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막 시작한 여름이 꽤 덥다. 새 책 「나는 사랑을 걱정하지 않는다」를 퇴고하느라 미처 여름 채비를 못한 자가 느끼는 상대적 더위인가 싶었다. 나는 더위를 그다지 타지 않는다. 추위는 조금 탄다. 그런데 올해는 벌써 덥다. 노숙인과 그림인문학 이야기를 나누면서 인연을 맺은 노숙인종합지원센터에서 올린 사진을 본 후에야 때 이른 더위의 정체를 알았다. 없는 사람들에게 여름은 잔인하다.
사무실 가는 길에 환경미화복으로 무장하고 청소하는 분을 스쳐 지났다. 공사장 한쪽 그늘에는 외국인 노동자 서너 명이 앉아 있었다. 음식 준비로 불 앞에 서 있다가 얼음물을 들이키던 아내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부모님은 오늘도 노구를 이끌고 뙤약볕 아래에 계실 것이다. 내가 느끼는 더위는 내가 만났던 사람들이 맞는 더위의 합이었다. 더위는 마음에 먼저 왔다.
「나는 사랑을 걱정하지 않는다」는 눈앞에 보이는 것과 그 이면에 보이지 않는 것을 연결 짓고자 노력했던 10여 년 나의 인식과 실천을 담은 책이다. 나는 눈앞에 보이는 것에 매달려 살았지만, 바닷속에 더 큰 몸체를 숨겨 놓은 잠재의식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마음으로 먼저 느꼈던 더위처럼 잠재의식은 마음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말과 생각에 녹아들어 있었다. 그 뿌리는 언제나 사람이었다. 나는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고서 생각을 건강하게 키울 수 있었다.
사람과 대면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주위 사람에게 나를 비출 용기가 없었다. 사실 비추는 사람도, 비치는 사람도 생경한 일이다. 옆에 있는 사람을 몇 초만 쳐다보면 "내 얼굴에 뭐가 묻었냐?" 내지 "뭐 잘못 먹었냐?"는 핀잔을 듣는다. 얘기만 잘 들어주면 되는 데 그게 쉽지 않다. 얘기 중에 드러날 감당하기 버거운 현실과 대면하기 두려워서다. 자기 내면과 마주하는 것도 같은 이치다. 자신의 일그러진 모습은 사람에게 비춰야 알 수 있다. 아버지, 어머니에게 비춰야 자신이 얼마나 불효자인지 알 수 있다. 사이가 틀어진 친구에게 비춰야 자신이 얼마나 모진 사람인지 보인다.
용기가 없고 일상에 지칠 때 그림은 동행이 돼 주었다. 미술평론가 케네스 클라크는 ‘그림을 본다는 것’을 그림과 첫 만남에서 받은 충격을 놓치지 않고 그것을 면밀하게 검토해서 자신의 소회를 밝히고 재해석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안목을 넓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살면서 우리는 어떤 상징이나 장면에서 마음이 울리는 경험을 한다. 순식간에 지나가는 장면에서 ‘뭐지?’ 하는 느낌을 알아챌 수 있다. 그 느낌은 충격이다. 충격은 오래가지 않는다. 바쁜 일상에 묻히기 일쑤다. 충격에 노출될수록 충격에 길든다. 충격을 놓치지 않고 끌어가는 힘, 내게는 그림이었다.
그렇게 사람을 보듯 그림을 봤다. 그림은 사람의 경직된 사고를 부드럽게 해 준다. 또한 그림 그 자체가 울림이 되어 보는 이의 내면 읽기를 돕는다. 그림은 말과 글보다 자기 방어가 적어 내면을 드러내는 데 효과적이다. 그래서 그림이 주는 메시지는 쉽고 단순하다. 그동안 나는 나에게 절실히 필요한 무엇이 있는데 정작 그게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림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깨닫게 해 줬다. 마음 깊숙한 곳에 뿌리를 내렸던 사람들을 나는 사랑하고 있었다. 그들 역시 나를 지지하고 사랑했다. 그들과 나눈 희로애락(喜怒哀樂)은 사랑을 향한 아우성이었다. 내 안은 사랑으로 가득했다. 이후로 나는 사랑을 걱정하지 않는다.
그림에는 정답이 없다. 사람마다 다르고 상황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그림 앞에서 실천한 한 가지는 화삼독(畵三讀)이다. 그림은 세 번 읽어야 한다. 그림을 읽고, 작가와 그 시대를 읽고, 마지막으로 나를 읽는다. 그림을 읽는 동안 그림이 나에게 보여 준 환대를 잊을 수 없다. 그림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그 어떤 보답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림은 내가 의심하고 적대할 때도 환대를 멈추지 않는다. 무엇보다 그림은 당신이 가치 있는 사람이 아니라 가치를 따질 수 없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 절대적 환대에 여러분을 초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