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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윌마 Oct 07. 2020

캔버스는 일상의 떨림을 담는 그릇

과거의 답습을 거부하는 화가의 자존심은 죽음보다 강하다


작품명 <레드>, 추상표현주의 화가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1970)가 죽기 직전에 그린 작품입니다. 빨간색 색면 덩어리 두 개가 커다란 캔버스에 물들여져 있습니다. 경계가 있는 듯 없는 듯 서로 스미는 색면은 일상을 사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요?
그림을 그려보라는 권유를 자주 받습니다. 처음 그 얘기를 들었을 때는 ‘내가 무슨?’ 하며 고개를 저었죠. 그런데 자꾸 받다 보니 쑥스러움은 누그러지고 마음이 동하더군요. 그리게 되면 보던 때와는 다른 차원의 세계를 만날 수 있다는 게 동기였습니다. 예전에 붓글씨를 쓰면 그리냐는 핀잔을 받았습니다. 아무리 필사여도 자신의 글씨를 써야 하는데, 원본을 그대로 재현하려고 하니 글씨도 그림도 아닌 이상한 결과물이 나왔던 겁니다. 결국 삶도 자기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이고, 그림 역시 자신의 결을 찾는 과정인 만큼 그림을 그려보라는 권유를 받는 날이면 이런저런 생각에 긴 밤을 보냈습니다.


단순히 빈 공간을 채워가는 그림은 사생일 수밖에 없습니다. 창조자가 아닌 이상 무에서 유를 뚝딱 만들어 버리는 재생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나는 고흐 마냥 세상의 아픔을 보듬어주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한 순간의 장면이 아니라, 강물처럼 흐르는 시간을 담아내고 싶었습니다. 과거의 기억을 현재로 역류시켜 다시 현실화되고 입체화 된 아픔을 따뜻하게 보듬어 주고 싶었습니다. 나는 한 편의 드라마 같은 그림을 원했던 모양입니다. 드라마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꽃처럼 피고 집니다. 핀 꽃이 아니라 피어나는 꽃을, 진 꽃이 아니라 스러져가는 꽃을 그릴 수는 없을까요? 정해진 답을 향해 마지못해 옮기는 걸음이 아니라 걷는 걸음마다 생동하는 그림 말입니다. 꽃이라는 하나의 형태에 시간의 흐름을 부여하는 것은 연작이라면 모를까 어려운 일 같습니다. 그렇다면 꽃 옆에 나비를 그리면 어떨까요? 꽃과 꽃을 바라보는 누구를 그리면 어떻게 될까요? 대상 사이에 만남과 헤어짐이라는 관계가 피고 집니다. 꽃과 나비가 만나 수많은 이야기가 탄생합니다. 빛이 어둠에서 벗어나듯, 어둠이 빛에 스미듯, 만남과 헤어짐은 서로 스미고 벗어납니다.


스미고 벗어나면서 서로에게 새로운 발견을 가능하게 했던 관계의 다른 한쪽에서 정형화되고 습관화된 정체가 자라납니다. 프레임에 갇히면 우리의 시선은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구체적인 형태에 매몰되면 다른 시각을 갖기가 어렵습니다. 꽃과 나비의 만남도 어느 순간 꽃을 찾아 날아든 나비라는 관계만 눈에 들어옵니다. 관계가 정체되는 순간입니다. 마크 로스코의 선택은 구체화된 외형을 벗은 단순화된 커다란 색면이었습니다. 그림에서 서로 스미고 벗어나는 느낌, 즉 떨림의 느낌은 색면과 색면 사이의 관계로 표현이 가능합니다. 꽃과 나비라는 형체를 버리고 색면과 색면 사이의 관계에 기대면 나와 너, 나와 대상이라는 관계가 쉼 없이 상호작용을 합니다. 정체된 관계가 다시 떨리기 시작하는 순간입니다. 드디어 그림에 삶이라는 드라마가 어립니다. 강물 같은 시간의 흐름이 느껴집니다. 나는 지금 네모난 캔버스는 단순한 재생이 아니라 관계의 떨림을 담는 그릇이어야 한다고 말하는 색면을 한없이 바라보고 있습니다.


