한다. 사람은 대상을 인식할 때 우선 선을 추출한다. 이렇게 추출된 선에 대한 정보를 뇌로 보내면, 뇌에서는 그 선들이 형성하는 어떤 특별한 형상을 기억과 비교해서 대상이 무엇인지 판별한다. 사람에게 의미가 되는 기호는 선이다. 흐르는 선 세 개를 나란히 그으면 사람들은 물(水)을 떠올린다. 사람들은 자신과 세상이 만나는 경계를 단순화된 자기 형상으로 인식한다.
경계의 흔적은 인간의 의식 속에서 더 뚜렷하게 드러난다. 선(善)과 악(惡), 안과 밖, 생(生)과 사(死). 경계의 흔적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언제나 놀랍고도 흥미진진하다. 인간 역사의 존망은 이러한 경계 위에서 정해졌다. 의식 세계의 경험을 구분하는 경계부터 현실 세계에서 토지에 대한 사유재산을 설정 짓는 한계까지, 그리고 현실과 미지의 세계를 구분하던 지평선처럼 경계는 복합적인 상징적, 물질적 함의로 인식의 범위를 넓혔다. 경계는 인식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출발점이었다.
복합적이고 다양한 경험을 가능케 했던 경계는 콜럼버스로 대표되는 유럽 열강들의 경쟁적 신대륙 개척과 식민지 수탈 과정을 거치면서 문자 그대로 주변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장벽으로 상징되는 경계는 그 내부는 강화하고, 외부는 존재 자체를 거부하는 배제에 초점을 맞췄다. 자연스럽게 지배와 착취, 폭력은 전 세계의 경계선을 타고 형성되었다. 세계화라는 구호 아래 전 세계가 경계를 허물고 단일 공간으로 통합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세상은 다른 경계를 세워가는 중이다. 양극화로 계층 간 경계는 선명해졌고, 계층 간 이동할 수 있는 사다리는 사라졌다. 경계는 더 이상 인식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상징이 아니라 배제를 뜻하는 대표 명사가 되었다.
오늘 소개할 ‘한국의 기하학적 추상미술’ 역시 장식적인 미술 혹은 한국적이지는 않은 추상으로 인식되며 앵포르멜이나 단색화와 같은 다른 추상미술의 경향에 비해 주변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기하학적 추상미술은 점과 선, 원과 사각형 등 단순하고 기하학적인 형태, 원색의 색채, 화면의 평면성을 강조하는 회화의 한 경향이다. 서구에서는 몬드리안, 칸딘스키, 말레비치와 같은 작가들의 작업을 통해 기하학적 추상미술이 각광을 받고, 20세기 내내 현대미술의 주요한 경향으로 여겨졌다. 국내에서도 기하학적 추상은 1920-30년대 근대기에 등장해 1960-70년대에는 전방위적으로 확산하는 등 한국 미술사의 주요 변곡점마다 각기 다른 양상으로 존재해 왔다.
장벽을 세우고 이곳과 저곳을 나눈들 하늘을 나눌 수는 없는 법이다. 한국의 기하학적 추상미술은 주변부로 여겨졌던 경계를 인간의 오만이 낳은 배제의 상징이 아니라 인식의 지평을 넓히는 만남의 장으로 거듭나게 했다. 특히 건축과 디자인 등 연관 분야와 접점을 형성하고, 당대 한국 사회의 변화와 연동되면서 한국 미술의 외연을 확장하는 역할을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