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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윌마 Oct 14. 2020

칼의 노래, 김훈

절대적이면서 개별적인 아픔은 베어지지 않는다

싸움은 싸울수록 경험되지 않고, 지나간 모든 싸움은 닥쳐올 싸움 앞에 무효입니다. 싸움에서 드러날 아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나간 모든 아픔은 새로 다가올 아픔 앞에 무효입니다. 전쟁이라는 하나의 틀에 뭉뚱그려진 아픔 말고, 그 안에 개별적 아픔들을 바라본다면 아픔의 국면은 다시 시작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픔은 경험을 통해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픔을 통해 각성된다는 아픔의 참뜻은 새로운 아픔 앞에서 힘을 잃습니다. 치유를 말하지 못하는 아픔은 베어지지 않을 허망하고 무의미한 것들입니다. 근원을 알 수 없는 적들의 적의가 그렇고, 순신을 살려서 사직을 살리고 순신을 죽여서 사직을 살리고 싶은 임금의 적의가 그러합니다. 허망한 것을 허망하다 베지 못하고, 무의미한 것을 무의미하다 베지 못하는 순신이 그러합니다. 표적을 겨냥하지 못하는 순신의 칼은 허망합니다. 순신 자신은 베어지지 않을 헛것을 끌어안고 하루하루를 견디는 또 하나의 허망함입니다. 순신은 자신의 허망함을 베고 싶습니다. 죽여야 할 것들을 모두 죽여서, 세상이 스스로 세상일 수 있게 하고 싶습니다.

칼은 칼날을 비켜선 모든 공간을 동시에 겨눠야 합니다. 동시에 칼날에 닿지 않은 닥쳐올 모든 찰나를 겨눠야 합니다. 젊은 순신의 칼은 가르며 나아가는 공세에 보이지 않는 수세의 무지개를 동시에 거느리고 있습니다. 날래고 순결한 칼입니다. 하지만 칼이 세상 전체를 적으로 한다면 더 이상 칼일 수 없습니다. 베어지지 않는 헛것을 경험하는 순간, 삶은 아픔을 이야기합니다. 손에 쥔 칼이 삶을 노래하는 것인지 죽음을 노래하는 것인지 불분명해집니다. 칼로서 지켜내고 막아내야 할 세상의 의미는 공세와 수세라는 칼의 공업적 이미지에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김훈의 <칼의 노래>는 끝끝내 베어지지 않을 세상의 아픔에 대한 노래입니다. 허망한 것과 무내용한 것을 베지 못한 순신의 내면에 대한 노래입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자라고 힘이 다해 죽습니다. 그것이 자연의 이치죠. 그때 세상은 스스로 세상일 수 있는 것이고 사람은 스스로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런 단순한 이치로 돌아가는 세상은 꿈에나 존재하는 것일까요? 칼을 휘두르면 베어지고 단절됩니다. 단절은 상처의 시작점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잘못된 세상에 대한 단호한 거절입니다.

나라의 칼이 백성을 지키지 못할진대 나라의 칼로 다 죽여 달라고 백성은 통곡합니다. 백성이 원하는 칼은 죽음 너머의 삶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삶과 죽음을 동시에 말합니다. 넘실대며 들이치는 파도는 매 순간 삶과 죽음을 섞어 버립니다. 어느 순간 백성은 자신이 바라는 칼이 삶을 노래하는 것인지 죽음을 노래하는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워집니다. 자신들은 한 번도 칼을 원한 적이 없다는 것은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감당할 수 없지만 감당해 내야 하는 처지에서 삶과 죽음은 회색지대를 겉돕니다. 삶과 죽음이 희미한 세상은 오직 각오만을 강요합니다. 백성에게 칼은 상처의 시작점일 뿐입니다. 아픔의 단면이 극명히 드러납니다.

날이 밝으면 자신을 베어 달라는 순신의 여인 여진의 간청에는 자신의 아픔을 베어 달라는 애절함이 담겨 있습니다. 여진의 몸에 새겨진 상처는 아문지 오래되었지만 결코 아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 이상 상처를 감당할 수 없는 여진은 자신을 베어 달라 간청합니다. 여진이 원하는 칼은 죽음이라는 단절로서 잘못된 세상을 거부하는 칼입니다.

여기에 방향과 근원을 알지 못하는 칼이 있습니다. 임금의 칼은 방향을 알 수 없습니다. 칼은 말과 말 사이에 숨어 보이지 않습니다. 수긍할 수 없는 죽음의 방정식 같은 칼이기에 행간을 깊이 들여다봐야 하지만 허망한 것들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쇠의 푸른 속살에서 순신의 목숨 무늬가 느껴지는 적의 칼은 적의를 알 수 없는 칼입니다. 오직 죽기 위해 밀어닥치는 광(狂)에 가까운 적의는 되레 적이 느끼는 똑같은 고통과 똑같은 무서움의 개별성을 알려줍니다. 개별성을 생각하면 모든 죽음이 참담하지만 적의 칼을 보듬어 살필 수는 없습니다.