로스코의 삶은 자연의 봄, 여름, 가을, 겨울처럼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합니다. 그 자신 역시 소외된 소수자였기에 초기 작품에는 사회적 문제를 고발하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러시아에서 건너온 유태계 소년에게 미국 사회는 친절하지 않았습니다. 세계를 뒤흔든 전쟁과 대공항의 시련을 겪으면서 그는 소통의 단절과 외로움을 그림의 주제로 삼았습니다. 사회 문제에 특별히 관심을 가졌던 로스코는 외형을 가진 구상회화에서 벗어나 내면으로 침잠하여 마음의 치유를 이야기합니다. 색채는 어느 한쪽에 치우지지 않고 상호적으로 주고받으면서 의존성을 갖습니다. 광활한 대지와 높은 하늘, 흰색과 검은색, 삶과 죽음이 서로 속삭입니다. 번지고 스며들고 때로는 서로 겹치면서 구성원들 간의 만남과 헤어짐을 그리고 그 과정에서의 소통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사방에서 물감을 뿌려 놓은 것 같은 그림은 관객 입장에서 보면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숙제입니다. 소통하려는 시도에서 오히려 소통이 좌절되는 경험을 합니다.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었죠. 새로운 시도는 점점 발전하며 복잡한 생각을 단순하게 표현하는데 이릅니다. 모네가 빛의 화가라면 로스코는 색면의 화가입니다. 커다란 사각형 모양들이 화면을 채우면서 그림이 주는 메시지는 명료해집니다. 독일의 색면화가 고트하르트 그라우브너의 말을 빌리면 자연 속에 나타나는 색은 그 자체로서 생명이며 시간의 변화를 보여주는 자연의 섭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색의 변화를 호흡에 비유했습니다. 끝을 알 수 없는 색채, 커다랗고 모호한 색면, 엄청난 크기의 직사각형 캔버스에 담긴 호흡 앞에서 누구는 탄식을 토하고 누구는 환희를 맛봅니다.

마음의 치유는 궁극적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고 그것이 마음에서 삶의 현장으로 이어지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그래야 다시 시작되는 봄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로스코는 치유 이후의 과정을 관객의 몫으로 남겨둡니다. 그림에서 돌아서는 우리의 등에 때로는 따뜻하고 때로는 냉엄한 빛을 비춰줍니다.


로스코는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마음의 치유라는 종교적 체험을 가능케 한 이 마법사는 정작 자신의 방향을 찾지 못합니다. 명성은 얻었건만 일상은 예전 같지 않습니다. 아내와의 별거, 함께 그림을 그렸던 동료와의 갈등에 몸마저 생명을 잃어갑니다. 그에게 다시 시작되는 봄은 끝내 오지 않았습니다. 과거와 다르지 않은 봄은 로스코에게 의미 없는 시간의 흐름일 뿐입니다. 일상의 떨림을 담지 못하는 캔버스는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로스코의 염원이 담긴 붉은 색면은 가슴 떨리듯 아름답습니다. 유작 <레드> 앞에서 로스코의 시선은 어디에 머물러 있을까요?

북극을 가리키는 지남철은 무엇이 두려운지
항상 그 바늘 끝을 떨고 있습니다.
여윈 바늘 끝이 떨고 있는 한
그 지남철은 자기에게 지니워진 사명을 완수하려는
의사를 잊지 않고 있음이 분명하며,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도 좋습니다.
만일 그 바늘 끝이 불안스러워 보이는 전율을 멈추고
어느 한쪽에 고정될 때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 합니다.
이미 지남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일상에 묻혀 떨림을 멈출 때마다 마음속으로 고 민영규 선생님의 <떨리는 지남철>을 되새김질합니다. 마크 로스코의 색면 그림은 마음 한 구석 어딘가 내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가슴 떨린 설렘을 알려주었습니다. 마크 로스코 역시 죽기 전에 다시 떨리는 일상을 캔버스에 담고 싶었습니다. 과거의 답습을 거부하는 화가의 자존심은 죽음보다 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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