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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윌마 Oct 02. 2020

한 걸음 걷습니다

작은 기쁨이 모이면 큰 어려움을 이겨낸다


집에서 조금만 걸으면 되는 거리에 동네 뒷산이 있습니다. 뒷산은 보통 높지 않아 편한 산이죠. 출근을 앞둔 아침에도 부담 없이 찾습니다. 덕분에 일상에서 놓쳤던 사계절을 뒷산이 챙겨줍니다. 우리는 매일 숫자와 씨름합니다. 숫자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없습니다. 목표를 향한 누적만이 인정받습니다. 비움으로 쓰임이 되는 숫자는 보이지 않습니다. 산을 타는 내내 숫자가 뇌리를 떠나지 않는  날이면 완만한 능선은 가파른 골짜기처럼 굴곡집니다.


언젠가 겨울 산에 올랐습니다. 나무는 낙엽을 벗었고 낙엽도 숨을 죽였습니다. 풍성했던 여름을 생각하니 나무는 더 말라 보입니다. 한참을 걷다 보면 꽁무니를 쫓던 현실의 소음마저 자연의 숨결에 동화되는 지점이 있습니다. 살짝 떠가는 느낌에 불편한 마음은 찾을 수 없습니다. 짊어졌던 짐에서 무게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걷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 나마저 벗어버린 그 순간 내가 걸어가는지 나무가 다가오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다가오는 그들에게서 떠오르는 장면이 있습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뼈대만으로 다가오는 나무는 어디선가 본 조각상입니다. 언젠가 만난, 아니 맞닥뜨린 알베르토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 1901~1966)의 조각상. 우리는 사슴 마냥 서로를 마주 보고 서 있었습니다. 겉을 채우는 데 익숙한 내게 조각상은 더욱 앙상하고 거칠게 보였습니다. 시선이 불편했는지 앙상한 뼈대로 선 조각상이 말을 건네더군요.
‘나는 굴곡 많은 사계절의 한 지점을 걷는 중입니다.'
그건 분명 아픔의 느낌이 아닙니다. 얼마나 더 앙상해질까 얼마나 더 거칠어질까 하는 세속적인 의문은 어느새 사라집니다. 앙상해져 간다는 시공간적 굴레에서 벗어나는 순간 조각상은 내게 엷은 미소를 건네줍니다. 그는 겨울 산의 나무와 다르지 않습니다. 조각상은 자신을 보지 말라고 했습니다. 대신 무엇인가 본질에 다가가기 위해 길을 걷는 자신을 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한 걸음 걷습니다. 가늘고 긴 뼈대는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들의 합이 한순간으로 빚어진 것입니다. 길게 늘어뜨린 앙상함은 그 안에 본질을 추구하는 영속성을 포함합니다. 자코메티는 황금비율 마냥 완벽한 인간의 모습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로타르 흉상처럼 곧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상처 받은 인간의 내면을 형상화하는데 힘을 쏟았습니다. 그에게 인간의 파멸이란 자신의 부끄러움으로 인해 공포의 바다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끄러움을 일깨울 어떤 신호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었죠. 두려운 과정을 거치면서 상처를 받겠지만 고뇌를 이겨내고 다시 일어서서 걸어야 하는 것이 인간의 생명에 깊이 새겨진 숙명입니다. 우리가 시대를 넘어 자코메티의 조각상에 담긴 자기 발견에 공감하는 이유입니다.



면접에까지 이른 취업 희망자라면 서류전형과 인성검사를 통과했다는 것이고, 회사 업무에 필요한 기본역량을 갖췄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역량은 넘쳐도 문제고 부족해도 문제죠. 여기에 인력을 필요로 하는 부서에서 원하는 특정 역량과 끈이 닿아 있으면 눈도장을 받기에 충분합니다. 예를 들어 최근에는 인공지능 관련된 스펙이 한 줄 들어 있으면 사람이 달라 보입니다. 이렇게 필요에 맞춘 듯한 스펙을 보면 ‘아니 거기까지…’라며 놀라울 뿐입니다. 하이라이트는 면접관들을 현혹시키는 말솜씨죠. 이미 현장 경험을 갖춘 신입사원들이 많은 이유도 있겠지만, 오랜 준비를 통해 자신이 완벽하게 정형화시킨 ‘대상’을 바라보며 하는 이야기인지라 면접관이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넘어가기 십상입니다.


