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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윌마 Oct 04. 2020

깨진 맹세 (Broken Vows)

이해란 자신의 무지를 겸손히 인정하고, 그 차이를 통렬히 실감하는 과정


시작은 타워브리지였어요. 다리 중간에 서서 템스 강을 보니 나도 흘러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런던브리지와 워털루 브리지를 지나 런던아이가 크게 보일 때쯤 빅벤의 종소리가 은은하게 귀에 내려앉습니다. 그렇게 템스 강을 끼고 걸으면 영국의 중세와 현대를 동시에 만납니다. 타임머신이 따로 필요 없습니다. 먼 길에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쯤 커다란 가로수가 있는 풍경 사이로 고즈넉한 갤러리 테이트 브리튼이 눈에 들어옵니다. 빅토리아 시대를 살아 낸 영국 대중과 만날 수 있는 곳, 그래서 가장 영국다운 갤러리입니다.


산업화 이후 가장 심하게 타격을 받은 곳이 가정입니다. 가정의 역할이 새롭게 정의되었으니까요. 목적은 단순합니다. 노동력을 극대화하기 위해서죠. 남성은 바깥에서 노동력을 제공해서 돈을 벌어오고, 여성은 집안에서 아이를 돌본다는 가족 이데올로기가 자리 잡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인 저소득 가정은 남성 혼자만으로 생계유지가 안 됩니다. 여성은 어쩔 수 없이 열악한 노동 현장으로 내몰립니다. 현실과 동떨어진 가족 이데올로기까지 겹치면서 집을 나와 일하는 여성은 주위의 낯선 시선까지 견뎌야 합니다. 산업화로 다양한 신분 계층이 생겨나고 그 요구가 분출하던 시대지만 사회는 다양한 요구를 수용하지 못합니다. 결과는 사회 구성원들 간 갈등으로 나타납니다. 갈등의 피해는 고스란히 여성의 몫으로 돌아옵니다. 감당할 수 없는 데도 결국 감당해 내야 하는 것이 약자의 운명입니다. 테이트 브리튼은 가족 이데올로기라는 사회성 짙은 메시지부터 계층 간 갈등 그리고 대중의 희로애락을 담아 현재라는 얼굴에 비추고 있습니다. 그렇게 낯설면서 익숙한 풍경들이 이어집니다. 이런 속내를 뒤로 하면 테이트 브리튼은 아름다운 아가씨들을 만날 수 있는 좋은 공간입니다.


존 에버렛 밀레이의 <오필리아>는 햄릿이 연모했던 오필리아가 주인공입니다. 아버지를 죽인 원수가 자신에게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던 햄릿이죠. 하루아침에 아버지와 연인을 잃은 충격에 그녀는 미쳐 버립니다. 결국 강물과 하나 되어 서서히 죽어갑니다. 오필리아는 강물과 꽃 그리고 나무와 하나가 됩니다. 그리스 신화에도 비슷한 장면이 있습니다. 궁술의 신인 아폴론은 에로스의 작은 활을 우습게 여깁니다. 활로 무서운 뱀 피톤을 죽여 자만에 빠진 아폴론에게 작은 고추는 그저 작은 고추일 뿐입니다. 작은 고추가 맵다는 사실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기분이 상한 에로스는 아폴론에게 금화살을 쏘고 예쁜 요정 다프네에게 납 화살을 쏩니다. 이렇게 아폴론은 쫓고 다프네는 도망치는 비극이 시작됩니다. 사랑의 날개를 단 아폴론의 손길을 피할 수 없었던 다프네는 아버지인 강의 신 페네이오스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저를 숨겨주세요. 아니면 호감을 샀던 제 모습을 바꾸어 주세요.”
아폴론의 교만이 에로스의 복수를 낳아 괜한 다프네만 나무로 변해 갑니다. 월계수 나무로 변해가는 다프네가 너무나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더 가슴이 아픕니다. 그렇게 수많은 아름다움과 비극을 담은 그림들을 스치며 지나갑니다.


그렇게 지나가다 한 그림에서 걸음을 멈췄습니다. 계란형의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은 눈을 감고 있습니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가 따로 없습니다. 생각에 잠긴 채 벽에 기댄 얼굴은 평온합니다. 그녀를 비추는 햇살은 따사롭기 그지없습니다. 그녀는 담쟁이가 둘러진 벽에 한쪽 등을 의지한 채 서 있습니다. 그 모습에서 외로움이 느껴집니다. 외로움이 보이는 순간 그녀에게만 집중되었던 내 시선은 전체를 더듬어 갑니다. 아! 그녀가 기댄 곳은 건물의 벽이 아니고 담이네요. 무심히 지나쳤다면 평생 벽에 기대어 해바라기 하는 여인으로 기억했을 겁니다. 담 왼쪽으로 나무로 된 문이 눈에 들어옵니다. 부서지고 벌어진 문 뒤로 남자와 여자의 얼굴이 부분적으로 드러납니다. 머리까지 올라간 남자의 손에는 꽃이 들려 있고 여자의 손은 그 꽃을 향해 갑니다. 다른 세상을 사는 것 같은 남자와 여자는 서로를 희롱하며 웃습니다.


