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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윌마 Sep 30. 2020

다 내 탓이다

내면을 향해 총구를 돌린 공격성


정리되지 않은 감정에 정리되지 않을 감정이 더해집니다. 정리된 감정마저 흔들리는 날이면 나는 눌리고 묵히고 쌓여갑니다. 그런 감정을 폭우처럼 쏟아내고 싶은 날이면 나는 나혜석 거리를 찾습니다. 나혜석 거리는 언제나 말하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어쩌면 한동안 말하지 못했던 사람들이죠. 그래서 오늘은 말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가까이에서 일한다는 이유만으로 거리는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친구가 되어 주었습니다. 항상 나를 반겨주는 거리에서 오늘은 내가 말하는 날입니다. 쉼 없이 재잘대고 끊임없이 말하는 나. 나를 복제해 놓은 듯 말을 토해내는 사람들. 거리는 아무 말 없이 우리 이야기를 들어줍니다. 벗들을 배웅하고 홀로 남아 다시 거리를 걷습니다. 말하고 싶은 욕구가 바닥나고 이젠 주위로 관심을 돌릴 수 있겠다 싶을 때쯤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1896~1948)을 만났습니다. 나혜석은 여성의 신분이 낮았던 시대에 다른 사람보다 앞선 삶을 살았던 신여성입니다. 선구적인 삶,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경험하는 영화 같은 삶입니다.


오늘 마주한 나혜석은 그녀가 직접 그린 자화상입니다. 신랑과 세계 여행 도중 파리에 체류할 때 그린 것이죠. 신(新) 문명을 몸소 느끼고 새로운 도전 의식으로 불타오를 시점에 그렸다고 보기에 그림은 전체적으로 우울합니다. 어두운 배경에 의해 더욱 도드라진 얼굴에는 희로애락의 감정을 느낄 수 없습니다. 수많은 말이 쏟아지는 거리에서 입을 다문 그녀의 존재는 묘한 불안감을 느끼게 합니다.


보통 사람은 사건을 순서대로 경험합니다. 원인과 결과로 사건 사이의 관계를 지각합니다. 동일한 조건이라면 동일한 현상이 발생할 거라고 기대합니다. 주어진 현실에 기반을 둔 인과론적 삶에 익숙합니다. 하지만 나혜석은 여성이라는 제한된 현실 속에서도 미래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말합니다. 과거의 관습을 답습하는 미래를 거부합니다.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그래서 미래에서 가져온 듯한 말로 저항합니다. 그녀는 소설 <경희>에서 조혼을 강요하는 무서운 아버지에게 떨리는 입술로 “남편이 벌어다 준 밥을 그대로 얻어먹고 있는 것은 우리 집 개나 다를 바 없지요!”라고 말합니다. 아버지의 딸, 남편의 아내라는 인형은 그녀의 사전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근대의식의 아이콘이었던 그녀가 자화상에서는 망연자실한 시선과 다문 입술로 자신을 그렸습니다. 삶에 담긴 밝음과 어둠, 희망과 좌절 같은 내면의 갈등에서 균형을 잃어버린 체념의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밝은 미래 뒷면에는 혼자 감내해야 할 고독과 좌절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녀는 미래를 아는 경험에서 자신이 감내해야 할 삶의 무게까지 동시에 느꼈을 겁니다. 투쟁의 연속이었던 일상에서는 사치라며 묻어 두었던 감정들이 굴레에서 벗어난 파리에서 자연스레 드러난 것이죠. 미래를 아는 사람은 미래를 이야기하지 않듯 세월 전체를 동시에 지각한 사람은 세월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죠. 자신에게 닥쳐올 미래를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시공간의 제한을 뛰어넘어 삶의 목적을 생각하게 합니다. 나혜석은 파리에서 사귄 최린과 만남으로 인해 결국 이혼을 당합니다. 세상으로부터 패륜을 저지른 여인으로 낙인찍히죠. 아이들과 만나지 못하는 것보다 더한 아픔은 없습니다. 이런 역경 속에서도 그녀는 한 치 양보 없이 신여성의 진취적인 모습을 잃지 않습니다. 삶의 처음부터 끝까지 여성도 인간이라는 근원적 목적을 지각하고 자신의 삶을 바칩니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그녀의 자화상이 슬프면서도 숭고하게 다가오는 이유입니다.


