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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윌마 Oct 03. 2020

극복하지 않을 용기

자신의 한계를 새로운 출발점에 세워야


갓 대학생활을 시작하던 무렵으로 기억합니다. 견디다 못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책을 한 권 치웠습니다. 책꽂이에 있는 것만으로도 감당하기 어려운 책이었죠. 신영복 선생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입니다. 핸드폰이 없던 시절 만남의 장소는 보통 서점이었습니다. 늦도록 소식 없는 친구를 탓하지 못하게 책은 친구를 대신해 주었습니다. 몇 권의 책을 훑어 읽었습니다. 마지막에 담담한 글씨를 배경으로 특이한 제목을 가진 책을 만났습니다. 친구와 만난 이후에도 그 책은 내 손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옆 사람을 단지 삼십칠 도의 열 덩어리로만 느끼게 하는 여름 징역살이와 옆 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 나가는 겨울 징역살이의 극명한 대조를 담은 표지 구절만으로도 상상하기 힘든 사색의 깊이가 느껴졌습니다. '나는 걷고 싶다'던 수인들의 바람을 마음에 새기며 책 읽기를 마쳤습니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서 책상 위에 놓여있던 책을 한동안 바라보았습니다. 손에 잡아보고 다시 내려놓고 뒤집어 보고 다시 내려놓았습니다. 뭐 하는 짓이냐며 스스로도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바로 다시 읽어 볼까 싶었지만 결국 며칠을 그대로 책상 위에 두었습니다.


읽을 때는 몰랐는데 책은 자꾸만 나를 불편하게 했습니다. 책상 위에 있는 것만으로도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책꽂이에 꽂았습니다. 그런데 방에 들어올 때마다 자꾸 책꽂이로 시선이 갔습니다. 나는 꼭 빚진 사람이었습니다. 한동안 시달리다가 결국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웠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힘들었던 걸까요?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선생님을 닮고 싶었습니다. 아니 흉내라도 내보고 싶었습니다. 책이란 씹어 먹든 찢어 먹든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게 내가 아는 지론이었습니다. 교과서와 만화책밖에 몰랐던 나는 순진하다 못해 바보였습니다.


선생님은 책의 어느 한구석에서도 당신을 닮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곳에서 인간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을 바라보셨죠. 당신의 어깨를 딛고 올라 더 넓은 세상을 보라고 하신 건데 알지 못했습니다. 일면식도 없었던 선생님을 닮고 싶다는 생각을 한 순간 책은 벽이 되었습니다. 답이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선생님을 닮고 싶다는 프레임에서는 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나를 딛고 오르라던 루쉰의 메시지를 듣고서야 이해가 되었습니다. 시간이 꽤 흐른 후에 선생님 책을 다시 책꽂이에 꽂았습니다. 선생님은 관계를 사람과 사회를 변화하게 하는 출발점에 두신 것이고, 나는 내 한계를 시작점에 두었습니다.


답이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버지라는 멍에를 아버지에게 씌우고는 아버지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아버지는 처음부터 아버지로 태어난 사람이었을까요? 아버지도 나처럼 소년이었고 청년이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젊은 아빠였습니다. 아버지를 한 인간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버지와 관계를 다시 하는 시작점입니다. 아버지와 야채곱창에 소주 한 잔 하면서 부자 관계만 얘깃거리가 된다면 다음 술자리는 없습니다. 일방적으로 혼나는 자리거나 무거운 주제만 다루는 술자리는 두 사람 다 사양합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거리를 극복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인간 대 인간으로서 이해를 새로운 관계의 시작점으로 삼았습니다.


신영복 선생님은 그림이 언어의 경직된 논리를 부드럽게 해 주고 또한 그림 그 자체가 여백이 되어 바라보는 이들의 읽기를 돕는다고 하셨습니다. 나를 딛고 오르라는 선생님의 서화에는 시대의 청년들이 더 멀리 볼 수 있도록 기꺼이 어깨를 내어 주신 스승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자진하여 자신의 몸을 해부하게 내어준 허준의 스승 유의태가 반듯이 누운 모습이며, 청년들에게 자신을 딛고 오르라며 등과 어깨를 내어준 루쉰의 뒷모습입니다. 세상의 글과 글에 담긴 큰 뜻을 절벽처럼 솟은 암벽으로 여겨 절망하지 말고 암벽을 마주 보고 선 스승의 어깨를 발견하라는 기대가 서화에 담겨 있습니다. 망설이지 말고 그 어깨를 밟고 서서 더 멀리 보라는 희망을 말합니다. 쉽지 않은 세상살이에 경직되어 답을 찾지 못하는 나에게 여백이 되어준 그림입니다.


미치면(狂) 미친다(及)는 식으로 끝까지 가보라는 얘기는 평범한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피겨 퀸 김연아 선수를 기준으로 삼으면 모두가 힘들어집니다. 대신 배우는 과정이 깊어질수록 시점이라는 것이 보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시점이란 습득한 지식과 경험이 일상에서 자연스레 발휘되는 지점입니다. 그 지점에 이를 때까지 우리는 끊임없이 '너 자신을 알라'며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지금보다 더 발전할 수 있을까? 포기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은가? 하지만 그 지점에 이르지 못한 채 넘지 못할 장벽을 느낀다면 그 한계를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극복했는지 여부는 일의 마지막 순간에 하는 판단이 아닙니다. 일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서서히 누적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수많은 용기 바다극복하지 않을 용기를 더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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