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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윌마 Oct 06. 2020

외설적이다

근거 없는 차별은 결국 자신을 왜곡하고 스스로를 차별하는 것


‘감각적이다’ 표현이 잘 어울리는 이 그림은 영국 화가 헨리 스콧 튜크(Henry Scott Tuke, 1858~1929)가 그렸습니다. 햇빛에 잘 익은 남자의 등 위로 귓불이 붉습니다. 따뜻한 햇살은 빛나는 육체가 자기 자리인양 그의 어깨 위를 떠나지 않습니다. 현실이면서도 현실에 대한 감각을 무디게 만드는 젊은 남자의 등. 빛이 피부에 미치는 색채 효과를 포착하기 위한 노력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동성애를 다룬 소설 김봉곤의 <여름, 스피드> 표지에는 같은 모델의 그림이 실려서 화제가 되었죠. 그 전에는 1970년대 게이 문화가 사회에 알려지면서 자주 소개되었습니다. 엘튼 존은 ‘퀸’의 리더 프레디 머큐리가 죽은 후에 머큐리에게서 선물을 받았는데 헨리 스콧 튜크의 그림이었습니다. 머큐리가 죽기 전에 자신을 위해 그림을 준비했다는 것을 알고 아이처럼 울었죠. 머큐리는 양성애자고, 엘튼 존은 동성애자입니다.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작품을 향한 다른 시선이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내게는 온전히 사람을 추구하고 멋진 젊음을 만끽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결과적으로 튜크는 남성 누드의 부활을 주도했지만 처음부터 젊은 남자의 누드를 그린 것은 아닙니다. 초기 그림에서 튜크는 신화적 맥락에 젊은 남자의 몸을 배치했는데, 비평가들로부터 다소 형식적이며 흐릿해서 맥이 없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어촌 근처에서 살았던 그의 어린 시절 기억 속에는 바다와 배 그리고 아름답고도 건강한 육체를 뽐내던 젊은 남자의 모습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합니다. 튜크는 신화적 주제에서 벗어나 햇살 가득한 바다를 배경으로 젊은 남성 누드를 그리기 시작합니다. 바다를 배경으로 빛나는 육체를 표현해야 했기에 세밀한 묘사가 아니라 윤곽을 지워내며 직관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매끄럽고 세련된 터치가 대세이던 시절이었지만 야외에서 누드를 그리기에는 빛과 함께 시시각각 움직이는 색의 미묘한 변화를 자신의 주관적인 느낌으로 표현했던 인상파 기법이 적합했을 겁니다. 대상을 화폭에 옮기는 것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주위의 시선이었습니다.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차별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 때문에 야외에서 누드를 그리는데 관대한 지역을 찾아 헤매야 했습니다. 작가는 자신의 감정 외에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주류 사회가 중시하는 가치와는 다른 차이를 끌어냈습니다. 그가 당대 주류 사회에 인정받는 이야기와 화풍에 안주한 채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면 청년과 바다를 이렇게 아름답게 그려낸 그림은 존재하지 않았을 겁니다. 다름을 인정하는 화가의 충동이 담긴 이 그림은 그래서 외설적입니다.




플레이보이 하면 여성 사진을 주로 담는 남성 취향의 성인 잡지를 떠올리지만 초기에는 새롭고 지적인 소설은 물론 사회에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의 인터뷰처럼 고상한 읽을거리를 같이 실었습니다. 릴린 먼로가 장식했던 표지에서 몇 장을 더 넘기면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트 러셀, 알베르트 슈바이처, 스티브 잡스, 빌 게이츠, 칼 세이건,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름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세상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고 특별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던 SF 소설의 거장들에게 등용문이 되기도 했지요. 과학 소설 분야에서 노벨상을 받는다면 단연 1순위로 평가받는 어슐러 K. 르 귄도 그중에 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안락한 생활이 누군가의 희생 위에 세워졌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을 때면 르 귄의 대표작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이 미디어에 소환됩니다. 행복한 도시 ‘오멜라스’와 희생양의 존재를 견딜 수 없어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오멜라스에 사는 사람들에게 행복이란 구별할 줄 아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오멜라스에서는 그 누구도 고통받지 않고 모두가 풍요롭고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하지만 단 한 사람, 지하에 갇혀 고통받는 한 명의 아이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오멜라스의 행복은 지하에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아이의 희생을 담보로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신음소리마저 잃어버린 아이가 지하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오멜라스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직접 지하를 찾은 사람들은 아이를 보고 나서 충격을 받지요. 인간은 진실이라는 바람 앞에서 흔들립니다. 붙잡아야 할 열매가 없다면 대수롭지 않겠지만, 지켜야 할 열매가 소중할수록 진실은 우리를 거세게 흔들어 댑니다. 진실이 불편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희생양의 존재를 부정하는 순간 오멜라스 사람들이 누리는 행복은 사라집니다. 결국 총구의 방향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고 나아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빠져듭니다. 여러 감정들이 복잡한 층위를 이루면서 충격은 길들여집니다. 행복을 위해 한 명의 희생은 무기력하게 묵인됩니다.


르 권은 길들여진 충격을 거부하고 희생양의 존재를 견딜 수 없어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을 이야기 마지막에 그려 넣었습니다. 그들은 오멜라스로 다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1969년에 쓰인 소설이지만, 주제를 드러내기 위해 도입한 설정과 은유는 현재에도 낯선 신선함을 줍니다. 그 내밀함을 따라가다 보면 기회는 평등하고 차이가 인정되는 세상에 닿아 있는 르 귄의 시선을 발견할 수 있죠. 그의 작품이 플레이보이에 실려서가 아니라 첨예하고 논쟁적인 문제를 사회적으로 금기시된다는 이유로 차별하지 않고 토론의 장으로 끌어내었기 때문에 르 귄의 작품은 외설적입니다.


삶에 대한 내밀한 확신은 정해진 답을 알거나 미래를 보았기 때문은 아닐 겁니다. 무슨 계시처럼 한 순간에 얻는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 경작되어 쌓이는 것이죠. 차별이 누적되어 겪는 아픔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상대를 맞다 틀리다 평가하지 않고 다름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면 내 안에 쌓인 편견들이 불편하게 다가옵니다. 존재 저변에 다양한 층위로 얽힌 인간의 삶을 고려한다면, 차이를 이유로 아무런 근거 없이 한쪽을 차별하는 일이란 결국 자신을 왜곡하고 스스로를 차별하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그것이 오멜라스의 아이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희생양의 존재를 견딜 수 없어 오멜라스를 떠난 사람들이 모여서 새로운 공간을 만들었다면 희생양을 묵인했던 오멜라스와 차이를 만들었을지 궁금합니다. 내가, 우리가, 그리고 우리 사회가 만들어낸 결과에 비춰본다면 부정적인 것이 사실입니다. 누군가의 희생 위에 나의 행복이 서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고백하기 위해 우리는 지금보다 더 외설적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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