나혜석에게 여성은 남성과 똑같이 평등한 인간이었습니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세상이 이상한 것이지 자신이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나혜석 거리에 서면 자신의 아픔은 불합리한 세상 탓이지 결코 내 탓이 아니라는 그녀를 만납니다. 끊임없이 말하고 저항한 크기만큼 내면에 쌓였을 좌절과 그리움을 만납니다. 그녀와의 만남은 속내를 털어놓고 속 시원히 떠나려는 나를 돌아서게 합니다.
“사 남매 아이들아. 어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어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였더니라.”
이혼으로 아이들과 이별한 후에 그녀가 생때같은 자식에게 남긴 글입니다. 생이별의 책임을 결코 자신의 탓으로 돌릴 수 없었던 그녀는 결국 행려병자로 생을 마감합니다. 한 치 앞도 가늠할 수 없는 처지에서 보면 내 탓이 아니라고 말하는 그녀의 용기가 부럽습니다. 물론 내 탓으로 인정하는 것도 용기가 필요합니다. 자신의 허물을 인정해야 하기에 자신과의 싸움이죠. 스스로 짐을 짊어지겠다는 진심은 반목을 거둬내고 주위로부터 이해와 공감을 끌어내기도 합니다. 나 혼자 있을 때는 모르지만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으면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현실을 부정하기도 하고 엉뚱한 곳에 화풀이를 합니다. 이렇게 힘든 시점에 나오는 내 탓이라는 선언은 잘못하면 체념으로 변질됩니다. 모든 문제를 자신에게 돌리는 거죠. 외부에 맞서 문제 그 자체에 집중하기보다는 자신을 속이고 관점을 비틀어 힘든 순간을 피하려고 합니다. 자기 자신이 가장 설득하기 쉬운 존재라는 것은 다들 아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체념으로 변질된 ‘내 탓’을 경계해야 하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문제의 근본 원인을 밝히고자 하는 주위의 의지까지 식게 만든다는 겁니다. 문제의 원인을 자신의 탓으로 한정했기에 다른 사람이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빼앗게 됩니다. 이런 상관관계를 고려하면 내 탓이라는 선언에는 분명 골든 타임이 있습니다. 상황 파악 없이 빨리 하면 허무하고 너무 늦게 하면 일을 망칩니다.


정신 분석학자들은 이러한 ‘내 탓’을 ‘내면을 향해 총구를 돌린 공격성’이라고 설명합니다. 이상화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자기 자신에게 벌을 주었던 고흐처럼 스스로에게 벌을 주는 것이지요. 부정적이고 무의식적인 단계로 넘어가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자리에는 곁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서로 마주한 채 비판과 평가에 치우쳐 ‘탓’의 주인을 가리기보다, 같은 곳을 바라보며 일이 되게 하는 말을 건네야 합니다. 문제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으려던 습성은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내 안에서 참으라고만 하는 목소리를 인식하고 그 목소리에 지지 않겠다는 다짐을 현실화하는 연습이 동반되어야 가능합니다. 그렇게 건강한 피드백이 오고 가는 곳이 바로 마음의 위안을 넘어 삶을 대하는 태도의 변화를 경험하는 무대입니다. 그 무대에 서서 내 탓이 아니라고 외치는 항명은 내가 나에게 내미는 작은 손입니다.


나혜석 거리는 진정한 나를 만나기 위해 찾는 거리입니다. 수많은 내 탓을 가슴에 안고 찾는 거리입니다. 일상의 균형을 연습하는 무대입니다. 그런 내 마음을 눈치챘는지 나혜석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거두고 자리에서 일어섭니다. 그녀의 시선은 차별을 뜻하는 벽 조형물 '잠들지 않는 길'을 향합니다. 화구를 담은 가방을 두 손으로 끌며 한참을 걸어가더니 나를 돌아봅니다. 그녀의 눈빛에서 두려움이 사라지고 다시 희망을 말하겠다는 다짐이 느껴집니다. 내가 오늘 쏟아낸 말에는 많은 다짐이 담겨 있습니다. 이 거리에 남기고 돌아설 뻔한 다짐들을 잊지 말라고 그녀는 당부합니다. 다짐은 잊지 않으면 언약이 됩니다. 언약은 강물이 되어 흐르고 이 거리의 만남은 꽃처럼 피어날 것입니다. 내 기준으로 보면 과거의 시공간을 사는 그녀입니다. 하지만 미래를 살았던 그녀는 분명 나와의 만남을 기다렸을 겁니다. 오늘만은 내 탓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자화상 속의 나혜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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