순신의 칼은 염(染)자를 말합니다. 옷감에 물을 들이듯이, 바다를 적의 피로 바꾸고 싶습니다. 일휘(一揮)라는 글자에 마음이 갑니다. 세상의 아픔을 한 번에 쓸어버리고 싶은 그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하지만 허망함을 벨 수 없는 순신의 칼은 표적을 겨냥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칼로서 자신의 위치를 알지 못하는 순신은 적에 의해 자리 매겨지는 자신의 위치를 받아드립니다. 그에게 허락된 칼은 죽음을 내어주면서 죽음을 받아 내는 칼입니다. 내어줄 것은 목숨밖에 없지만 내어줄 수 없는 목숨을 붙들고 살아서 기진맥진한 칼입니다. 적과 임금의 칼 사이의 바다에 서서 ‘신의 몸이 살아 있는 한 적들이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라며 다시 세상을 겨누는 칼입니다.

김훈이 그린 칼의 군무를 보면서 마티스가 그린 <춤>을 떠올립니다. 손에 손잡고 빙글빙글 원을 그리며 춤을 추고 있는 여인들입니다. 여인들 각자는 표정과 몸짓을 통해 자신의 개별성을 말합니다. 김훈이 그린 춤에는 사람들의 손에 칼날이 쥐여져 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칼은 자신이 아닌 상대의 손에 들려 있습니다. 칼날을 잡은 손에 상처가 납니다. 아문 상처 위에 새로운 상처가 나고 피가 흐릅니다. 아픔을 피할 수 없듯이 그 칼날을 잡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동안 마티스의 그림에서 다름을 다름으로 인정하면서 하나 되는 치유의 춤을 보았습니다. 김훈의 글에서는 베일 수밖에 없는 칼날을 잡고 춤을 추는 사람들의 개별적인 아픔을 봅니다. 그 아픔의 합이 빙글빙글 원을 그리며 하나의 아픔으로 연결되는 한맺힘을 봅니다. 아직 우리는 주위의 아픔을 눈이 아프도록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 징징징 울어 주는 칼의 노래에 귀기울어야 합니다. 원을 그리며 춤추고 뛰고 노래했던 진도 여인들의 모질고도 신기한 생명을 느껴야 합니다.




컴퓨터와 자주 씨름을 합니다. 요즘은 스마트폰으로 바뀌었죠. 분명 여러 번 확인 과정을 거친 뒤에 컴퓨터에 입력을 했는데 예상하지 못한 결과에 허둥댑니다. 다른 날짜를 예약했거나 주문한 내역이 원하는 것과 다른 경우에 해당합니다. 데이터와 논리에 기반한 컴퓨터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나의 기억 왜곡과 실수가 대부분이죠. 실수를 일으킨 타당한 사유를 발견하면 그나마 위안이 되지만, 이도 저도 아니면 내 자신을 의심하게 됩니다. 알면서도 실수는 반복되고 시선은 고착화됩니다. 나의 기억은 왜곡되고 나는 나를 모르는 사람이 됩니다. 낯선 나를 눈감아주고 모른 척 넘어가면 나는 나를 모른다는 사실마저 모르는 사람이 됩니다.

간혹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사람을 만납니다. 머뭇거리는 나를 대신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먼저 얘기해 줍니다. 내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했는지, 그리고 해야 하는지를 더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의 시선에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내면의 나를 만납니다. 그 앞에 서면 꼼짝달싹 움직일 수 없습니다. 신기한 일이죠. 바로 소설가 김훈입니다.


부족한 기록과 부정확한 기억의 합인 나는 아직 컴퓨터보다 우위에 있다고 자신합니다. 실수를 인정하고 발 빠르게 대책을 강구할 수 있다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내가 나를 모른다는 사실마저 모르는 내가 스스로 실수를 인정하는 것은 온전히 내 힘만으로 도달하기 쉽지 않습니다. 쓰디쓴 과정이라는 경험을 통해 세상을 통찰하는, 한마디로 직관을 가진 김훈 같은 작가의 시선을 따라가면서 얻은 혜택일 것입니다. 편견과 고정관념에 빠져 있는 우리의 시선은 책을 통해 반성과 재인식의 과정을 얻게 됩니다. 지난번 관음포 기행은 헛것이었습니다.

다시 관음포 바다를 그리며 나는 생각에 잠깁니다. 순신이 베지 못해 이 세상에 남겨진 적의를, 김훈이 베고 싶어 집착하는 세상의 아픔을, 벨 엄두를 내지 못해 내 안에 살고 있는 적들을 생각합니다. 노을이 내리는 관음포 바다가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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