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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윌마 Oct 13. 2020

깨지지 않았다면 들여다보지 않았을 겁니다.

훤히 바깥이 보이는 창문에 색을 입혔습니다. 색이 바랄 때면 다시 입혔고, 색에 지칠 때면 다른 색을 입혔습니다. 어느새 두껍게 벽이 된 창문. 깨지지 않았다면 그 안을 들여다보지 않았을 겁니다. 창문이 깨진 이후로 ‘내 안의 나’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오늘은 다짜고짜 내 나이를 묻습니다. 나는 몇 살일까요? 물리적인 나이 말고 내가 생각하는 나이를 자문하는 겁니다. 주위에 물어보면 대부분 실제 나이보다 작은 숫자를 말합니다.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금이라도 젊어지고 싶은 욕망을 제외한다면 충실하게 채우지 못했던 예전 그 무엇에 대한 아쉬움의 다른 표현입니다. 안으로는 좌절하고 떠나보내면서 느꼈던 아픈 감정들을 죄다 뺀 나이였습니다. 상처에서 비롯된 슬픔도 나의 소중한 감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실제로는 내 안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모두 들어내고 있었습니다. 밖으로는 주위와 사회의 기대에 미치지 못해 부족한 나이였습니다. 앞만 보며 잡힐 것 같은 누군가의 뒤통수만 쫓느라 자신의 위치를 놓친 나는 어린 사람이었습니다. 깨진 창문 사이로 자신의 이유보다 타자의 시선에 매몰되어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 치는 내가 보였습니다.


언젠가 그림에 비친 내 모습을 발견하고서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그림은 정작 주인은 듣지 못하는 내 안의 목소리를 용케 알아듣고 다시 내게 알려 주었습니다. 잠깐 멈춰서 자기 이야기를 들어 달라는 사소한 부탁이었는데 나는 그 목소리를 들어서는 안될 속삭임으로 치부했습니다. 누군가의 조언을 무시해도 좋을 만큼 내 삶을 확신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채우고 달리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비워야 하는 대상에서 자존감은 빠졌으면 좋겠지만 비울 때는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죄다 비워버리는 것이 사람이 하는 일이더군요. 쉽지 않은 세상살이에 경직되어 답을 찾지 못하는 나에게 그림은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벽이 된 창문을 커다란 캔버스 바탕으로 삼아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바탕은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만큼 마음에 준비가 되었는지를 물었습니다. 숨을 죽이고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기다리며 경청하고 공감하는 무대가 바로 바탕이었습니다.


온몸으로 작품을 밀고 나가는 작가에게 펜과 붓은 대장장이 신 헤파이토스가 준 선물입니다. 헤파이토스가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만들고 여신을 닮은 판도라를 빚었듯이 작가의 몸짓은 창조자의 행위를 닮았습니다. 무(無)에서 유(有)가 만들어지는 과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림에 기대어 앨리스가 된 나는 이상한 나라에 다녀올 때마다 한 마디씩 매듭을 올렸습니다. 매듭을 지을 때면 펜과 붓은 더 이상 창조의 수단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내면의 나를 가렸던 먼지를 털고 묵은 때를 박박 밀어내는 도구였습니다. 채우기 위해 쌓아 올린 발전 말고 내면에 숨겨진 본연의 나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자신만의 결이 담긴 예술가의 은유는 총탄이 되어 내 이마를 뚫고 지나갔습니다. 그들의 은유가 무척 탐났습니다. 나는 탐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살면서 탐을 잊어버렸고 탐을 잊어버렸다는 사실마저 잊고 지냈습니다. 그림을 만나고, 그림에 담긴 사람을 만나고, 그림에 담긴 사람을 닮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스스로 바람이 되고자 걸었던 길에서 만났던 사유와 실천을 이 에 담았습니다.


책은 세 번 읽어야 깊은 맛을 알게 됩니다. 텍스트를 읽고, 저자와 그 시대상을 읽고, 마지막으로 자신을 읽는 것이죠. 그림도 마찬가지로 화삼독(畵三讀)입니다. 존재 저변에 다양한 층위로 얽힌 삶의 결을 이해하는 과정입니다. 그림을 향하던 내 시선은 모두 내 삶에 던지는 질문이었습니다. 답은 과정에 있을 겁니다. 함께 찾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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