그제야 평온한 얼굴과 따사로운 햇살이 역설적으로 다가옵니다. 왼쪽 가슴 맡을 받히는 손에서 아픔의 깊이가 느껴집니다. 담 모서리를 잡은 손은 갈피를 잡지 못하는 그녀의 마음입니다.
'세상 모든 게 변해도 너만은 변하지 않을 거라 믿었는데'
언젠가 들었던 사랑의 속삭임은 더 이상 그녀의 몫이 아닙니다. 상처 받은 마음은 이제 회복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녀는 화내지 않았고 싸우지 않았습니다.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씩씩거리는 숨소리 한 번 내지 않았습니다. 들킬까 두려워 울음은 안으로 삼킵니다. 남은 건 어쩔 수 없는 평온뿐입니다. 그녀의 모습에서 한 그루 월계수로 변한 다프네가 떠오릅니다. 필립 캘더른(Philip H. Calderon, 1833~1898)의 <깨진 맹세>입니다.


미야모토 테루의 <밤 벚꽃>에서 나이 오십을 바라보는 중년의 아이코도 젊은 시절 비슷한 아픔을 겪었습니다. 아이코는 일 년 전에 외아들을 잃었습니다. 더 거슬러 십 년 전에 이혼을 했습니다. 하루는 벚꽃이 잘 보이는 방에 하룻밤 묵게 해 달라는 가난한 신혼부부에게 이층 방을 내줍니다. 벽에 기대어 그들의 속삭임을 엿들으며 과거를 회상합니다. 그때도 벚꽃은 피었고 사랑도 피었습니다. 스물아홉의 아이코는 바람을 피운 남편에게 단호하게 헤어지자고 말했습니다. 많은 것을 내려놓은 지금 내면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아픔이라는 자갈밭에 돌 하나 더 보태는 것일 뿐인데 그때는 몰랐습니다. 아파하는 자신을 돌보기는커녕 눈 앞에 현실은 선택을 강요했습니다. 신혼부부의 속삭임을 뒤로하고, 지는 밤 벚꽃에 현재의 자신을 비춰 봅니다. 꽃이 지듯 또 하루가 멀어져 갑니다. 그녀는 지금이라면 어떤 여자라도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설득하지 않고는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콩 한 조각 술 한 모금도 예외가 될 수 없죠. 이 정도야 괜찮을 거라고 자신을 설득한 후에 가능합니다. 못난이도 내 사랑이 될 수 있는 건 겉모습 말고 그녀만이 가진 매력이 나를 설득했기 때문입니다. 눈을 떴지만 다시 누워 버리는 것은 될 대로 되라는 식의 포기가 나에게 먹혔기 때문입니다. 자기 설득과 타협이 되지 않으면 늦잠은 불가능합니다. 자기와 타협한 후에 내린 선택의 합이 바로 자신의 삶입니다. 선택의 자유가 없다면 자신의 삶은 없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이유로 선택된 삶은 그나마 견디기 수월합니다. 단호하게 선택했던 삶마저도 아이코는 후회했습니다.


그림의 그녀는 월계수 나무로 변했던 다프네와 다르지 않습니다. 나는 말 못 하는 나무의 아픔을 고 있습니다. 그렇게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아픔의 시간을 보내고, 다시 그녀의 평온한 얼굴을 바라봅니다. 이제 보니 그녀의 시선은 문 뒤의 남녀를 떠나 자신의 내면을 향합니다. 땅에 뿌리를 내린 채로 내면에서 울리는 목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그 자리에 서서 살아있기에 동행할 수밖에 없는 존재의 아픔을 바라봅니다. 철학자이자 시인인 마크 모네는 ‘들음은 모든 중요한 것들에 이르는 문과 같다’고 했습니다. 문 앞에 서서 마음의 문을 두드립니다. 두드리는 것은 곁의 자리에서 공감해 주는 것이지요. 경청과 공감은 안아주는 환경처럼 기다리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눈 앞에 현실에 급급해 닫힌 문을 부수고 들어가 선택을 강요하는 게 아니라 자유의지로 문을 열고 나올 수 있게 지켜봐 주는 것입니다. 경청과 공감을 통해 정서가 안정되면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공포와 분노로 연결 짓지 않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결국에는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이죠.


나는 그녀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네지 않았습니다. 대신 내면의 소리를 경청하고 공감해 주는 그녀의 이 순간을 지지합니다. 이 평온한 시간이 그녀에게 강요된 선택이 아닌 이해의 과정이기를 기대합니다. ‘이해란 타인 안으로 들어가 그의 내면과 만나고, 영혼을 훤히 들여다보는 일이 아니라, 타인의 몸 바깥에 선 자신의 무지를 겸손하게 인정하고, 그 차이를 통렬하게 실감해 가는 과정’입니다. 소설가 김애란 님은 나에게 이 말을 전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기다려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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