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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윌마 Oct 08. 2020

진실한 이별은 만남이다

외롭지만 외롭지 않은 여행

추억, 2018년, 이은경


야간열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열차는 기지개를 펴듯 느리게 출발하더니 곧 속도가 붙습니다. 여행을 시작한다는 들뜬 분위기는 열차의 속도에 반비례해서 잠잠해지죠. 열차가 나아가기 위해 앞과 뒤로 흔들리면, 하루를 살아낸 노곤한 몸은 그 옛날 나를 토닥여주던 누군가의 품속을 기억해 냅니다. 대낮 같은 도시를 벗어나면 시선은 자연스레 창문 너머를 향하죠. 무엇을 찾는 것도 아니면서 칠흑 같은 어둠에서 눈을 떼지 못합니다. 때마침 저 멀리 불빛 하나가 몽글몽글 커져오네요. 누군가 초롱을 들고 마중을 나온 걸까요? 이런 궁금함마저 내려놓으면 아른거리는 불빛이 저 멀리서 내게로 오는 것인지, 아니면 내 마음속 추억 하나가 어둠으로 흘러가 불을 밝힌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지점을 만납니다. 무의식이 반갑다 인사를 건네며 옆자리에 앉는 순간이죠. 삶의 어느 지점에서 놓쳐버린 기억들이 하나 둘 불을 밝히며 나를 반기는 모양입니다.


기억이라는 실재는 우리 안에서 어떻게 존재할까요? <박사가 사랑한 수식>에서 80분밖에 지속되지 않는 기억을 붙들기 위해 박사 스스로 자신의 옷에 붙인 메모지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영화 <메멘토>에는 벽에 대중없이 붙여 놓은 빛바랜 즉석사진이 나옵니다. 브레인스토밍이 끝날 때면 각기 다른 색상의 옷을 입고서 벽면에서 울긋불긋 장관을 연출하던 메모지를 한참 동안 바라보곤 했습니다. 자연스럽게 내 기억도 울긋불긋 여러 색깔의 메모지나 즉석사진 같은 모습으로 저장되어 있을 거라고 여겼습니다.


울긋불긋한 모양을 보면 잃어버린 기억을 만난 양 발길을 멈췄습니다. 이번에 만난 작품은 세 가닥으로 머리 땋기를 하듯, 세 개의 천을 땋아 평면에 똬리를 튼 조형물입니다. 천은 각기 다른 색깔과 문양을 하고 있습니다. 이은경 작가의 <추억>입니다. 작품에서 받은 첫인상은 ‘기억의 편린을 길게 엮어서 한 장의 이미지로 똬리를 튼 모습’입니다. 내 인생도 이렇게 한 장의 이미지로 표현하면 어떤 모양일지 궁금해지더군요. 작가는 아기 때 사용했던 이불 천과 무대의상의 드레스로 사용하고 남은 천을 함께 땋으면서 과거와 현재를 온전히 추억했습니다. 기억들이 모여 다시 하나로 탄생한 자신, 그것은 새로운 출발의 동력이었습니다. 나는 작품 앞에서 주마등처럼 스치는 추억을 더듬듯 한 번은 밖에서부터, 또 한 번은 안에서부터 나선형의 똬리 길을 추적해 갔습니다. 섞이고 꼬인 헝겊 때문에 눈만으로는 추적이 어려워 손가락 도움을 받았습니다. 지나가던 관람객은 손가락을 빙빙 돌리는 나를 이상하게 생각했을 겁니다. 기억의 원류에 닿고 싶은 인간의 본성을 표현한 행위 예술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테니까요.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읽고서 기억이라는 실재를 담고 있는 '시간'의 존재 방식에 대해 사유할 수 있었습니다. 불충분한 기억과 불충분한 기록에 기반한 현재의 나. 새로운 진실이 우리를 엄습했을 때, 우리는 자연이 뒤집히고 시간이 거꾸로 흘러가는 느낌을 받습니다. 상황에 겨워, 사람에 겨워, 무엇보다도 나 자신에 겨워 풀지도 맺지도 못한 채 망각에 묻어버린 매듭은 강물이 역류하듯 돌아와 나와 다시 대면합니다. 파스칼 메르시어의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읽는 내내 억이라는 흔적을 간직한 '공간'의 존재 방식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대학에서 고전문학을 강의하며 평범한 일상을 살던 주인공 그레고리우스는 우연히 포르투갈 여인을 도와줍니다. 그녀의 포르투갈어에 꽂힌 그는 서점에서 포르투갈 관련 책을 찾다가 아마데우 드 프라두가 쓴 에세이를 발견합니다. 그리고는 바로 현실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프라두를 찾아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몸을 싣습니다. 프라두의 흔적을 간직한 공간들은 그레고리우스에게 자기 인생을 추억할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었습니다.