면접 과정도 결국 문답을 통한 자기 발견입니다. 지금은 어엿한 회사원인 조카가 면접을 준비한다며 내게 조언을 구해 왔습니다. 아마 조카보다는 매형의 의지였을 겁니다. 이미 팀을 조직해 서로 모니터링까지 한 터라 눈에 띄는 문제는 없었습니다. 어린 여우는 강을 거의 건널 즈음 그 꼬리를 적시는 법이죠. 마지막이 문제였습니다. 입사 이후의 포부를 들려달라고 했더니 망설임 없이 ‘어떤 일을 맡겨 주셔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는 상투어가 튀어나왔습니다. 상투어에는 현실이 깃들어 있지 않습니다. 조직은 무작정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원하지 않습니다. 주어진 자원으로 최대의 성과를 올리는 것을 기대하지요. 면접관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가 아니라 ‘성과를 내겠습니다’를 기대할 거라는 말을 꾹꾹 눌러 건넸습니다. 조카는 한동안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진인사대천명(眞人事大天命) 아닌가? 최선을 다하면 성과는 따라오는 것 아닌가? 짧은 침묵에서 최선을 다한다는 자세가 무엇이 문제인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조카의 모습이 엿보였습니다. 어린 여우에게 아직은 이런 사고가 무리인 것인가? 순간 누나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면접 조언이라는 짧은 통화가 아쉬웠습니다. 한시가 급한 조카 입장은 달랐을 겁니다. 그 이후는 조카의 몫이었습니다.


인간이 최선을 다하는 이유는 무력하기 때문입니다. 그 말을 곧 면접을 치를 조카에게 차마 건넬 수 없었습니다. ‘최선’은 아무 곳에나 붙이는 것이 아니죠.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 방향을 모르고, 끌어 쓸 동력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는 상황에서의 최선은 자신은 물론 주위까지 위태롭게 만듭니다. 자기 기준이 없어 불안한 사람은 언제나 뛰기 마련입니다. 그것도 최선을 다합니다. 최선이라는 단어를 방패 삼아 눈 앞의 폭풍을 피하려는 방편이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것이죠. 최선이라는 단어를 기준으로 상황을 절대화시키면 상처 받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입니다. 상황을 감당한다는 것은 자기 그릇의 크기를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부족한 곳은 받침대를 튼튼히 세워야지요. 그래서 면접은 통과의례를 넘어서 자기 발견을 향한 첫걸음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면접장에서의 최선은 타자화된 자신이 아니라 정형화된 누구입니다.


자코메티에게 조각은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영역이었습니다. 더 이해가 되지 않은 것은 기존의  조각상은 모두 다비드상처럼 정형화된 모습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우리 사회의 모습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조각은 이미 정해진 길이나 다름없었죠. 이해하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지 않고 자신의 한계를 새로운 출발점에 두었습니다. 자코메티는 마음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면 고향 스탐파로 돌아와 엄마를 찾았습니다. 자코메티가 무슨 말이라도 할 량이면 엄마는 언제나 호기심 있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봐 주었습니다.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자코메티 역시 자신의 작은 변화에도 격려와 감탄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정해진 답이 없는 길 위에서 작은 기쁨은 큰 어려움을 이겨내는 힘을 주었습니다


겨울 초입에 다시 산에 올랐습니다. 여전히 나무는 말라 보입니다. 앙상해진 나무 옆에 서서 나도 나무가 되어 봅니다. 서로가 마주 볼 때는 듣지 못했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앙상한 나무는 헐벗고 아픈 것이 아닙니다. 굴곡 많은 삶의 한 지점에 선 나도 아픈 것이 아닙니다. 좌절한 것도 아닙니다. 힘들다는 것은 그만큼 원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걷는 이 곳은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삶의 한 지점입니다. 조각상이 한 걸음 걷습니다. 나무도 한 걸음 걷습니다. 한 걸음의 가치를 느끼며 나도 한 걸음 걷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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