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파에서 편하게 감으로 읽으려다, 첫 글을 읽고 책상으로 옮겨 각을 잡고 읽는다. 김미옥 선생의 첫 책 『감으로 읽고, 각으로 쓴다』를 읽었다.
나는 책을 읽을 때, 문득문득 그림을 떠올린다. 뇌에 전달되는 정보가 대부분 책과 그림이니 자연스레 둘 간의 연결고리를 근거로 정보가 구조화되는 것이다. 아내는 불만이다. 남편은 언제나 책과 그림 속에 파묻혀 산다는 것이다. 나는 조선시대 선비고 아내 자신은 빈 쌀독을 걱정하는 억척스러운 아낙이란다. 남편은 보고 배운 것을 현실과 연관 짓지 않고, 이상세계에 산다는 것이 아내의 푸념이다. 평범한 가정집에 순수문학과 참여문학 논쟁이 한창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기댈 언덕을 찾아 나는 다시 책을 잡는다. 『감으로 읽고, 각으로 쓴다』. 그런데 책을 잘못 잡았다. 김미옥 선생은 책을 읽으면 꼭 현실과 연관 짓는다. 전기 작가 옌스 안데르센이 쓴 린드그렌의 평전 『우리가 이토록 작고 외롭지 않다면』을 읽다가 문득 최말자 할머니를 떠올리는 식이다. 린드그렌은 말괄량이 삐삐를 쓴 작가다. 최말자 할머니는 18세 때 성폭력에 저항하다 남자의 혀를 물어 유죄판결을 받았다. 철저히 남성 중심의 사회에 눌려 삶은 무너졌지만, 사회의 통념에 고개를 숙이지 않고 싸운 분들이다.
중요한 건 자신을 의식화하는 자발적 과정이다. 최말자 할머니는 63세에 중고등과정을 공부하고 방통대에 진학했다. 56년이 지나 할머니가 된 그녀는 정당방위를 인정해 달라며 재심을 청구했다. 린드그렌 역시 주위의 도움을 받아 자기 결정권을 가진 한 인간으로서 자신을 세웠고, 평생 어린이, 미혼모, 여성 문제에 목소리를 높였다.
세상에 저절로 되는 것은 없다. 세상은 저절로 되는 것에 가치를 두지 않는다.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지워진다. 무엇보다 되어 가는 형세가 더디면 사람은 지치게 마련이다. 자기 의식화로 이룬 것은 현실에 단단히 뿌리를 내린다. 『감으로 읽고, 각으로 쓴다』를 읽는 내내 인상 깊었던 것이 바로 ‘의식화’, 즉 깨어있으려는 김미옥 선생의 노력이다. ‘활자중독자’라면 더욱 그렇다. 중독은 주객이 전도되는 경우가 많다. 중독은 사람을 수단으로 전락시킨다. 깨어있지 않으면 자신을 중독시킨 그 무엇의 틀에서 벗어날 수 없다.
김미옥 선생이 깨어있고자 애를 쓰는 태도는 제목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책은 세 번 읽어야 한다. 글을 읽고, 작가와 그 시대를 읽고, 마지막으로 나를 읽는다. 글을 읽고 작가와 그 시대를 읽는 것은 책에 충실하려는 독자의 노력이다. 하지만 저자의 생각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래서 책을 읽는 것은 그 글을 읽는 나의 생각을 읽는 것이다. 결국 “감”으로 읽는 것이다. “감”은 구체적인 형태가 없다. 말과 생각이 그렇다. “감”에 형태를 입히는 것이 쓰기다. 글로 쓰고, 쓴 글을 소리 내어 읽으면 부족한 부분이 드러난다. “각”으로 써야 “감”은 온전해진다. “감”으로 읽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생각을 온전히 알 수 없다는 겸손의 다른 표현이다. “각”으로 쓴다는 것은 자신을 추상(秋霜)처럼 대하겠다는 다짐처럼 들린다.
이제 나를 읽을 시간이다. 책에서 다룬 문제적 사건들, 즉 '인간이 인간을 차별하고 무시하고 상대를 파멸시키는 보편성에서 우리는 자유로운가?' 나는 깨어있는가? 삶을 ‘의식화’하려면 겸손과 추상으로 무장해야 한다. 이건 나의 “감”이다. 겸손과 추상이 없다면 활자는 현실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활자를 통해 '현실과 관계'를 단단히 잇는 사람, 김미옥 선생을 알게 해 준 책, 『감으로 읽고, 각으로 쓴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