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윌마 Oct 01. 2020

짐을 내려놓으라

대상에서 벗어나면 그 어떤 상상도 가능하다


살면서 한 번쯤은 이런 사람을 만났을 겁니다. 존재 자체만으로 우리를 변화시키고 우리가 머무는 공간을 변화시키는 이. 혼돈에서 질서를 창조하는 이. 바라만 봐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이. 원시적인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이. 지금껏 몰랐던 내 자신의 일부를 발견하게 해 주는 이. 그렇게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주는 이.

나는 지금 그동안 만났던 그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림 안에는 서사가 들어있기 마련입니다. 원시미술 이후로 그림은 대상을 표현하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풍경, 인물, 대상 같은 일상 속 현실을 그린 그림에는 각각이 뜻하는 주제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세상을 표현한 그림 앞에서 사람들은 즐거워하고 불편해하고 분노하고 슬퍼합니다. 대상을 담은 그림을 만나면 하게 되는 일입니다.


앞서 언급한 그림 같은 사람이 있다면 성인군자라 하겠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림에게 짐을 지어 주었습니다. 선이나 색채를 써서 대상의 형상이나 풍경을 담게 했습니다. 끊임없이 대상을 부여했고 우리가 바라는 의도를 추구하게 했습니다. 그림은 화내지 않았고 한마디 불평 없이 견뎌왔습니다. 사람이었다면 힘들었을 겁니다. 돌이켜보면 나 역시 나에게 부여된 대상을 비추기 위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어느 순간 삶이라는 캔버스 위에 내 자신은 보이지 않고 대상이 먼저 보였습니다. 내 의지로 선택한 대상이라고 생각했는데 많은 부분 강요된 선택이었습니다. 내 자신이라는 탈을 쓴 사회가 미디어가 그리고 주위가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내 의지에서 비롯되지 않은 대상을 내려놓고 내 본연의 모습을 찾고 싶습니다. 하지만 부여된 대상에 기대어 살아온 세월이 깁니다. 대상이 보장해주는 따뜻한 조명 아래 풍성하게 차려진 식탁을 거부하기가 어렵습니다. 마찬가지로 대상이 없는 그림이나 이야기를 떠올릴 수 없는 그림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대상이 사라지고 이야기를 알 수 없는 작품 앞에 선 경험이 있을 겁니다. 마음속 환영을 그린 것 같고 악보가 공간을 유영하는 것 같은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의 그림이 그렇습니다. 도널드 저드(Donald Judd, 1928~1994)는 전시장 벽에 열 두 개의 직사각형 블록을 수직으로 붙여 놓았습니다. 짧은 설명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 작품을 만나면 무시하고 지나가고 싶습니다. 작가의 내면을 일방적으로 강압하는 것 같은 작품 앞에서 매번 소리 없이 스러집니다. 걷느라 지친 다리는 더 무거워집니다.


“꼭 요란한 사건이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결정적 순간이 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운명을 결정하는 드라마틱한 순간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사소할 수 있다. 엄청난 영향을 발휘하고 삶에 온전히 빛을 부여하는 경험은 소리 없이 일어난다. 그 놀라운 고요함 속에 고결함이 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 파스칼 메르시어)


우리 인생에서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게 되는 순간은 드라마틱한 장면보다는 일상에 숨은 경우가 많습니다. 조금만 시간을 투자하면 고요함 속의 고결함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인식입니다. 인식이 없다면 눈 앞에 로댕의 조각상이 있어도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아는 것만 눈에 보이고 인식한 것만 머릿속에 이미지화됩니다. 경직된 인식 안에 자신이 갇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먼저입니다. 틀을 깨부수는 것은 그다음의 일입니다. 카지미르 말레비치(Kazimir Severinovich Malevich, 1878~1935)의 <검은 사각형>과의 만남은 단순화된 고요함 속에서 대상으로 얼룩진 껍데기를 벗고서 자신 본연의 고결함을 발견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동안 말레비치의 그림을 수 없이 지나쳤을 겁니다. 그림은 나를 강경하게 붙잡지 않았습니다. 눈곱만큼도 시간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천장화 <천지창조>, 빛이 흐르는 모네의 <수련>, 고갱 바라기였던 고흐의 <해바라기>, 프랑스 7월 혁명을 담은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처럼 대상이 있고 익숙한 스토리를 담은 그림에게 눈길을 주는 나를 탓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 앞에 선 나를 발견합니다. 분명 예전과 동일한 그림입니다. 내 안에서 벌어지는 마음의 변덕이 있었을 뿐이겠지요. 삶의 진창에 허덕이던 나에게 말레비치가 말을 건넵니다.

‘당신이 짊어진 대상이라는 짐을 내려놓으세요.’

말레비치는 하얀 배경 위에 검은 사각형으로 단순화한 그림을 통해 그동안 예술이 지고 있던 대상이라는 짐을 내려놓게 했습니다. 대상에 기댄 기존 그림과의 단절입니다. 당혹스럽지요. 때로는 더 열심히 당혹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당혹감 그 자체에 충실하다 보면 단절은 과거의 답습을 끊어내는 지점이자, 새로운 세계로의 출발점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극도로 단순화된 정적인 그림에서 왠지 모를 긴장감이 엿보입니다. 흰색 배경과 가운데 검은 사각형 간의 관계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내 시선을 그동안 알지 못했던 대상 너머의 공간으로 옮겨 줍니다. 대상에서 벗어난 우리는 이제는 그 어떤 상상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림 앞에서 나는 짊어진 대상이라는 짐을 내려놓고 온전히 나만 바라보았습니다. 세상에 외톨이가 되어 나를 홀로 가두는 도피가 아닌, 내 스스로 혼자가 되어 새로운 여행을 시작하는 순간입니다. 우리가 여행을 떠나는 것은 현재의 나를 지우는 것이 아닙니다. 엉망이 된 주위와 관계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여행을 통해 흐려진 자신의 바탕색을 또렷하게 찾아 일상의 삶과 관계를 돈독히 하는 것입니다. 말레비치의 그림을 무시하고 지나쳤다면 다시 익숙한 대상을 붙들고 헛것에 기대어 살았을 겁니다. 잠깐의 멈춤을 갖고 온전히 자신만을 생각해 보는 일은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습니다. 힐링이라고 말하면 왠지 가볍고, 치유라고 말하면 너무 멀리 나간 것 같습니다. 내면을 바라보면서 삶의 매듭 하나 지었다고 해야 할까요? 어그러진 주춧돌이 다시 자리를 찾은 것처럼 단단해져 가는 기분이었습니다.


<검은 사각형>은 완전한 추상의 형태입니다. 철저히 대상 표현을 거부한 새로운 유형이죠. 대상이 없다 하여 공허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구체적인 메시지를 담보합니다. 그 구체성은 추상을 통해 그 어떤 상상도 가능하다는 관객들의 개별적 체험이 보편화된 개념입니다. 말레비치는 여기에 ‘절대주의’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짐을 내려놓으라고 말하는 말레비치의 그림은 더 이상 곤혹스럽지 않습니다. 반갑다는 말이 저절로 나옵니다. 살면서 한 번쯤은 만나고 싶었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다 내 탓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