인생이라는 여행에서 우리는 거치는 곳마다 흔적을 남깁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살아온 흔적들의 합입니다. 흔적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란 결국 그 합인 나에게로 돌아오는 여정입니다. 의도치 않게 내 자신을 돌아보는 과정에서 자주 열차를 떠올렸습니다. 어느 역에다 나를 내려놓고는 무작정 달리기만 하는 나는 열차였습니다. 내가 흔적을 남겼던 수많은 역은 어느새 퇴색한 간이역과 폐역이 되었습니다. 기차에서 추억이라는 감성적 이미지를 걷어내면 기차는 한 번 타면 다음 역까지 내릴 수 없는 무쇠 방입니다. 그런데 다음 역에서 내릴지 여부를 내가 결정하지 못하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여행을 계속할지 그만둘지를 내가 결정하지 못하자, 무쇠 방처럼 매정한 운명이 그 자리를 대신했습니다. 나는 기차에 몸을 싣고 있다는 것마저 자각하지 못한 채 흘러갔습니다. 그래서 그 흔적은 내 것이면서도 내 것이 아니었고, 내 경험이면서도 내가 경험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나는 곳곳에 흩어져 있는 흔적을 모아 나를 재구성해보고 싶었습니다. 똬리를 풀어서 평생 만나지 않을 기찻길을 따라가다 보면 나라는 사람의 원류에 닿을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때 묻지 않았던 내 본연의 모습을 찾으면 그곳에서부터 다시 흘러서 새로운 나로 거듭나고 싶었습니다. 최소한 타자의 욕망에 물들지 않은 순수한 나의 욕구가 궁금했습니다. 순수하고 완벽한 모습에 매달리면서 좀처럼 인식의 틀을 깨지 못하는 나를 상담자는 안타까운 시선으로 쳐다보았습니다.
“타협하는 내 자신을 믿지 못하겠어요.”
“타협을 왜 부정적으로 생각하세요?”
“불순물이 섞이는 느낌이에요.”
“또 0과 1만 보세요. 0과 1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모든 이야기 안에 깔려 있어요. 성공 아니면 실패, 백 점 아니면 빵 점, 시작 아니면 끝, 과정은 없어요. 일하는 데는 도움이 될 것 같아요. 그런데 그렇게 살면 얼마나 힘들겠어요? 실제로는 얼룩덜룩한데 흰색과 검은색만 보고 산다면 말이에요.”
“알면서도 잘 되지 않네요. 어떻게 하면 바꿀 수 있을까요?”
“꼭 바꿔야 할까요? 수학 문제처럼 풀어야 할 숙제로 보면 답이 없어요. 그걸 인식했다는 게 중요한 거예요. 아예 모르면서 0과 1 사이에서 헤매는 것과 0과 1 사이에서 헤매다가 어! 내가 또 이러고 있네 이러면 힘들지 하면서 조금 다른 방식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은 다르죠. 알아차렸다는 것은 변화가 시작됐다는 의미예요.”
얼룩덜룩한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지 않고 완벽하고 순수한 처음 그대로의 모습에 매달린다면 나는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내가 속한 사회와 나의 정체성을 규정했던 역사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다양한 층위로 얽힌 삶의 결을 이해할 수 없을 테니까요.


그림 앞에 서는 것은 야간열차를 타고 내 안에 너무나 많은 나를 만나는 경험입니다. 여행을 통해 자신을 둘러싼 관계를 단순화하면서 삶에서 풀지 못했던 매듭이 자연스레 풀리는 경험을 했습니다. 자기 영혼의 떨림에 따라 행동하고, 현재의 나로부터 온전히 나를 지키고, 열린 시선으로 관계를 다시 바라보고, 떠난 흔적을 만나서 진실한 이별을 하는 연습 무대였습니다. 무엇보다도 1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0과 1 사이에 무한한 변주만큼 얼룩덜룩한 삶의 흔적을 과정의 하나로 인정하는 계기였습니다. 그래서 외롭지만 결코 외롭지 않은 여정이었습니다. 여행을 통해 재구성한 삶의 기억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마음속 어두운 공간에 울긋불긋 등이 하나 둘 켜지는 풍경을 떠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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